이맘때가 되면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다음 가을바람을 휘젓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트렌치코트는 그 신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옷이다. 허름해도 멋이 있고, 안에 어떤 옷을 입든 너그러이 품어주고, 벨트를 졸라매서 입든 열어둔 채로 입든 그야말로 ‘걸치면’ 패션이 되니 말이다. 부담스러운 가죽 바지도, 대책 없이 요란한 치마도 트렌치코트와 함께하면 ‘나름 멋있게 봐줄 정도’로 거듭난다. 한마디로 스타일링하기 참 편한 옷이란 얘기. 3년 전 <옷 이야기>를 쓸 당시 트렌치코트를 잘 입는 사람들 과 인터뷰에서 그들은 트렌치코트가 “영감을 주는 옷” “뒤태를 멋지게 만들어주는 옷” “격을 보장하는 옷”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 씨는 트렌치코트의 완벽한 디자인을 논하며 액세서리를 더하거나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옷과 매치하면 오히려 매력 이 반감한다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트렌치코트의 DNA는 흠이 없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브랜드 홍보 전문가 변성용 씨는 막 입는 트레이닝복이건 신경 써서 입는 슈트건 트렌치코트와 입으면 스타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다.
트렌치코트의 신묘한 점은 유연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딱딱한 외양을 지녔지만 함께 입었을 때 충돌하는 옷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치마 길이도 상관없고, 심지어 한복 치마에도 어울린다. 패셔니스타로 이름난 변정수 씨는 디자인이나 소재, 디테일이 새로운 트렌치코트에 자신의 취향을 실어 연출하는 것을 즐긴다. 그녀는 소재와 실루엣이 가뿐해진 트렌치코트를 원피스 느낌으로 소화하며 특유의 스타일 감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패션 디자이너 이정우 씨는 30여 년 전에 구입한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가장 놀라운 옷으로 꼽는데, 이유인즉 지금 입어도 트렌디하고 어색하지 않은 점이 경이롭다는 것이다. 버버리의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는 그의 창조물이 범시대적 패션 아이콘이 될 거라는 사실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육군 장교들을 위해 고안한 개버딘 소재의 레인코트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폼 나는 패션 필수품이 된 걸 보면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것 같다.
할아버지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든 연령층에게 나름의 멋을 선사하는 트렌치코트는 세대를 아우르는 격식을 지니고 있다. 가슴 쪽의 덮개와 등에 달린 케이프 백, 넓은 깃, 위엄이 숨 쉬는 견장, 중심을 잡아주는 벨트의 버클, 단추로 여미는 주머니, 소매 끝의 슬리브 탭, 체크무늬 안감 등 트렌치코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하나하나가 특별하다. 세심한 디테일의 내공은 시대를 뛰어넘어 트렌치코트를 요긴한 유행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이끈 공신이 아닐까? 물론 유명 인사의 몫도 간과할 수 없다. 지난해 인천공항에서 배우 전도연 씨의 버버리 트렌치 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머리를 질끈 동여 묶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허리를 꽉 졸라맨 트렌치코트를 입은 모습에서 수수함과 시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 씨가 보여준 비둘기빛 원피스와 짙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의 매치도 트렌치코트를 스타일리시하게 입는 정석을 보여준다.
가을이 되니 트렌치코트로 멋을 내고 싶다. 검은색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외출하고 싶다. 검은색이나 흰색 옷과 입으면 깔끔하고 지적인 느낌을 주고, 긴 드레스와 입으면 트렌치코트 밑으로 내보이는 기다란 치맛자락 덕분에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나고, 굽 있는 부츠를 신으면 다리가 더 길어 보이는 효과를 내는 트렌치코트. 색이 바랜 청바지도 트렌치코트와 함께라면 낡아 보이지 않으며 머리가 헝클어져도 트렌치코트 위에서만큼은 “저것이 콘셉트겠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니, 그 위력이 허를 찌른다. 따지고 보니 트렌치코트에 어우러지지 않는 색상이 없고 모든 상황에 어울린다는 사실 역시 감동적이다. 그래서 감각이 둔해졌다고 느낄 때, 트렌치코트는 스타일의 열쇠를 쥔 해결책이 되어준다. 꼭 베이지색만 고수할 필요는 없다. 빨강은 산뜻하고 네이비 블루는 고매하고 카키는 운치가 있으며 초록은 생동감이 넘친다. 트렌치코트의 구조를 취하면 다루기 어려운 시폰이나 화려한 태피터taffeta(광택이 있는 얇은 견직물) 소재도 매력적이다. 트렌치코트는 색이나 길이, 소재를 종횡무진 변주하는 노련한 재주꾼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 김은정 씨는 <마리끌레르> <엘르>의 패션 디렉터와 <마담휘가로> 편집장을 거쳐 샤넬 홍보부장으로 일하는 등 언제나 패션과 밀착한 생활을 해왔다. 현재 각종 잡지와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는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감각적 스타일을 자신의 것으로 잘 버무리는 방법을 쓴 <옷 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