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을 풀지 않고도 발을 넣을 수 있다니! 어떤 민족이든 그들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종종 패션의 흐름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노르웨이의 한 농부 사진이 잡지에 실렸다. 그는 끈을 풀지 않고도 그냥 발을 쑥 집어넣어 신을 수 있는 편리한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신발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인디언들의 신발 모카신moccasin과 흡사했지만 뒷굽이 더 넓고 평평했으며 발목 위로 올라오는 장식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신발에 관심을 보이자 이를 흉내 낸 단화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끈과 굽이 없어 편하게 신고 벗는 슬립온slip-on 슈즈, 즉 로퍼가 탄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가죽 단화가 베니스의 보트처럼 생겼다고 해서 베니스 로퍼라고 불렀다. 가죽으로 만든 로퍼는 예상대로 곧 유행이 되었다.
(왼쪽) 최고급 소재와 유연한 곡선이 어우러져 슬리퍼를 신은 듯 편안함을 주는 가죽 로퍼는 가격 미정, 살바토레 페라가모.
로퍼에 동전을 끼워 신으면 행운이 온다? 원래 로퍼는 노르웨이 농부들이 가축 농장에서 힘든 일을 할 때 신었던 신발이다. 그들은 헛간과 우리 사이를 편하게 다니기 위해 신고 벗기 편한 단화를 신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신발은 힘든 노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로퍼가 여가를 즐기는 상류층 멋쟁이들의 상징이었다. 특히 발등에 가죽 띠를 덧댄 스타일이 인기를 끌면서 사교 생활을 즐기는 남자들 사이에는 스트랩 중간에 동전을 끼워 넣는 게 유행했다. 이 신발을 페니 로퍼Penny Loafer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이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도록 로퍼에 1페니를 끼워 넣었던 것이 유행으로 번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유래와는 상관없이 스트랩 틈에 끼워 넣은 1페니 동전이 행운을 불러온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더 큰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고급 로퍼는 숙련된 기술자가 수작업으로 재단하고 굽과 창 가장자리까지 직접 솔로 다듬어 만든다.
멋쟁이들이 신는 유행을 타지 않는 신발 로퍼라는 이름은 이 신발이 가진 특성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합한 표현이다. 영어의 로퍼Loafer는 게으름뱅이나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퍼는 대부분의 남성 구두와는 달리 신고 벗기 불편한 끈이 없고 옷차림에도 얽매이지 않아 정장이든 캐주얼이든 상관없이 발을 신발 속으로 쑥 밀어 넣으면 그만이다. 요즘 선보이는 로퍼는 버클에 술 장식이 있는 것부터 클래식한 구찌 스타일에서 볼 수 있는 홀스비트(말 재갈) 장식이 있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여전히 로퍼를 클래식한 프레피 스타일의 기본으로 인식하는 경향은 있지만, 각계각층의 남자가 연령대를 불문하고 저마다의 개성 있는 스타일로 신는 가죽 신발은 오직 로퍼뿐이다. 이 신발은 어떠한 옷차림에도 실용적으로 신을 수 있다. 청바지나 블레이저 재킷, 정장 슈트, 심지어는 반바지에도 잘 어울린다. 이제 로퍼는 고풍스러운 검은색이나 갈색 외에도 파란색과 흰색, 노란색과 초록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컬러와 소재로 등장한다.
뭔가 새로운 것이 출현할 때는 그것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로퍼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처음 등장한 1930년대 이후 지금까지 로퍼는 꾸준히 진화해 왔고 그 변화는 대부분 성공담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의 신발장에는 로퍼 한두 켤레가 놓여 있고 어쩌면 우리의 자녀 역시 동전을 끼워 넣은 페니 로퍼에 자신의 운을 시험해볼는지도 모르겠다.
1 고무 바닥으로 편안함을 더한 화이트 로퍼는 가격 미정, 살바토레 페라가모.
2 태슬 장식의 클래식 로퍼는 83만 6천 원, 아.테스토니.
3 태슬 장식이 달린 블랙 로퍼는 1백17만 원, 보테가 베네타.
4 부드러운 카프 소재로 만든 페니 로퍼는 1백12만 원, 보테가 베네타.
5 네이비 스웨이드 로퍼는 60만 원대, 토즈.
6 캐주얼한 감각의 스웨이드 페니 로퍼는 25만 원대, 에스콰이아.
스타일링 정소정 손 모델 김범준 참고 서적 <평범한 것들의 아주 특별한 역사>제품 협조 보테가 베네타(02-3438-7682), 살바토레 페라가모(02-2140-9642), 아.테스토니(02-554-4310), 에스콰이아(031-730-9453), 토즈(02-3448-8105), 휴고 보스(02-515-4088)
- 이것이 클래식이다 편하고 익숙해서 더 좋은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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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시원한 풀밭이나 따뜻한 모래 위를 걷는 기분은 황홀하다. 하지만 풀이 젖었거나, 모래가 타듯이 뜨거울 때는 신발을 신는 쪽이 훨씬 기분 좋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듯 편안한 가죽 신발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