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모양의 펀칭 레이스 칼라는 30만 원대로 스수와 제품. 섬세한 깃털 모티프의 레이스와 원형 모티프의 레이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993년에 촬영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시골집 사진에서 인상적인 것은 집 안 곳곳에 등장하는 크로셰 레이스이다. 창가에 드리워진 레이스 발 너머로 다듬어지지 않은 정원이 내다보이고, 테이블에는 레이스보가 덮여 있다. 메콩 강의 더운 밤공기에 스며든 재스민 향처럼 혼미한 열정을 촘촘히 엮어내던 작가에게 레이스는 제법 잘 어울린다. 오로지 레이스만으로 올 가을*겨울 컬렉션을 만들어낸 미우치아 프라다는 ‘레이스와 여자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희로애락이 조각조각 엮이는 삶에서 고맙게도, 또는 어쩔 수 없이 여성적인 순간에 레이스가 등장한다. 첫돌도 지나기 전, 여자 아이라서 신을 수 있었던 레이스 프릴이 달린 양말. 진짜 공주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입고 다니던 유치원 시절의 레이스 원피스. 잠 못 드는 사춘기 시절 한밤에 릴케가 속삭이던 레이스. 실연하고 앉은 술집 테이블에 덮여 있던 낡고 촌스러운 레이스 덮개, 만감이 교차하는 웨딩드레스….
여자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천상의 것인 양 아른거리는 레이스에 끌린다. 여섯 살 때 나는 어머니의 천 꾸러미 속에서 찾아낸 레이스 한 조각이면 하루 종일 그것만 만지작거려도 지겹지 않았다. 어느 디자이너는 프랑스제 레이스로 만든 한복을 입고 다니던 ‘천사 같던’ 어머니와 그 한복을 물려받아 자신의 레이스 드레스를 만들어 입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햇빛 속에 하늘거리던 유년 시절의 레이스는 평화로운 노스탤지어다.
프랑스 버건디 지방에서는 초경을 치른 여자가 속옷에 레이스나 자수로 자신만의 표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학자 이본 베르디에는 이것을 여성성에 대한 최초의 자각으로 해석했다. 나는 짧은 커트 머리와 셔츠 칼라가 달린 공무원 복장 같은 교복, 어머니가 사주는 무늬 없는 순면 속옷의 시대를 마쳤을 때, 머리를 기르고 레이스가 소심하게 들어간 분홍색 속옷을 샀다. 레이스는 곧 여자라고 누가 말해준 적도 없는데, 마음이 복사꽃처럼 피던 그 시절 봄에는 저절로 분홍색 레이스에 눈이 갔다. 별것 아닌 일에도 까르륵거리고 서툴게 연애하던 그 무렵 레이스는 몸에 익지 않은 속옷처럼 달뜨고 어설펐다.
여자들에게 레이스는 감정의 변화와 맞물린다. 무방비 상태로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동갑내기 친구는 세상 마지막인 것 같은 연애를 하면서 빅토리안풍의 검은 레이스가 가슴에 장식된 캐시미어 스웨터와 검은 레이스 속옷을 샀다. 레이스를 갑옷처럼 두르고 녹록지 않은 연애에 뛰어든 친구는 용감한 전사 같았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할 줄 알았던 오래된 연인과 헤어진 나는 ‘일만 하겠다’며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면서도 속에는 꼭 아래위 짝을 맞춘 질 좋은 레이스 속옷을 입었다. 상처받지 않고 품위 있는 서른 살 여자로서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레이스는 엄격하고 고독했다.
레이스는 웨딩드레스에 와서 성숙해진다. 질풍노도의 불온한 청춘을 접고 책임감과 신뢰의 신세계에 발을 디딜 때 레이스는 빛난다. 18세기 영국 여인들이 레이스를 짜고 문양을 들여다보며 사람과 사연, 관계를 숙고했듯이 자신의 인생에 타인과 가족을 위한 자리를 내줘야 하는 신부에게는 레이스 같은 인내심과 혜안이 필요하다.
레이스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좀 더 나이 든 여자들의 경우에서다. 시어머니가 가방에서 꺼내는 옛날 스타일의 하얀색 레이스 손수건이나 아직도 손수 속치마를 지어 입으시는 어머니가 침침한 눈으로 밑단에 대는 레이스 장식 같은 것 말이다. 여성 호르몬과 남성 호르몬은 예전에 역전되었고, 지나고 보니 남자인 것도 여자인 것도 다 부질없을 나이에 레이스 조각을 간직하고 있는 여인들은 각별해 보인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레이스를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슨 자그마한 벌레가 있어서 그것이 레이스를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은 누에 같은 그런 벌레를 기르는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공상을 해보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라고 했다. 레이스는 마법 같고, 또 누구에게나 있다.
이탈리아에서 찾은 레이스 스토리
유럽 전통 레이스 공예의 중심지로 이탈리아의 브라노 섬을 꼽을 수 있다. 베니스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브라노 섬 곳곳에서는 최고급 실을 사용해 정교하게 만든 섬세한 레이스 공예품을 파는 상점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1981년에는 레이스 박물관을 설립해 브라노 레이스 공예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된 것. 레이스는 15세기 말 베니스에서 창안됐는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진다. 베네치아의 젊은 뱃사공이 그의 연인에게 아름다운 해초를 선물한다. 이것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 여인은 실과 바늘로 아주 섬세하게 해초의 모양을 표현했는데 이것이 레이스의 시초가 되었다고.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듯 한 땀 한 땀 레이스를 만들었을 그의 마음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지금도 레이스에는 기다림과 정성, 풍요로운 여성성이 녹아 있다.
* 글을 쓴 황진선 씨는 <보그> <마리끌레르> <앙앙>을 거친 베테랑 패션 기자이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며 풍요한 은유와 수려한 문체로 다수의 매체에서 그만의 감각을 피력하고 있다.
(왼쪽) 주름이 잡힌 화이트 원피스와 원형 모티프 장식의 살굿빛 7부 코트는 각각 60만 원대, 1백만 원대로 모두 앤디앤뎁 제품.
(오른쪽) 커튼으로 이용한 플라워 문양의 빈티지 레이스와, 반짇고리 안에 든 빈티지 레이스와 소품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 세라믹 화병은 디자인 와츠에서 판매.
2 비누는 달에서 판매.
3 블랙 레이스 볼은 모마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
4 빈티지 레이스 단추는 달에서 판매.
“플랑드르의 레이스 장식과 영국의 바느질, 하얀 무광의 고딕식 기퓌르는 일백 년을 넘긴 아라크네 사람들의 걸작이지만, 당신의 아름다움을 가장 돋보이게 한다네” 앙리 뮈르제의 <라보엠>(문학세계사) 중
(왼쪽) 아플리케로 입체감을 더한 기퓌르 레이스로 만든 누드 톤 블라우스와 칼라, 골드 컬러 스커트는 모두 프라다 제품.
(오른쪽) 플라워 프린트의 시스루 블라우스는 질 by 질스튜어트 제품, 그레이 팬츠는 죠셉 제품, 하늘색 카디건은 블루마린 제품, 그레이 컬러 밴드로 장식한 에나멜 슈즈는 둘 제품, 빈티지 핸드백을 리폼한 타조 가죽 블랙 백은 키뮤즈 리바이벌스 제품. 벚나무로 만든 3인용 소파와 호두나무로 만든 낮은 테이블은 모두 이정섭 작가 작품으로 아름지기에서 전시, 램프 갓은 에이후스에서 판매.
(왼쪽) 그러데이션된 핑크 컬러 프린지가 돋보이는 원피스는 바네사 브루노 제품. 화이트 볼은 리차드홈에서 판매.
(오른쪽) 레이스 머플러로 장식한 화이트 블라우스는 에스까다 제품, 그레이 컬러 플레어스커트는 라우렐 제품.
레이스 장식 담요와 빈티지한 레이스 원단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벚나무로 만든 6단장은 이정섭 작가 작품으로 아름지기에서 전시.
1, 2 레이스 매트는 카렐에서 판매.
3, 4, 5, 6 고희숙 작가의 그릇은 정소영 식기장에서 판매.
7 파우치는 아트&사이언스 제품으로 팀블룸에서 판매.
8 화이트 스낵 볼은 리차드홈에서 판매.
9 접시는 디자인 와츠에서 판매.
10 초는 틸테이블에서 판매.
11 뜨개 팔찌는 달에서 판매.
12 촛대는 에이치픽스에서 판매.
13 뜨개 가방은 팀블룸에서 판매.
14 앤티크한 레이스는 어바웃어에서 판매.
15 실타래는 달에서 판매.
“레이스 읽는 사람은 레이스 문양이 흐릿해지고 상대방 얼굴이 베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레이스를 응시한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순간, 또렷하진 않지만 무언가가 언뜻 스치리라. 바로 그 순간,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존재하는 그 공간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브루노니아 배리의 <레이스 읽는 여인>(비채) 중
(왼쪽) 면 소재의 하늘색 셔츠, 레이스 소재의 블랙 원피스와 벨트는 모두 프라다 제품.
(오른쪽) 나뭇잎 프린트의 옐로 시스루 원피스 드레스는 퍼블리카 제품, 레이스 장식의 분홍색 담요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붉은 망토를 걸친 강아지 그림은 곽수연 씨 작품. 물푸레나무로 만든 데이베드는 이정섭 작가의 작품으로 아름지기에서 전시.
“신부의 베일이야말로 가장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레이스이다. 그 속에는 꿈이 있다.
결혼식의 신성함 때문에 신부의 베일에는 나쁜 기운이 스며드는 경우가 거의 없고 눈앞에 펼쳐진 삶의 아름다움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레이스 속에서 결혼하는 부부가 낳을 아이들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손자들 모습까지 보이기도 한다.” 브루노니아 배리의 <레이스 읽는 여인>(비채) 중
(왼쪽) 볼륨감 있는 실루엣의 그레이 컬러 블라우스와 자줏빛 스커트는 모두 마르니 제품.
(오른쪽) 부드러운 색상 대비가 돋보이는 핀턱 장식의 시스루 셔츠는 질 by 질스튜어트 제품, 어깨에 걸친 레이스로 만든 케이프칼라는 30만 원대로 스수와 제품.
십자가 목걸이는 키뮤즈 리바이벌스 제품, 플라워 문양의 레이스 목걸이는 스수와 제품, 흑진주 장식의 골드 목걸이는 이카트리나 뉴욕 제품.
1 레이스 장식 머플러는 아타지마 제품으로 팀블룸에서 판매.
2, 7 숟가락은 스핀 제품으로 가로수길 떡집에서 판매.
3 레이스 잔은 정소영 식기장 소장품.
4, 9, 10, 11, 12, 13 레이스가 장식된 컵은 모두 카렐에서 판매.
5 조개 모양 캔들 홀더는 어바웃어에서 판매.
6 커피잔은 리차드홈에서 판매.
8 레이스 매트는 카렐에서 판매.
14 레이스 타래는 달에서 판매.
- [스토리 패션] 누구에게나 레이스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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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하고 중첩되며 짜여지는 레이스는 희로애락으로 엮이는 삶을 닮았다. 일찍이 릴케는 레이스에서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아이러니와 직관의 영역을 발견했다. 남자의 인생에 영웅담이 있다면 여자의 인생에는 내밀한 레이스가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