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태 씨는 거실에서 개인 작업과 포트폴리오 정리, 웹서핑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GRAPHIC DESIGNER
Kim Seung Tae
짧은 순간이 누군가의 뇌리에 강력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외국계 기업에서 디자인과 아트 디렉션을 담당하는 디자이너 김승태 씨가 5년째 살고 있는 한남동 집. 이 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머무른 프랑스 베르사유 22번가의 원룸을 떠올렸다. “교환학생 시절 살던 집과는 풍경도 구조도 달라요. 그런데 창문 크기가 같아 보였죠. 크기가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지만, 제 눈엔 분명 그렇게 보였어요.”
승태 씨의 보금자리. 그는 이 집을 처음 만난 순간 창문을 보며 파리에서의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그래픽디자인에 빠져든 건 학창 시절 무렵이다. 제품 디자인이나 가구 디자인과 달리 컴퓨터 하나로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매력적이었다. “초등학교 컴퓨터 수업 시간에 배운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가 재밌었어요. 당시 온라인 카페 구직 게시판에 올라온 학원 수강생 모집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자유분방하면서도 즐거운 디자인 작업은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접어들자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시 학부에서는 스위스 국제주의 스타일과 독일이나 영국의 모던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정답인 것처럼 여겨지는 추세였어요.” 디자인에 정답이 있을지 물음표를 품고 있던 승태 씨. 그에게 교환학생으로 간 프랑스는 꽤 파격적이었다. “그곳은 일러스트레이터가 타이포그래피를 하고 건축가가 그림을 그리는 등 경계를 교차하고 넘나들더라고요.” 규범에서 자유로운 건 디자인뿐만이 아니었다. “그곳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에도 질문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짐짓 당연하다 생각한 게 사실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기존 관념을 깨트리는 경험을 했죠.”
거실 한쪽에는 수납공간이자 비밀의 장소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벽에는 승태 씨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브랜드 써네이SUNNEI와 그래픽 디자이너 가브리엘레 차갈리아Gabriele Zagaglia가 협업해 배포한 포스터를 걸어놓았다.
파리가 아닌 한남동에서 학생이 아닌 디자이너로 살지만, 그 시절 흔적은 여전히 집 안 곳곳에 산적해 있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신문 1면, 특정 장소에서만 구할 수 있는 향초, 심지어 한 카페에서 쓰던 테이블보도 액자에 정갈하게 담겨 있다. “장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라는 작가가 그린 거예요. 획 하나를 정교하게 그리려고 하는 제 그림과 디자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유분방함 같은 게 담겨 있어 이 작가를 좋아하는데요, 웬걸, 작가가 그린 그림이 카페 원형 탁자 테이블보로 쓰이고 있더라고요. 직원에게 몇 장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죠. 여러 개 챙겨와 선물 포장지로 활용하고 딱 한 장 남은 걸 액자에 넣어놓았죠.”

승태 씨는 본격적인 작업이나 업무를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놓았다. 이곳에는 작업 툴 외에도 예전부터 모아온 엽서와 필름 사진을 비롯해 그에게 영감을 주는 다양한 서적이 자리한다.
첫 독립 후 이곳에서 줄곧 지낸 승태 씨의 집은 그만의 취향을 탐구하고 정립하는 역할을 했다. “독립 초기에는 테이블도 소파도 인더스트리얼 무드의 제품으로 꾸몄는데요, 어딘지 차갑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사람이 사는 공간에는 필시 따뜻함이 필요하단 걸 말이죠.” 거실 테이블과 스툴을 자작나무로 만든 빈티지 아르텍 제품으로 바꾼 것도, 식물이라곤 내내 키우지 않던 그가 2년 전부터 식물을 키우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혼자 살며 깨달은 게 있어요. 회사 업무와 개인 작업, 그리고 집 꾸미기의 공통점은 덜어내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몇 년 전만 해도 거실 선반에 여러 물건이 빼곡했는데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잔가지를 쳐낸 식물처럼 깔끔해진 편이거든요. 차이도 분명해요. 과제나 업무는 브리프가 있고 마감 기한이 있지만, 내 집에 산다는 건 마감일이 없어요. 그러니 끊임없이 다듬을 수도, 덜어냈다가 다시금 이전 모습으로 되돌릴 수도 있죠. 내 집에 산다는 건 업무나 작업 같은 완성형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유기체 혹은 계속 갱신할 수 있는 순수한 작업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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