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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이혜미 삶도 은처럼 아름답게 황변하기를
흙으로 빚었으나 금속 질감이 나는 도자로 MZ 세대까지 사로잡은 이혜미 작가. 효창동 골목길, 상가 주택에 새로이 터를 잡았다. 살림집과 도예 작업실, 갤러리와 응접 공간이 제자리를 차지한 4층짜리 집. 그 안, 도예가의 달팽이걸음 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이 집의 백미는 3층 온실. 유리 벽으로 침실과 공간을 나누고, 천창을 내고, 화단처럼 흙을 돋우고, 배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고 나니 그야말로 식물과 함께 사는 집이 완성됐다. 이사하는 날 반려견 버두의 피난처로 잠시 사용했는데, 그날 이후로 버두는 온실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3층 침실. 시선이나 동선이 차단되는 것이 싫어 문을 없앴다. 왼쪽 창문으로 효창동 풍경이 내다보인다. 창문 아래 서재 공간은 카페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어 2단 형태의 높은 책상을 제작했다.
시위라도 하듯 천지에 벚꽃 날리더니 가뭇없이 져버렸다. 아침마다 창 너머로 벚꽃 폭설을 바라보던 집주인은 하루 하루가 아까워 애가 닳았다. 4월 10일경, 우리를 맞은 건 열두 살쯤 됐다는 반려견 버두와 은빛 도자기와 어느새 잎 만 무성한 벚나무.

“재작년 겨울에 이 집을 매입했는데, 그땐 무슨 나무인지 모를 나무가 가지만 앙상했어요. 그러다 공사를 시작한 작년 3월부터 벚꽃이 말 그대로 눈에 박히도록 피는 거예요. 집을 다 짓고 올해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서서히 즐기자 싶었는데, 올해도 어느새 다 져버린 거죠.”

<주역>에 이런 말이 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할 수 있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이를 거꾸로 읽으면 이쯤 된다. “편하면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 변화하지 않는 것, 그것은 죽은 목숨과 매한가지라는 말이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겨울 가면 봄이 오며, 어리다가 젊다가 늙고, 꽃이 피면 꽃이 지는 변화야말로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보호 장치다. 그러니 꽃 진다고 슬퍼하지 말기를. 저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 노래 부르며 흘러가는 시절을 그저 바라보기를.


옥탑에서 3층을 엿보았다.
김수연 작가(@sooyon.sinchon)의 모시 발에 이혜미 작가의 실버 자기를 매달았더니 한 점의 그림 같다.
흙으로 빚고 은을 얹어 은기 같은 도자를 만드는 이혜미 작가의 작업.


은이 겪은 시간의 흔적
도예가 이혜미. 약초 캐듯 캐물어 얻은 간추린 이력부터 전한다.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도자를 전공한 후 이헌정 작가가 이끄는 도예가 그룹 바다디자인아틀리에에서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도자 작품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도자기 디자인실에서 일하며 개인 작업을 이어갔다. 이후 독립해 은을 바른 도자(실버 라인), 테두리에만 금 붓질을 한 백자(골드림 라인), 자개의 빛을 담은 진줏빛 도자(진주 라인), 형태를 살짝 비튼 비정형 백자 등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새벽 물빛에 쏙 빠졌다 나온 듯 말끔한 그의 도자는 차갑고도 차갑지 않다. 어둠을 걷어내는 햇빛 대신 어둠까지 끌어안는 달빛을 닮았다. 무엇보다 도자기의 최고 미학은 촉각 일진대 금속 기물을 닮은 그의 은빛, 진줏빛, 우윳빛 도자는 손으로 슥 만지면 금속에는 없는 온기가 스민다.


“시아버님의 지분이 많은 공간이에요. 미술을 사랑하는 아버님이 선물한 작품, 제가 좋아하는 포스터 등으로 꾸민 아트월이죠.”
2층 주방. 살림 공간의 역할은 크지 않고, 1층 갤러리에서 전시나 모임을 함께 할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주로 쓸 예정이다. 바닥에 깐 페르시안 카펫은 튀르키예 대사관이 이전하면서 대사관 비품을 판매할 때 시아버지가 구입해 선물한 것.
“스텝을 밟아온 것 같달까요. 제가 워낙 상회上繪 안료에 관심이 많아요. 유약 작업을 하고 그 위에 상회 안료로 착색한 다음 낮은 온도로 굽는 방법인데, 그 안료를 개인 도예가는 접하기도,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어요. 무엇보다 회사에서 쓰는 양은 규모가 다르고요. 상회 안료 작업에 특화된 회사인 한국도자기를 다니며 많은 경험을 했죠. 그 과정이 진줏빛, 금, 은 작업을 가능하게 했고요.”

그의 은채 도자는 유약을 바르고 구운 그릇 위에 은채를 덮고, 굽고, 연마하는 과정을 두세 번 반복해야 한다. 물릴 줄 모르는 노동, 치열한 반복에서 태어난 그 아름다운 빛. 은채 도자가 특히 내 마음을 끄는 건 자연스레 황변하는 은의 빛깔 때문이다. 하루 종일 사람 곁에 머물면서 주인의 손때와 시간을 머금고 누런빛, 갈빛, 검은빛으로 변해가는 그 순환적 면모.


이혜미 작가의 실버 라인 도자는 눈으로는 차갑게 느껴지지만 실제 손으로 만지면 차갑지 않다. 도자만이 지닌 빛과 온기 덕분이다.
“처음 은채 작업을 시작할 때 보관과 관리에 대한 고객들의 염려가 제일 걸렸죠. 그러다 일본에 갔는데, 말도 안 되게 까맣게 변색한 은기에 차를 마시며 ‘이 상태로 너무 아름다운데 무슨 걱정이냐’ 반문하더라고요. 그길로 은채 작업을 시작했죠. 지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그 상태가 진짜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닳다’ ‘해지다’ ‘배다’ ‘바래다’ 같은 동사는 공예의 참 아름다움을 설명한다. 도예가 이혜미가 좋은 재료를 선택해 정직한 공정으로 만든 ‘일하는 기물’은 주인 곁에서 변해 갈 것이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꽃이 피면 지는 것처럼 은빛이 누런빛으로, 갈빛으로, 검은빛으로.



이혜미 작가는 자신을 “흙을 바탕으로 기器와 오브제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설명한다. 그의 오브제 작업은 트레이, 소반, 인센스 홀더, 화병 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효창동 그 집에 삽니다
낡은 스웨터의 보푸라기처럼 아련한 골목길, 성냥갑을 와르르 쏟아놓은 것처럼 빼곡한 아파트, 한겨레신문사, 나뭇가지가 살짝 닿을 정도의 밀도로 자리한 효창공원의 나무들…. 도예가 이혜미 부부가 한남동에서 주거지를 옮겨온 곳이 하필이면 효창동이다. 그야말로 은빛, 누런빛, 갈빛, 검은빛이 모두 공존하는 동네.

“올해 열두 살이 된 노견 버두에게 골목길과 공원이 있는 동네가 좋겠다 싶었고요. 줄곧 주택에서만 살아온 남편을 위해서도, 공기와 습도·온도의 변화를 감지하는 제 직업에도 그만이었죠. 집 짓고 이사 온 지 7~8개월째인데 하루하루 부지런하게 생명을 틔우는 자연을 바라보는 일이 매일의 기쁨이 됐죠. 벌써 이 정도면 나중엔 더 좋지 않을까요?” 국립중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들르며, 파리 방브 마켓을 사랑하는 그에게, 오래된 물건을 들여다보며 지난 시대를 되새기는 일에 파묻히는 그에게 효창동만큼 알맞는 동네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작업실과 갤러리가 필요한 그에게 골목길의 4층짜리 상가 주택은 마침맞았다. 여러 세대에 임대하면서 1층은 이 복도만, 2층은 저 복도만 쓰는 식으로 공간을 쪼개 놓은 덕에 미로 같은 통로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도시 건축물 재생에서 일인자로 불리는 이건축연구소 이성란 건축가가 최대한 그 구조를 살렸고, 솜씨 좋은 디자인 스튜디오 워킹덕에서 세부 인테리어를 다듬었다.


반려견 버두의 밥그릇과 소반도 모두 이혜미 작가의 작품이다. 버두는 참 좋겠다!
가마가 있는 방 벽면에 남은 이혜미 작가의 작업 흔적.
“지하 작업실, 1층 갤러리, 2층 다이닝룸과 응접 공간, 3층 살림집이에요. 제가 하는 모든 일을 한 건물에서 할 수 있죠.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를 오가며 전 층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다른 물성을 다루는 다양한 작가와 협업 전시를 열 수 있는 갤러리를 꿈꿨거든요. 이 집의 1, 2층이 그 꿈을 이루어줬어요. 1층은 작품만 돋보이는 간결한 갤러리로 만들었고, 2층은 피아노를 놓은 다이닝룸과 주방을 두어 차회나 작가 모임을 할 수 있게 됐죠.”

이 집의 백미는 3층 명당자리를 꿰찬 온실이다. 침실과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둔 온실에는 천창까지 있다.

“한남동 작업실 앞에 화단이 있었는데, 식물들이 열심히 일하는 게 기특하더라고요. 작업에 파묻혀 사는 도예가의 루틴에 그들이 주는 즐거움이 컸어요. 누수 문제 때문에 처음엔 건축가가 안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잘 해결해주셨죠.”

온실 천창 아래 메리야스 한 장 크기의 햇살이 부서지면 식물들은 또 하루 치 삶을 열심히 살고, 버두는 공기를 미세하게 흩뜨리며 어슬렁거리고, 부부는 매일 아침 침대 발치에서 ‘저 아름다운 것들’ 하며 중얼거리고…. 시냇물 내리닫는 목소리로 도예가 아내가 설명하고, 수줍기가 말할 데 없는 의사 남편이 슬그머니 추임새 넣어준 이야기다.


계속 주택에서 자라 주택살이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당하는 남편과 효창동행을 결심하게 한 반려견 버두. 2층의 이곳도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꽃 진다고 슬퍼하지 말기를
자본주의라는 위대한 제도는 정작 물질과 자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역설을 안고 산다. 그 이유의 절반쯤은 본질의 변화 없이 매양 얼굴만 바꾼 비싼 퇴물을 양산하는 구조 탓이다. 하루가 한해 같이, 한 해가 하루같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재료, 흙으로 자신만의 빛과 온기를 빚는 도예가 이혜미. 이제 마흔 살이다. 자신이 만든 소녀상도 나이를 먹더라는 어느 거장 조각가의 말처럼 그의 도자도 나이를 먹을 것은 자명하다. 그 나이 든 도자기가 기다려지는 건 이런 이유다. 그는 하루 종일 단순한 손일을 반복한다. 반복하다 보면 그 단조로움이 창조로 바뀌는 지경에 이른다. 바로 무심의 미가 태어난다. 반복이 자유로 변화하는 경지, 그건 신실한 공예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겨울 가면 봄이 오듯 그 변화의 동력은 단조로움과 반복이다. 그러니 꽃 진다고 슬퍼하지 말기를. 흘러가는 시절을 그저 바라보기를.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