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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 서민범 교수·젬앤페블스 전선혜 대표·부부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앵발리드가 내다보이는 파리 7구의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신당동 골목의 그 집. 삼한사온과 미세먼지로 가득한 서울 한복판에서 일과 가족 사이를 숨바꼭질하듯 사는 그 집 주인의 모습이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다. 대학에서 ‘교양’을 가르치는 교수 남편, 자연 재료로 주얼리를 만드는 디자이너 아내의 가슬가슬하고도 온기 가득한 일상. 그 중심엔 셰이프 게임처럼 부부가 함께한 집 짓기 이야기가 있다.

복층 다락방에서 다이닝룸을 내려다봤다. 이 부부는 위험 요소나 공간 배치가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스스로 익혀나가는 아이의 힘을 믿는다. 그 믿음대로 모서리 보호대나 매트 없이도 다섯 살 모아, 23개월 반호는 건강하고 자제력 있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다이닝룸의 샛문을 열면 전선혜 대표가 사랑하는 테라스가 나오고, 그 앞으로 주택가가 펼쳐진다. 테라코타 컬러를 외관과 내부의 주조색으로 선택한 건 전선혜 대표. 의자나 조명 등 몇 가지를 제외한 모든 기기와 가구는 맞춤 제작했다. 실험해보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는 건 맞춤밖에 없었다고. 식탁 뒤 그림은 권오봉의 작품.
다락의 아이들 방에서 다이닝룸을 다시 내려다봤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딱 저 위치가 마지노선이라는 서민범 교수는 아내를 위해 테라스를 만들었다. 이 장면을 엿보는 우리에게 파리 7구의 아파트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삶은 저마다 다르다. 눈이 늘상 젖어 있어 일생에 한 번도 따로 울지 않는 낙타가 있는가 하면, 낮밤을 줄창 울어대는 개구리가 있고, 일생에 단 한 번 노래하는 새도 있다. 모두 의 삶을 관통하는 법칙이나 지침이란 세상에 없다. 꼭 그래 야 하는 삶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꼭 그렇게 지어야 하는 집도 없다.

주택들이 바늘로 혼 것처럼 늘어선 신당동 골목길. 멕시코 어디쯤에서 봤다 싶다가도, 새마을운동 시절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 같은 황톳빛 건물이 눈을 끈다. 어깨의 기울기 가 수평을 이루지 않아 오히려 편안한 집, 필로티 형태로 붕 뜬 건물 입구가 하이힐 뒷굽처럼 요요한 집. 깨금발로 담 안을 들여다보듯 저 집의 내력을 들여다보고 싶다.

프랑스 국가 공인 건축사이자 가구 디자이너이며 호서대 학교에서 ‘나를 위한 교육’을 가르친다는 서민범 교수. 이효리의 웨딩 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주얼리 브랜드 ‘젬앤페블스’의 전선혜 대표. 이 집 주인 부부의 간추린 이력이다. 첫 번째 집인 이태원 아파트에서 딸 모아와 아들 반호를 낳았고, 고군분투한 끝에 이 집을 지어 이사한 지 6개월째다. 2월의 어느 주말 아침, 다섯 살과 23개월 된 아이들을 떠멘 채 우리를 맞는 부부 앞에서 맥이 탁 풀린다. 겨울 햇살 속 유리 벽에 스며든 봄기운 탓일까. 부숭부숭한 두 아이의 눈웃음 때문일까.


거실에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마스터룸이 자리한다.
거실을 한 바퀴 두른 나선형 계단에는 옷과 세간을 넣을 수납장, 책장을 빼곡히 짜 넣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미니멀리스트인 척하려면” 수납공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고, 그 장소는 거실을 둘러싼 벽면뿐이었다. 그리고 계단 밑으로 비밀처럼 드러나는 놀이 공간!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온 서민범 교수는 요즘 대학에서 ‘나를 위한 교육’, 말하자면 교양과목을 가르친다. 그런데 교양이란 게 뭔가. 시대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교양’, 영어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기초 교양)라는 게 있다.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 가르친 천문·지리·음악·신학,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역사·철학 등이 그것이다. 요즘엔 인문학 정도로 부르는 모양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방을 실험하기 위해 욕조 목욕이 가능한 작은 샤워실, 세면대, 아내의 파우더룸(까만 상판의 책상), 침대, 남편의 서재까지 마스터룸에 모두 구성했다. 지금은 아직 어린 반호를 아빠가 데리고 자는 침실이자,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 오후 2시 반까지 학교 수업을 준비하거나, 희귀 빈티지 시계를 수리하는 취미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책상은 거울과 조명까지 달린 유럽 빈티지 가구를 그만의 디자인으로 리뉴얼한 것.
“제가 가르치는 과목 이름이 ‘모두가 디자이너’예요. 학생들에게 ‘디자이너’라고 해석하지 말고 자신의 전공대로 ‘모두가 간호사’ ‘모두가 엔지니어’로 풀어보라고 하죠. 말 그대로 자유로운 나를 찾는 수업, 대화와 토론을 통해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수업이니까요. 구체적으론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결혼은 하는 게 좋을까’ ‘아이 키우는 건 왜 재미있고 왜 힘든가’ 같은 주제에 대해 대화해요. 프랑스식 토론 교육이 바탕에 깔려 있죠.” 뜨거운 물통 같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나’를 고민하는 수업이라니.

그의 수업 이야기를 장광설로 펼치는 까닭이 다 있다. 프랑스에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를 배운 그는 가족이 살 집을 계획하면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지을 수 있나, 어떻게 하면 틀을 깰 수 있나’를 고심했다.


전선혜 대표가 이끄는 젬앤페블스는 천연 원석, 나무 등 자연 재료 고유의 느낌을 살린 주얼리 브랜드. 패피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한옥 댓돌과 마루의 정취를 끌어들인 입구. 오른쪽 벽에 건 권오봉 작가의 그림은 춤추는 사람의 힘이 느껴져서 이 위치에 낙점했다.
아내의 또 다른 로망 ‘파이어 플레이스’를 원형 계단 구조체에 실현했다. 소파 뒤 벽에 건 그림은 남춘모 작가의 작품으로, 이 그림을 걸 위치와 크기까지 고려해 움푹 들어간 벽감을 만들었다.
“살림집인데 비정형 건물로 짓겠다지, 대한민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섹시한 라인의 건물 입구를 만들겠다지, 가구든 문고리든 기성품 하나 없이 모두 커스텀(맞춤 제작)으로 하겠다지, 층마다 중앙에 나선 계단을 두르겠다지, 마스터룸에는 침대 헤드 뒤로 욕조를 붙이고 방 한가운데 세면대를 두겠다지…. 초반에 같이 일한 한국 건축가(프랑스 건축가인 그를 위해 합류), 현장 소장까지 난색 일색이었죠. 하지만 디자이너는 틀을 무조건 깨야 해요. ‘000는 주택에선 안 쓰는 방법’이라는 편견을 내가 직접 실험하면서 깨봤죠.”

이성복 시인의 시에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란 구절이 있다. 삶이 관성이 되면 뒹굴면서도 잠에 빠져 본질을 까먹는다.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법을 연습하고 또 가르치는 그에게 이 집은 스스로를 실험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최고의 가치는 자유로움에 두되, 명확하고 합의된 틀과 기준이 존재하는 프랑스식 육아를 간접경험한 이 부부는 공간으로 이를 실현했다. 다락방을 아이 방으로 만들고, 싱그러운 그린 컬러의 폴딩 도어와 난간을 안전장치로 설치했다. 대신 디자이너 부부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것을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생활 속에서 경험하도록 예술 작품, 디자인 제품을 손 닿는 곳에 두었다.
뽀로로 매트 하나 없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집
아이의 출생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부부의 일상은 B. C.에서 A. D.로 넘어간 듯 급변한다. 앙팡루아enfant roi(가족 안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왕 아이’)는 가족의 서열뿐만 아니라 인테리어의 서열까지 뒤흔든다. 어느 집이든 대리석 바닥은 뽀로로 매트가, 스칸디나비안 스타일 가구는 모서리 보호대가 점령한다. 그런데 이 집엔 그 흔한 매트 한 장 없다. 두 아이 방은 계단을 한참 올라야 나오는 꼭대기 층 다락이다(계단 입구에 꼭 필요한 안전 울타리를 설치했다). 아이 손이 닿는 위치에 이배, 권오봉, 남춘모 같은 유명 작가의 작품이 여러 점 걸려 있다.

“누굴 위해서 뭘 더하거나 덜하는 대신, 가족 모두의 경험에 맞춰 조금씩 변화하는 집이길 바랐죠. 그 중심에는 우리 부부의 취향과 경험이 있고요. 아이는 매 순간 자란다, 안전을 이유로 너무 보호하려고만 들면 오히려 아이는 작은 것에도 금세 놀라고 약해진다, 아이는 안전하게 사는 법을 스스로 깨우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에게 계속 보여주면 디자인과 예술을 존중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부부가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라야 아이도 행복하다…. 이런 확신이 있었어요.”

아이가 무조건적 보살핌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지 않고, 온 가족이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는 프랑스식 사고를 공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프랑스’라는 틀에 가두는 건 편협하다. 알다시피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게 아니다. 엄마는 음식을 해줄 뿐 아이 스스로 먹고 자란다. 스스로 해내는 것을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같이 기뻐하는 것이 부모 역할이다. 놓아두면 아이도 엄마도 절로 큰다.



남다른 컬러 감각은 주얼리 디자이너 전선혜 대표의 것.
집 짓기라는 셰이프 게임
팬데믹을 겪으며 우린 세상이 변화한다면 무엇이 달라지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알아야 할지, 각자 형편대로 생존을 위한 설계도를 그렸다. 에라스뮈스가 <라틴어 격언집>에 “고통을 겪으면 바보도 현명해진다”고 적은 것처럼 우린 제법 현명해졌다. 이 부부는 팬데믹 도중에 지은 이 집에 경사진 커튼월과 테라스를 들였다. 창문도 활짝 못 여는 레지던스(집 짓는 1년 동안 머문 임시 거처)에서 온 식구가 3주간의 격리 기간을 보낸 끝에 더한 이들만의 ‘생존 설계’였다.

“또 다른 종류의 팬데믹이 오더라도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 크다면 우린 집 안의 일상을 즐기게 될 테니까요. 테라스 마니아인 아내를 위해 테라스 두 개를 만들었는데요, 빔프로젝터로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는 로맨틱한 테라스가 옥상에 숨어 있고요. 다이닝룸 옆 샛문을 열면 테라스가 또 하나 나와요. 테라스는 원래 다이닝룸 바닥 레벨에 맞췄는데, 시행착오 끝에 한단을 올렸죠. 고소공포증이 있어 저는 자주 못 나가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주말 아침도 거기서 먹고,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도 해요. 바깥 풍경을 한껏 끌어들이는 커튼월도 큰 몫을 하고요.”(서민범)

“밤에 아이들 재워놓고 이 커튼월 앞에 자주 앉아 있어요. 저는 아주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디자이너로서, 여자로서 늘 꿈을 꾸거든요. 그 꿈이 아이들 꿈에 묻히고 싶지 않고요. 이곳에 앉아 마냥 밖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걸 생각하는 시간이 참 많아요.”(전선혜)

사뭇 동화 같지만 어른이 되어 읽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글이 떠올랐다. “그녀가 장롱 서랍을 열 때마다 원피스, 브로치, 마젠타 색종이로 싸여진 천들, 작은 상자…. 그리고 그 상자를 열면 그녀의 꿈, 심장의 조각 같은 것들이 빛나고 있었다.” 훗날 전선혜 대표가 이 집을 떠올릴 때마다 이 창문 앞에서 꾸던 꿈, 심장의 조각 같은 것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테라코타빛 벽돌집에 대한 로망이 있는 아내, 뉴질랜드나 멕시코처럼 따듯한 나라에 대한 로망이 있는 남편. 두 사람의 꿈이 서울 한복판에서 실험 중이다.
“이 집은 우리에게 일종의 학교였어요. 저의 개념과 취향, 아내의 개념과 취향을 발견하고, 그걸 모아 하나의 철학-집으로 만들어가면서 숱하게 부딪쳤죠. 그 과정 끝에 큰 그림은 제가, 집의 주조색이나 테라코타 벽돌과 가구 같은 디테일한 그림은 아내가 도맡아 현명하게 해결해갔고요. 집 짓기가 그렇듯 싸우고 웃고 울고 하다가 하나의 삶이 완성된다는 걸 깨달았죠.”

셰이프 게임shape game이란 게 있다. 종이 위에 도형 하나를 그리면 다음 사람이 이어가며 그림을 완성하는 놀이다. 무의미와 미완에 불과하던 도형이 상대의 상상력에 힘입어 완성체로 거듭나는 마법이다. 그것이 고양이 몸통이 될지, 해바라기 잎사귀가 될지는 오직 두 사람에게 달렸다. 이 부부에겐 집을 짓는 일이 바로 셰이프 게임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꼭 그래야 하는 삶은 없다. 꼭 그렇게 지어야 하는 집도 없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란 질문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을까’로 치환한 부부. 이들 앞에서 맥이 풀린 건 단지 늦겨울 햇살에 스며든 봄기운 탓일까. 이들이 들려준 파리나 멕시코 어디쯤의 집 이야기가 떠올라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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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