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준 패션 디자이너와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이웅기 대표·전수경 음악감독 가족이 각자의 집에서 포즈를 취했다. 구조가 같은 주방인데 블랙 마룻바닥과 화이트 벽, 그리고 화이트 타일 바닥과 블랙 아일랜드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그 밖의 공간에서도 시크한 파리 감성과 유쾌한 이탈리아 감성의 차이가 선명한 두 집. 먼저 정욱준 디자이너의 집부터 안내한다.
마치 파리의 어느 카페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라운지 공간. 직접 제작한 테이블에 구멍을 내어 화분을 심었다. 직선을 선호하는 정욱준 디자이너의 집에서 브라운 에그 체어는 유일한 곡선이자 유색 오브제다.
집 안 곳곳에 걸어놓은 흑백사진 작품은 모두 준지 광고 비주얼. 주방의 아일랜드 위에는 파리에 갈 때마다 사 오는 그릇, 촛대, 조명 등을 펼쳐놓았다.
파리지앵의 모던 하우스
지난달 파리 패션 위크에서 준지Juun.J의 2020 S/S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선보이며 호평을 받은 세계적 디자이너 정욱준. 블랙 헤어가 윤기 나는 페키니즈종 반려견 ‘쭈니’를 품에 안은 채 취재팀을 맞는 그는 올 블랙 의상 차림이다. 지난 5월 오픈한 도산공원 준지 부티크 역시 외관과 내부 모두 블랙을 입히고, 매 컬렉션에서도 매우 절제한 컬러 팔레트를 선보이는 블랙&화이트 마니아답다. 그런 그이기에 집 역시 모노톤일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견한 일. “색감이 강한 옷을 입으면 불편하고 힘들 정도예요. 언젠가 레드 맨투맨 티를 입었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대신 나에게 가장 화려한 색상은 화이트예요.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늘 화이트 셔츠를 입죠.”
2007년부터 지금까지 스물다섯 번째 파리 패션 위크 무대에 오르고, 한국인 최초로 파리 의상 조합의 정식 멤버 로 선정되는 등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파리지앵의 DNA를 키워온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 화려한 장식은 덜어내 무엇 하나 튀는 것 없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한 멋스러움을 자아내는 집은 그의 미학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그가 발표하는 작품과 일상이 일치하는, 신념에 충실한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라 느껴졌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조명, 향 그리고 음악을 꼽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라운지’라고 이름 붙인 다이닝룸. “원래 이 공간은 거실이었어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와 TV가 보이니 항상 늘어져 있곤 했는데, 여기에 카페처럼 큰 테이블을 놓았더니 삶의 질이 바뀌었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음악을 틀고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 마시고 생각하는 시간이 참 좋아요. 저녁엔 와인 마시고 책을 읽게되니 정서적으로 왠지 향상된 기분이 들고요.”
이 집을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 인테리어를 맡은 이웅기 대표는 기능성을 추구한 파격적 평면 구조를 꼽는다. “안방과 작은 방의 벽을 없애자는 건 형님 아이디어였어요. 소파와 침대를 오픈 공간에 두니 마치 호텔 스위트룸에 온 느낌이 나지요.” 침실에서 드레스룸과 욕실, 소파가 있는 방을 지나 한 바퀴 돌면 다시 침실로 돌아오는 개방형 공간인데, 환기가 잘 되고 집도 훨씬 넓어 보인다. 정원도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정취를 지녔다. 원래는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전형적 한국식 마당이었는데, 지금은 숲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유럽식 야생 정원에 가깝다. 잔디를 깔지 않고 흙길을 남겨둔 채 남천나무·백당수국 등 좋아하는 나무를 골라 심고, 잡초는 뽑되 강아지풀은 살려두며, 장미와 백접초를 자유분방하게 심으니 작은 숲이 조성됐다. 정중앙에는 백일홍이 자리하는데, 분홍 꽃이 만개하는 7월 말은 집이 가장 화려해지는 순간이라고. 1년에 두 번씩 컬렉션을 발표하며 숨 가쁜 생활을 하는 정욱준 디자이너에게 집은 휴식처 이상의 영감의 원천이다. “밖에서 일할 때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치이는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오롯이 나와 보내는 시간을 갖게 되지요. 사유의 시간이 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내 안에 쌓여 있던 영감의 재료를 꺼낼 수 있어요.” 그가 파리 컬렉션이라는 창작의 꽃을 피우기 위해 싹을 틔우는 디자이너 정욱준의 대지, 서울 속 작은 파리, 바로 그의 집이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조명을 꼽고, 언젠가 조명을 디자인할 거라는 정욱준 디자이너는 구석구석 조명 설치에 공을 들였다. 파리 마레지구에서 구입한 수공예 디자인 조명등을 톰 딕슨 조명등 사이에 배치한 감각이 돋보인다.
호텔 같은 욕실. 목재 바닥의 건식 화장실이야말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럽식이다.
기존 안방에 소파를 놓아 거실처럼 꾸몄다. 공간에 들인 식물도 인상적인데, 셀렘이라는 왼쪽의 화분은 나무의 뿌리가 흙 밖으로 뻗어 있는 모습이 마치 건축물 같은 느낌에 반해서 구입했다.
초록을 메인 컨셉트로 하여 톤과 질감의 믹스매치로 연출한 이웅기 인테리어 디자이너·전수경 음악감독 부부의 침실. 벽의 몰딩과 과감한 벨벳 마감, 그리고 황주리 작가의 작품으로 위트 있는 공간을 완성했다.
멤피스 디자인적 요소를 적용한 아들 방. 벽면부터 침대, 옷장에 각기 다른 색채를 입혀 재미를 더했다. 의자의 다리마저 색상 차이를 둔 섬세함이 돋보인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아트 컬렉션. 강익중 작가의 작품부터 프러포즈할 때, 아들이 태어났을 때 구입한 컬러풀한 브리토 작품이 유쾌한 첫인상을 부여한다.
밀라노 감성의 컬러풀 하우스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비타민디자인 대표인 이웅기와 음악감독이자 키이츠서울 부사장인 전수경 부부. 열 살 아들 다니엘과 함께 세 식구가 사는 집은 밀라노에서 오래 수학한 이웅기 대표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감성이 충만하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다양성을 지닌 이탈리아처럼 집 안곳곳에는 수십 개국에서 구입한 예술 작품과 오브제가 조화롭게 섞여 있는 것. 다채로운 컬러의 대비, 시대와 국경을 넘나드는 아트 컬렉션, 여행할 때마다 수집한 소품 등은 디자인과 음악 창작을 업으로 삼는 크리에이터 부부의 생기 가득한 열정과 낭만주의를 증명해준다.
이웅기 대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은 바로 아이 방이다. “어릴 때 컬러를 많이 보고 자라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아들 방에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멤피스 디자인 사조를 적용했어요.” 벽면을 분할해 페인트칠을 하고, 제작한 가구에도 각기 다른 색상을 입혔다. 한편 침실의 주요 컬러를 선택한 건 전수경 감독이다. “초록에도 이탈리아다운 감성을 불어넣기 위해 컬러 톤을 결정하는 데 고심했지요.” 이 집을 완성하기까지 가장 까다로운 고객은 바로 아내였다며 이웅기 대표가 웃는다.
가장 큰 숙제는 요리가 취미인 전수경 감독의 바람인 ‘효율적 주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8인용 테이블을 놓을 공간이 도무지 없는 난관을 파격적 구조 변경을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벽면 일체형 부엌을 과감하게 없애고, 가운데 아일랜드 주방을 만든 후 거실을 다이닝룸으로 바꾸었다. 언제든지 손님을 초대해 정성스레 준비한 요리를 나누고 즐기는 삶이 가능한 공간! 이를 위해 배관 시설을 이동하고 천장 공사를 다시 하는 등 시공이 번거로웠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가 40년 정도인데, 여전히 평면도는 획일적이지요. 시대에 따라 삶의 방식이 바뀐 만큼 구조를 변경하는 건 당연해요.” 이웅기 대표의 생각. 또 ‘데드 스페이스’를 찾아내는 건 그의 전매특허다. “중세 건물에서 생활하는 이탈리아는 일본만큼이나 공간 효율성을 디자인의 우선순위로 두지요. 쟁반 하나를 만들더라도 쌓거나 접는 등 수납 아이디어를 가미하는 게 습관이에요.” 그 덕에 공간 구석구석 기능성과 효율성이 돋보인다. 침실 창 쪽에 미니 베란다를 마련하거나, 부엌 한편에 가스레인지용 간이 주방을 만드는 식.
SNS에 집 모습을 종종 공개하는 전수경 감독이 특별한 일화를 소개했다. 누군가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는데, 집주소를 말하며 “혹시 그 집이 맞냐? 원래 이 집을 보러 왔다가 너무 낡아서 아파트로 갔는데 이렇게 멋지게 재탄생 할 수 있었다니 후회된다”는 내용이었단다. “새 아파트도 좋지만 낡은 집을 취향에 맞게 고쳐 사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라며 자신 있게 미소 짓는 전수경 감독. 남편이 큰 틀을 짜고, 구석구석 취향을 담아 활기 넘치는 집을 완성하는 이 부부라면 어떠한 집이라도 개성과 멋을 지닌 아름다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지 않을까?
꽃꽂이와 요리가 취미인 전수경 음악감독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는 다이닝룸 전경. 클래식과 컨템퍼러리를 넘나드는 아트 작품과 이웅기 대표가 대학 시절부터 모은 부엉이 오브제 컬렉션이 인상적이다.
정원의 벽을 허물어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이웃사촌. 단체 사진을 찍자는 말에 정욱준 디자이너가 건너왔다. 바쁘게 지내는 삶 속에서 잠시나마 이웃과 어울리는 시간은 단비처럼 달콤하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이
어쩌면 가깝고도 조심스러운 사이가 현대의 이웃사촌일진대, 정욱준 패션 디자이너와 이웅기 대표·전수경 감독 가족은 ‘이상적 이웃사촌의 롤모델’로 삼을 만큼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다. “2년 전, 이사 온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약간의 우려도 있었지요. 하지만 막상 지내다보니 이제는 좋은 것 조금 더 챙겨주고 싶은 가족 같아요.” 정욱준 디자이너의 말. 서로의 마당에 물 뿌려주고, 맛있는 것 생기면 나눠주며 정이 오가는 일상이, 바쁘고 치열한 이들의 삶에 온기를 부여한다. 그럼에도 파리와 밀라노,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가족이 잘 지내는 비결은 분명히 있을 터. 무엇보다 창작이라는 큰 바다에 ‘커머셜 아트’라는 한배를 타고 있다는 공통점이 서로를 위로하는 듯했다. 작품을 만들기까지 기본적으로 고객을 파악하고 니즈를 맞추는 센스가 발달한 사람들, 다시 말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배려라는 덕목과 같은 의미이니까. 서울 하늘 아래 문화적 영감 가득한 파리와 밀라노 여행을 마칠 무렵, 각각의 분야에서 각자의 색깔을 발현하고 또 조화로움을 이뤄나가는 이 이웃사촌의 정원이 유달리 따스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