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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고희숙·이정석 도자 앞의 생生
오랜 시간 한길을 가는 묵묵한 도예가와 수시로 길을 바꾸는 담대한 도예가가 함께 산다. 흙을 대하는 방식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부부 도예가가 아니라 각각 도예가인 고희숙과 이정석. 그들이 함께, 또 따로 빚은 도자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낮고 긴 직사각 건물 두 동이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자리한다. 왼쪽이 작업실이고 오른쪽이 가마실이다. 도예가 고희숙과 이정석 부부의 도예 공방, 장심이고長心李高.
도예가 고희숙의 작업은 명료하다. 슬립 캐스팅Slip casting한 깔끔한 형태에 물레 작업으로 손맛을 더한 백자 그릇은 그만의 고유한 ‘한길’이다. 기물 안쪽에만 푸른 유약을 바르고 바깥쪽은 사각거리는 질감을 그대로 살린 그릇은 첫눈처럼 청백하다. “캐스팅 작업만으로 나올 수 있는 형태가 있어요. 물레를 돌리거나 손으로 성형해서는 얻을 수 없는 선이 있죠. 캐스팅하고 틀에서 빼낸 기물의 촉감은 또 얼마나 예쁜데요. 거기에 물레를 돌려 저마다 다른 손맛을 더하는 이 작업이 나에게는 잘 맞아요.” 그는 이 ‘한길’을 20년째 걷고 있다.

도예가 이정석의 작업은 변화무쌍하다. 초기작인 동물 오브제에서 근작인 ‘탐석探石’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어보인다. 그 사이사이에 선보인 작업들도 다채롭다. “고희숙 작가는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오차를 줄여나가는 작업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다 다르게 만들까 고민하는 쪽입니다.” “이 작업을 쭉 하면 좋겠는데 갑자기 다른 작업을 한다고 확 바꿔요.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다가도 용기 있게 다른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나도 까만 흙을 써보고 싶어서 몇 번 해보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결국에는 가장 나다운 백자로 되돌아오거든요.”(고희숙) “나 같은 경우에는 어떤 길을 갈까 고민하기 보다는 우선 가보고 유턴하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해요. 책도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걸 더 좋아하고요.”(이정석)

작업실 한쪽에 쌓여 있는 석고 틀이 조형 작품처럼 보인다.

나무 수납장 앞뒤로 진열한 고희숙 작가의 백자 그릇. 선과 선의 중첩이 아름답다. 수납장은 최경덕 건축가가 만들었다.

수풀을 마주하며 길게 이어지는 콘크리트 건물은 장윤규 건축가가 디자인했다.
긴 호흡으로 마음을 다해 작업하자는 한마음
성격도 작업 스타일도 정반대인데 12년 전, 작업실을 새로 짓는 일에는 생각이 하나로 모였다. 야트막한 산 아래에 지은 길고 낮은 직사각 형태의 건물 두 동. 설계는 건축가 그룹 운생동의 장윤규 건축가가 맡았다. 외관은 지형에 맞게, 전면의 통창은 자연을 담는 액자 구조 콘셉트로 건축가가 풀어냈고, 내부는 부부가 한마음으로 요청한 대로 각자의 작업 공간을 분리한 구조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각 공간을 나누는 큰 미닫이문(혹은 벽)을 열면 모든 공간이 통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가마에 불을 때면 유독가스가 나오기도 하고 덥기도 하는 문제를 감안해 가마실은 작업동 옆에 따로 지었다. “도자기는 쌓기보다 펼쳐야 하는 작업이라 공간을 넓게 잡았어요. 지대가 약간 높고 앞이 훤히 트여 있어서 아랫마을까지 잘 내려다보입니다. 작업실 이름은 오랜 시간 긴 호흡으로 작업하자는 뜻에 각자의 성을 더해 ‘장심이고長心李高’라고 붙였어요.” 부부 공동의 도예 공방이라는 애초의 계획과 달리 지금은 ‘고희숙 세라믹 스튜디오’로 사용한다. 작업실을 짓고 나서 얼마 되지않아 이정석 작가가 서울과학기술대 도예과 교수에 임용돼 학교에서 따로 작업하게 된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작업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주말 중 하루 정도 같이 나와 이곳에서 키우는 반려견 짱아 밥 주고 산책시키고, 작업실 앞 풀 베고 정리하는 것이 부부가 작업실에서 거의 유일하게 함께하는 일상이다.

작업실에서 차 마시며 쉬는 공간을 바라본 모습. 시멘트 벽에 삽입한 철제 선반에 그간 간직한 스승의 그릇을 꺼내 올렸다. 맨 아래에 있는 그릇은 고희숙 작가의 백자 볼에 이정석 작가의 '날개'가 붙어 탄생한 부부의 유일무이한 합작품.

심플하고 기능적인 백자 간장병과 흙의 거친 질감과 투박한 형태가 도드라진 굽접시. 각각 고희숙 작가의 스승인 모리 마사히로와 이정석 작가의 스승인 고이에 료지의 작품.
‘비로소’ 떨어진 부부
결혼한 지 24년, 처음 만난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계산하면 근 30년을 함께했다. 고희숙 작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정석 작가와 ‘비로소’ 떨어졌다고 말하는데, 둘 다 이런 가뿐한 기분이 서운하지 않은 건 일본에서 유학하던 7년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지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나고야 아이치현립 예술대학 대학원에서 고희숙 작가는 일본의 생활 도자 디자인의 대가인 모리 마사히로를, 이정석 작가는 자유분방한 전방위 도자를 선보인 또 다른 대가 고이에 료지를 사사했고, 졸업한 뒤에는 작가로 활동했다. 그때의 공부와 다양한 경험은 두 젊은 도예가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1990년대 말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도자기를 워낙 좋아해서 실생활에서 작가 그릇을 쓰는 문화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어요. 요리 연구가와 도예가의 협업 전시도 종종 열렸는데, 오브제 같은 그릇에도 음식을 올려 내고 깨진 그릇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신선했어요. 구멍 난 그릇도 조형성이 마음에 들면 ‘튀김을 올리면 되겠네’ 하면서 사 가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고희숙 작가의 ‘아이덴티티’인 캐스팅과 물레를 연결한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이 작업으로 <일본 크라프트> 전에서 외국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 많은 전시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첫아이를 가졌어요. 똑같이 도예를 전공하고도 결혼과 출산 뒤에 남편 작업을 돕는 역할만 하거나, 아예 작업을 그만두는 선배와 동기들을 종종 봐서 그런지 나도 작업을 못 하게 될까 봐 정말 불안했어요. 이를 악물고 작업했죠.” 지금은 그렇게까지 안 했어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일부러 개인전을 개최하며 비상한 애를 쓴 과거의 자신을 그는 칭찬해주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도쿄 롯폰기힐스에 있는 인테리어 편집매장 ‘발스 도쿄Bals Tokyo’에서 엄청난 양을 주문했어요. 공장에서 생산해야할 양이었는데 멋모르고 주문을 받았지요. 일일이 물레로 손맛을 더해야 하는 작업이라 공장에 맡기지도 못했는데, 정말 둘이 울면서 다 만들었어요. 그걸 기반으로 이 작업실을 지을 수 있었고요.”

차 마시며 쉬는 공간의 가로로 긴 직사각 창을 통해 작업실이 보인다.

바닥의 에폭시 마감과 벽 미장은 이정석 작가가 손수 마무리했다.

도자기를 굽기 전 마른 상태에서 물에 담가 ‘유물’ 같은 질감을 만들어낸 이정석 작가의 청화백자 시리즈.

작업실에서 부부가 일상을 보내는 시간. 앞에 보이는 큰 바위는 이정석 작가의 최근작 ‘탐석’.
도자기를 만드는 건 결국, 생명을 내주는 일
작년에 작업실 건물 제일 안쪽에 있는 공간을 손보았다. 원래 신발 벗고 들어가서 자거나 쉬는 방이었는데,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 차 마시는 공간 겸 휴식 공간으로 새로 꾸몄다. 선반도 달고 그간 보관해놓은 스승과 동료·후배 작가들의 작품을 꺼내 진열해놓았다. 고희숙 작가가 그 중 하나를 보여주었다. 매끈한 백자 볼에 길쭉하고 얇은 ‘손잡이’가 달린 작품. “이건 손잡이가 아니라 이정석 작가가 예전에 청화백자 인형 작업을 할 때 만든 날개예요. 가마 안에서 어찌 된 일인지 내 그릇에 붙어 나왔는데, 그때는 이 일로 엄청 싸웠죠.” 일부러 이렇게 붙이려 해도 붙이기 힘든, 우연이 만들어낸 부부의 유일무이한 합작품이다. “이정석 작가는 여전히 이쪽저쪽 길을 과감하게 다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달라진 것 같아요. 좀 차분해졌다고 해야 할까.” “전에는 주로 직관적으로 작업했다면, 요즘에는 많이 정리하고 자제하는 편이에요. 흙이라는 재료로 왜 이런 형태를 만드는지에 관한 당위성을 많이 생각하다가 최근에 돌에서 나온 흙을 다시 돌로 되돌리는 ‘탐석’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신진 작가였을 때 우리 둘 다 선망하던 도자 공모전이 있었어요. 각자 몇 번 입상하기도 했는데, 바로 일본의 ‘미노 국제 도자 공모전’이에요. 이번에 이정석 작가가 심사위원이 되었어요. 기분이 참 남다르더라고요.” 이제는 중견 도예가로 작품과 상품을 균형감있게 오가며 작업하지만, 도예는 여전히 마음 졸이고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며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책 서문에서 글 쓰는 일이 시간을 내주는 일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일생’이라는 시간이 모여 생명을 이루므로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내주는 것이라 했다. 도자기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각각 도예가인 고희숙과 이정석이 따로 또 함께 빚은 20여 년, 도자의 시간은 곧 그들의 삶, 숨, 힘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픈 스튜디오
고희숙 작가의 작업실로 독자를 초대합니다. 작가와 차 한잔 하며 첫눈처럼 청백한 백자를 만나보세요.

일시 11월 20일(수) 오후 2시
장소 경기도 여주 고희숙 세라믹 스튜디오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원)
인원 8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 이유를 적어 신청하세요.

글 박진영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