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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찬 조경가 식물에 대해 겸손해야 합니다
제주 여미지식물원 습지원과 포천 평강식물원, 곤지암 화담숲 암석원 등 한국에 생태주의 정원을 도입한 김봉찬 대표는 국내 생태 정원의 선구자라 불린다. 그런 그가 삶의 뿌리이자 식물 자원의 보고인 제주에 꿈에 그리던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었다.

김봉찬 대표는 수십 년 전부터 쌓여 있던 돌무더기인 베케와 돌 틈에서 자생한 이끼를 확장해 제주만의 독특한 생태를 드러내는 이끼정원을 조성했다.

아버지가 귤 창고로 사용하던 건물의 기초만 남긴 터에 억새와 수크령을 심어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한 폐허정원.
제주 사람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다
언뜻 외국어처럼 들리는 ‘베케’는 밭의 경계에 아무렇게나 두껍게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순 제주 말이다. 이 베케를 원형으로 삼은 카페 ‘제주 베케’는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김봉찬 대표의 작품이다. “제주 땅은 화산석이 많아 쟁기에 걸리는 돌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어요. 밭을 일구며 나온 돌을 밭 경계에 쌓기 시작하면서 두꺼운 돌담인 베케가 형성된 거죠.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일을 하시다가 베케 돌담에서 새참을 드신 기억이 나요.” 제주만의 독특한 지형적 특성에서 생겨난 이 돌무더기 틈 속에서 참나물, 얼음나물 같은 나물과 이끼가 자생했다. “언젠가 베케를 주제로 정원을 조성한다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일군 것이니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막상 베케를 중심으로 이끼정원을 만들려고 보니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어딘가 모르게 미니어처 같거나 다듬을수록 일본 정원 분위기가 났기 때문. 오랜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설치 미술가 최정화 작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국의 아름다움이 뭘까요?” 최 작가의 답은 자못 명쾌했다. “치밀하게 엉성한 것 아닐까요?” 손으로 툭툭 쌓아 올린 견고하면서 성근 돌무더기 베케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하면 베케를 정원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 끝에 자연에 겸손해지게 만드는 정원, 즉 엎드려서 바라보게 만드는 정원을 구상했다. 개미 박사 최재천 교수가 “배를 땅에 깔고 보지 않으면 개미를 잘 알 수 없고, 그렇게 관찰해야만 개미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정원에 오는 사람마다 엎드리게 할 수 없으니, 보는 눈높이를 낮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원을 굽어 내려보는 것이 아닌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절로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이로써 이끼정원을 올려다볼 수 있는 카페 전면부 공간의 바닥을 아래로 깊게 파놓았다. 의자에 앉으면 하찮게 여겼을지도 모를 돌에 붙어 사는 이끼가 빚어낸 웅장함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제주 화산석과 검은 콘크리트를 사용해 어둡고 거친 동굴 느낌을 연출한 카페 베케의 외관

좁고 길게 형성된 이끼정원의 식생을 해결하기 위해 그 옆으로 자연스럽게 물이 모이는 빗물정원을 조성했다.

이끼 정원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바닥을 낮춘 카페 내부.
“지금 모든 정원사의 관심사가 바로 생태주의 정원이에요. 본래 생태계에 살던 생명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생태주의 정원의 역할이죠. 기능이 목적이 되는 순간 생명은 다시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_김봉찬

생태 정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제주대학교에서 식물생태학을 전공한 김 대표는 방황하던 고등학생 시절, 절에 들어가 산 적이 있다. 당시 절 주변 초원에는 야생화 1백여 종이 자랐다. 하루 종일 산과 계곡을 누비며 이름 모를 식물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의 탐구심을 바탕으로 생물학과에 진학한 대학에서는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 고산지대의 토양과 기후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특히 제주 여미지식물원에서 근무하던 40대 초반, 지역 신문사와 함께 곶자왈 탐사대를 조직해 식물 코너를 연재했는데,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용암지대에 분포하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숲인 곶자왈의 식생은 우주처럼 신비로웠다. 생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지금 모든 정원사의 관심사가 바로 자연주의 혹은 생태주의 정원이에요. 본래 생태계에 살던 생명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 역할이죠.” 그러나 진정한 생태 정원은 한 장의 도면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원은 기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첫째가 생명이고, 온실가스 감축이나 미세먼지 정화 같은 기능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기능이 목적이 되는 순간 생명은 또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제주도에서는 초원이 바로 생태 정원의 어머니 같은 존재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곳에서 스스로 초지 식물, 그라스, 야생화가 자라난다. 각각의 식물마다 자기 역할과 자기 의지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가 꿈꾸는 정원이다. 정원이란 누구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정원사에게 물었습니다
제주도에서 꼭 가봐야 하는 정원은 어디인가요?
제가 10년간 근무한 서귀포시에 있는 여미지식물원을 추천합니다. 3만 4천여 평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에 2천여 종의 희귀 식물과 1천7백여 종의 화초류와 나무가 서식하는 동양 최대의 온실 식물원이죠. 그중 제가 조성한 연못정원은 습지와 다양한 수생식물이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문 가드너가 되고 싶은 후배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정원 터에 최소한 1백 번은 가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해요. 시간에 따라 빛과 그늘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봐야죠. 맑은 날, 흐린 날, 비나 눈 오는 날 등 날씨에 관계없이 정원을 아무 때나 보고 싶어야 합니다. 오래 지켜보다 보면 사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정원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정원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추천할 국내 도서는?
국내에 정원 관련 서적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누구나 통감할 거예요. 저는 오경아 선생의 책들과 김장훈 정원사의 <겨울 정원>을 추천해요. 정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감상에 도움을 받을 수 있거든요. 부끄럽지만 제가 집필한 <자연에서 배우는 정원>도 소개합니다. 돌과 물, 그늘을 활용해 정원을 조성하는 기법을 알려주는 기술적인 실용서입니다.

최근에 큰 영감을 받은 정원은?
베케의 모티프가 된 뉴욕 하이라인파크를 소개하고 싶군요. 폭이 좁은 고가 위에 원시 숲속 식물이 자라고 있죠. 거대한 고층 빌딩과 어울리는 식물은 크고 굵은 나무보다 풀 한 포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요소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들면 결국 전체적으로 공간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어요. 식물의 크기, 굵기, 형태 등 리듬감을 고려한 공간 디자인에 대해 영감을 주는 곳입니다.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