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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열 요리 연구가 야마구치 레이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땅에서 증기가 올라오는 신비로운 마을에서 만났기 때문일까? 야마구치 레이코 씨는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흔 살이 넘었지만 40~50대처럼 젊어 보이는 외모와 30대 못지않은 삶의 열정을 지닌 것. 실제로 패치워크 퀼트 작가, 양조장 주인, 지열 요리 연구가, 마을 재생 프로듀서 등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아온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농도 짙은 증기가 걷히자 지열 요리 중인 야마구치 레이코 씨의 모습이 드러났다.

야마구치 레이코 씨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지조바루 빌리지. 땅 주인의 부탁으로 야마구치 씨가 기획하고 마을 사람들의 재능 기부와 자원봉사로 완성한 체험형 숙소다.
일본 규슈 지방의 구마모토와 오이타현 경계에 있는 다케노유 온천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곳곳에서 하얀 증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는 휴화산 지역으로, 보통 일본에서 증기가 뿜어 나오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곳은 안전한 지열 존으로 판정받은 귀한 땅. 야마구치 레이코 씨는 이곳에 ‘지열 요리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름 그대로 땅의 열을 이용한 음식을 연구ㆍ개발하는 곳으로, 야마구치 레이코 씨는 ‘지열 요리’의 창시자인 셈이다. “어머니도 그렇고, 주민들도 달걀이나 시금치ㆍ무 같은 채소를 증기로 익혀 가쓰오부시를 뿌려 먹는 것을 좋아해요. 하지만 저는 지열을 활용한 요리법을 개발하고, 실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응용법은 무엇인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지난 32년 동안 지열 요리를 연구해온 그가 정의하는 지열 요리란 대지의 에너지를 이용한 궁극의 에코 쿠킹이다. 지열을 이용한 조리법은 다양하다. 증기의 강도를 밸브로 조절할 수 있는데, 은근한 증기로 하룻밤 푹 끓인다든지 강한 증기로 한 번에 찌거나 천천히 건조하는 방법 등 여 러 가지다. 특히 야마구치 씨는 지열 요리에서 식재료 본연의 단맛을 살리는 조리법을 개발해왔다.

우연히 양파를 찔 때 온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된 것. 몇 도로 찌면 어느 정도의 단맛이 나는지 당도계로 재보니 전부 달랐단다. 채소에 따라서 효소가 움직이는 온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재료마다 최고의 단맛을 내는 온도가 있다는 가설 아래, 재료의 온도와 당도의 관계를 수치화했다. 몇 년에 걸친 실험 결과를 정리한 끝에 각각의 재료가 가장 맛있는 단맛을 내는 적정 온도를 파악했고, 그 온도를 지키니 본연의 단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설탕 없이도 건강한 단맛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야마구치 씨는 지열로 완성한 요리를 몇 가지 내왔다. 셀러리잎을 곁들인 닭찜과 각종 채소찜이었는데, 닭고기는 입에서 스르르 녹을 정도로 육질이 부드럽고, 채소는 당근찜을 먹어보니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싫어해서 잘 먹지 않는 당근을 한 접시나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원래 지열 요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할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패치워크 박물관을 짓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점점 지열 요리에 빠져들고 말았답니다.” 야마구치 씨의 이야기. 그는 에도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술도가의 10대 여주인장답게 사업 수완을 발휘해 지열 요리 가공식품도 선보이고 있다. 밤ㆍ호박ㆍ우엉ㆍ당근 등 재료의 당도가 높을 때 건조해 가루를 내고 무알루미늄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만든 케이크 믹스, 절임류, 효소 캔디 등 종류도 다양하다. 최근 몇 년 사이 벳푸 지역에서 지열 요리는 대유행 중이다. 벳푸 지역 온천의 안주인들이 야마구치 씨에게 조리법을 배워가기도 하고, 우리가 취재를 위해 찾아갔듯이 세계 곳곳에서, 멀리는 남아프리카에서도 관심을 갖고 이곳을 찾아온단다.


한국 취재팀이 머문 지조바루 빌리지의 일본 전통 응접실과 다다미방 전경.

지조바루 빌리지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다케노유 온천 마을에 위치한 지열 요리 연구소.

지열로 갓 지은 쌀밥! 구수한 냄새는 식욕을 돋우었다.

야마구치 양조장에서 출시한 제품 중 대표 라인인 니와노 우구이수 컬렉션. 2007년 뉴욕 국제 주류 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고,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 로버트 드니로도 고객이란다.
마을마다 특산물이 있듯 나만의 특별함을 찾아라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야마구치 씨가 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한 게 느껴졌다.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궁금해하고, 한국 잡지에서 일본인 인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에 대해 독자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겠냐는 우려도 표했다. 남다른 교양과 마음의 깊이가 느껴지는 대화였다. 야마구치 씨에게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야마구치 씨는 일촌일품一村一品 운동의 발상지인 오야마에서 태어났다. 각 마을마다 특산품 한 가지를 키워 가치를 향상시키자는 지역 활성화 운동으로, 오랫동안 오야마의 농협 조합장을 지낸 그의 아버지가 이 운동의 창시자란다. 그가 자란 마을에서는 ‘매실, 밤을 심어서 하와이에 가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주민들이 산에 매실나무를 심었단다. 이렇듯 매실나무는 야마구치 씨에게 특별한 나무여서 1964년, 10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후쿠오카 구루메의 술도가로 시집올 때 매실나무를 가지고 왔다.

야마구치 씨가 야마구치 양조장의 10대 여주인으로서 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무농약 술쌀(술 만드는 쌀)을 만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당시에는 술도가에서 술 만드는 쌀을 직접 농사짓는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술쌀을 무농약으로 재배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던 시대. 그렇기에 큰 모험이었다. 그래도 ‘잘못되면 야마구치 양조장을 나간다’는 각오로 임했다고 한다. 눈앞의 논에서 술쌀을 만들기 때문에 대량생산은 할 수 없지만, 소량으로 양질의 술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라벨에는 ‘무농약’이라고 쓰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셔본 사람이 평가하길 바란 것. 많은 사람에게 맛보이기 위해 1986년부터 양조장에서 마쓰리(축제)를 열고, 패치워크 퀼트 작품 전시로 사람을 불러 모은 뒤 ‘니와노 우구이수’라는 이름의 무농약 쌀로 만든 술을 시음해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맛있다고 평판을 얻었고, 점점 고객이 늘었으며, 2007년 뉴욕 국제 주류 대회에서 대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푸른 하늘의 구름과 땅에서 솟아나는 하얀 증기가 장관을 이루는 '지열 마을' 다케노유 온천 지역.이 증기 속에는 아미노산을 비롯해 몸에 좋은 성분이 들어 있어 온천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장수 마을이기도 한 이곳의 증기를 이용해 야마구치 씨는 지열 요리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하고 많은 것을 이루어왔음에도 언제나 베풀기를 좋아하는 야마구치 레이코씨의 미소가 참 아름답다.

오래된 옷이나 이불을 자른 천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형태를 완성해가는 야마구치 씨의 패치워크 퀼트 작품에는 수많은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은 천 조각도 의미를 더하면 작품이 된다
야마구치 씨는 세계적 패치워크 퀼트 작가이기도 하다. 패치워크 퀼트란 천과 천을 꿰매어 연결해서 한 장으로 만드는 작업. 야마구치 씨의 퀼트 특징은 추억이 담긴 오래된 천 조각을 사용해 추억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집 안에 있는 오래된 기모노나 이불 등을 누벼서 연결하는 것을 재미있어한 야마구치 씨는 결혼 후 엄격한 시어머니와 관계 맺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시어머니에게 오래된 천을 누비는 법을 가르쳐드렸고, 함께 작업을 해가면서 고부 갈등이 해소되었단다. 이렇게 패치워크 퀼트를 통해 힘든 시절에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마음이 힘든 주부들에게 패치워크 퀼트를 가르치고 공동 작업을 하면서 치유와 화합을 이끌어왔다. 이러한 의미 있는 ‘야마구치식’ 퀼트 작품은 1982년에 아메리카 내셔널 퀼트 연맹에 초대되어 최고상인 블루리본상을 받기도 했다. 또 이를 계기로 세계 각국의 대사로부터 초청을 받고, 도쿄를 비롯해 일본 국내 순회전을 열었으며, 미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는 한 달에 한 번 수천 명의 워크숍 회원 중 열다섯 명씩 추첨해 함께 패치워크 퀼트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배운 일촌일품 정신으로 마을을 부흥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협동조합 카페나 체험형 숙소 ‘지조바루 빌리지’를 짓고, 또 패치워크 워크숍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야마구치 레이코. 참 많은 걸 소유한 인생이지만, “내 몸만 내 것이다”라며 웃는 그의 소박한 미소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어떤 감동적인 영화보다 더….

일본 쓰지 조리사 전문학교에서 유학한 요리 연구가 박현신은 <나는 허브에 탐닉한다> 외 다수의 책을 출판하고 <행복>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요리 칼럼을 써왔습니다.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건축가 남편과 각종 식재료를 기르며 전원생활을 하면서 각국의 전문가를 초청해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행
4월호부터 소개해온 일본 규슈 지역의 라이프스타일 고수 3인을 직접 만나러 가는 여행에 동행하세요. 지난 5월호 규슈 여행 조기 마감으로 아쉬웠던 분들을 위해 한 차례 더 마련한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7월 11일(목)~13일(토) 일정으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51쪽을 참고하세요.

글 박현신 | 정리 강옥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