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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연구가 호소카와 아이 옛 절터 타이쇼지, 문화 발신 기지가 되다
개성 있는 삶의 방식으로 주변 환경을 바꾸어나가는 사람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지요.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를 이달부터 연재합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일본 규슈 지역의 에도시대부터 있던 절터 타이쇼지(泰勝寺)를 개조해 문화 교류지로 탈바꿈시킨 호소카와 아이(細川亞衣)입니다.

그림처럼 정갈하게 가꾼 정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타이쇼지 홀에 서서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반기는 호소카와 아이. 오랜 세월 조금씩 개조하고 구축해온 자신의 세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엿보인다. 요리할 때에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금세 해사한 미소를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참 매력적이다.
한국보다 이르게 찾아온 봄 햇살은 제법 뜨거웠다. 노란 미모사와 하얀 히아신스, 나무의 꽃잎과 가지 사이로 해가 비치며 공원의 정취가 아름답게 빛나던 날, 호소카와 아이를 만나기 위해 일본 규슈 지방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구마모토의 다쓰다야마 자연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안에 집이 있다니!’ 지역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원 안에 사택이 있다는 것부터 흥미로웠다. 큼직한 대문을 지나 길쭉한 연못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니 2층짜리 일본 전통 건축물이 나타났다. 바로 타이쇼지다.

에도시대에 구마모토의 영주이던 호소카와 집안에서 세운 시주 절 타이쇼지 터는 메이지 시대에 기능을 다한 채 비어 있다가, 최근 들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핫 플레이스로 거듭나고 있다. 요리 연구가 호소카와 아이 씨와 도예가 호소카와 모리미쓰 부부가 중심이 되어 쿠킹 클래스, 다도회, 농산물과 공예품ㆍ과자 등의 잡화 마켓, 남편을 포함한 공예 작가들의 전시회 등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펼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다른 지역이나 도쿄는 물론 해외에서도 트렌드 리더들이 찾아오는 것. 일본 언론에서도 이곳을 ‘문화 발신기지’라고 소개하며 주목하는 추세다.

타이쇼지 홀에서 요리 스튜디오를 바라본 모습. 쿠킹 클래스나 각종 워크숍을 개최하는 곳으로, 긴 테이블은 전국에서 방문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타이쇼지의 핵심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집 안 거실 한편에 한국에서 구입한 모시 조각보를 걸어놓았다.

작가와 협업해 프로젝트 상품을 제작하곤 한다. 그중 하나로, 한국의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식기인 발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도자 식기.
공간의 힘을 바꾸는 건 결국 사람이다.
4백여 년간 존재해온 타이쇼지 절터. 하지만 한동안 특별한 용도가 없던 이 공간이 새 생명을 얻은 건 이 가문의 며느리가 된 호소카와 아이의 남다른 감각 덕분이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이곳은 남편의 도예 작업실일 뿐이었다. “호소카와 집안이 대대로 이 넓은 곳을 지켜온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저는 이곳의 미래를 생각했고, 이곳을 잘 알려서 많은 사람이 찾고 사랑받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됐지요.” 호소카와 아이가 이곳에 온 지는 9년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공부한 후 도쿄에서 왕성하게 커리어를 쌓아온 그는 어느 날 전시회차 도쿄에 온 도예가 호소카와 모리미쓰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한 후 도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이곳으로 와서 살았다. “도시 생활에 익숙하던 제게, 남편은 안채의 일부를 살림집으로 마음대로 고쳐보라고 권했죠. 요리 연구가가 아니었다면 건축을 전공하고 싶었을 정도로 인테리어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노베이션 작업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조금씩 생활하기 편리한 방향으로 고쳐나갔지요.” 춥고 휑하던 집의 부엌을 따뜻하고 아늑하게 만들기위해 바닥에 온돌을 깔고 창을 크게 내서 채광을 좋게 하는가 하면, 10여 미터 떨어진 맞은편 건물의 부엌과 마주보는 면에 문을 만들어 쉽게 오가며 작업할 수 있는 요리스튜디오를 완성했다.

공간의 가장 큰 묘미는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조화다. 에도시대, 그러니까 17세기에 지은 전통 가옥을 바탕으로 원래 사용한 건축자재는 살리고, 군데군데 그녀의 현대적ㆍ세계적 감각을 채워 넣었다. 천장재에 가려 있던 대들보는 하얗게 칠해 천장의 악센트로 남겨두고, 다다미 아래에 있던 마루판은 뜯어내 고풍스러운 맛을 지닌 키친 카운터로 이용하는 식. 부엌의 주역이 되는 식탁의 경우, 어른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도록 큰 상판을 찾던 중 목공 작가의 소개로 고재 파는 곳을 알아내 폭이 넓고 긴밤나무를 공수했다. 이렇게 발품을 팔고 여행지에서 사모은 취향 있는 소품을 더해 이 역사 깊은 건물은 현대인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국에서 구입한 소소한 소품을 집 안 곳곳에서 편견 없이 사용하는 모습도 참 인상적이었다. 서울 여행 중에 들른 답십리 골동품 거리에서 구입한 나무 솥뚜껑을 뒤집어서 찻주전자를 놓는 쟁반으로 쓰거나,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도 잘 사용하지 않는 유기 숟가락을 애용하는 것! “숟가락의 옆면이 날렵해 두부나 푸딩 같은 부드러운 음식을 잘라 먹기 편하고, 납작해서 떠 올리기 유용해 서버처럼 사용하기도 해요.” 그 밖에도 부엌에 놓여 있는 소쿠리와 채반, 거실에 구역 구분이나 햇빛 가리개 용도로 자연스럽게 걸어놓은 조각보 등을 통해서도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겨울 요리인 유자 주머니에서 모티프를 얻은 애피타이저. 도예가 남편이 구워낸 검은 볼에 붉은 파프리카 주머니를 담은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마른 산나물 대신 셀러리잎을 말려 넣고 지은 솥밥은 셀러리 특유의 향이 식욕을 돋운다.

청국장에 토마토를 넣어 맛을 순화한 찌개. 순하고 산뜻하면서도 맛이 심심하지 않도록 청양고추를 넣었다.

요리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호소카와 아이. 그는 도쿄에 살던 때와 비교해 자연을 가까이하며 요리에 훨씬 집중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요리도 공간도, 나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그가 만들어준 요리는 놀랍게도 청국장이었다. 익숙한 냄새인데 어딘지 부드럽게 순화된 향이 났다. “멸치 국물에 청국장과 토마토를 넣고 돼지고기와 두부를 더해 끓인 이 찌개는 요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인기 메뉴예요. 색도 예뻐 아홉 살 딸아이도 참 좋아해요. 김치와 솥밥, 청국장이면 밥 한 그릇 뚝딱이에요.” 먹어보니 놀랍게 맛이 좋았다. 토마토 덕분에 청국장 특유의 진하고 텁텁함이 없고 참 산뜻하다. 맛은 순해지고 영양은 더 풍부해진 것. “좋은 요리, 제가 추구하는 요리는 만든 사람의 이야기가 스며든 것이에요. 뭔가 의미나 경험, 스토리가 담겨 있는 요리랄까요? 제가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만들지 못했을 이 요리처럼요.” 그 밖에 그가 만든 셀러리 솥밥, 파프리카 주머니 요리도 한 국 요리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그동안 일곱 차례 정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서울, 대전, 부산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맛집 순회를 했단다. “지난 2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월 대보름이었어요. 마른 산나물을 넣어 지은 솥밥을 먹고 매료되어 채반에 채소를 말리는 일에 재미를 붙였지요. 일본에서는 무청이나 시래기 등을 대부분 버리는데, 찌개에 들어가니 참 맛있더라고요.” 일본에서 구할 수 없는 마른 산나물 대신 셀러리잎을 하루 정도 말려 솥밥을 지었는데, 취나물솥밥처럼 담백하면서도 향이 더 진하다. 또 붉은 파프리카 샐러드도 잊을 수 없다. 이는 집 정원에서 딴 핫사쿠라는 감귤류에 셀러리와 잣을 넣은 애피타이저. 구운 파프리카로 감싸서 올리브 드레싱을 뿌려 내왔는데 한국의 겨울 디저트인 유자 주머니에서 영감을 받았단다.

부엌에 놓인 소쿠리와 채반이 정겹다.

남편과 딸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거실 풍경. 창밖으로 딸을 위해 만든 그네가 보인다.

통창에 골드 프레임을 넣어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 요리 스튜디오의 중정. 나무로 짠 그릇 장식장이 멋스럽다.

정원 한구석에 위치한 호소카와 가문의 사당.

타이쇼지의 널찍한 홀에서는 작가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로 전시나 마켓을 개최하곤 한다.
이토록 창의적 요리를 만드는 비법이 궁금했다. “외국에서 무얼 먹을 때,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나 생각하며 먹어요. 돌아와서 똑같이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재료가 애매할 때는 일본에서 나는 재료나 계절감에 맞는 원료로 대체하지요.”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밭에 돋아난 낯선 풀을 뜯어 씹어보며 맛을 음미하는 모습이 호기심 많은 요리 연구가 그대로이다. “각국의 전통 요리를 좋아해요. 아무래도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전통 요리에 관심이 많고, 특히 그 요리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변해왔는지 연구해요. 세월이 흐르면서 각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에 맞게 바꿔온 과정이 재미있지요.” 어쩌면 한국에서 접한 요리를 호소카와 아이식으로 변형한 요리가 언젠가 후대 일본인이 즐기는 신메뉴가 될지도 모를 일. 4백여 년 된 전통 공간에 현대적 요소를 접목해 색다른 매력을 창출한 것처럼, 그는 요리에도 같은 방식의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타이쇼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에도시대 때 ‘데라코야(寺子屋)’라고 부르던 곳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어요. 학교가 없던 시절, 일종의 서당처럼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책을 읽는 곳을 의미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이 기점이 되어 세계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배움의 장이 되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한국 요리를 자신만의 레시피를 적용해 클래스나 책을 통해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하는 호소카와 아이의 눈빛은 봄날의 햇살보다 더 따뜻하고 반짝였다.


일본 쓰지 조리사 전문학교에서 유학한 요리 연구가 박현신은 <나는 허브에 탐닉한다> 외 다수의 책을 출판하고 <행복>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요리 칼럼을 써왔습니다.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건축가 남편과 각종 식재료를 기르며 전원생활을 하면서 각국의 전문가를 초청해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행
4월호에 이어 5월호와 6월호에서도 일본 규슈 지역의 라이프스타일 고수를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그리고 <행복> 독자들과 함께 그들을 직접 만나고, 고수의 멋진 감각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구성할 예정입니다. 6월 말경 예정으로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합니다.

글 박현신 | 정리 강옥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