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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디자이너 외희 안에서 빛나리
한옥이라 하면 궁궐이나 절, 기와를 얹은 전통 양식의 집을 떠올리지만 사실 한옥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일상 주거 공간을 의미한다. 한복도 마찬가지다. 한복 디자이너 외희가 북촌 한옥에서 한복을 지으며 특별함이 아닌 ‘보통’의 가치를 나누는 이유다.

외희의 북촌 작업실. 작업을 하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는 마당에 물을 뿌리며 휴식을 취한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 
대문 옆 사랑채는 한복과 조각보, 이불 등 외희의 작업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어느 나라에나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고유한 생활 명품이 있다. 프랑스의 바게트, 영국의 정원, 독일의 맥주 등 지극히 소소한 일상에서 비롯하지만 그 나라의 자존심과 자부심으로까지 견주어지는 것들이다. 최근에는 휘게hygge, 라곰lagom 등 행복을 정의하는 무형의 단어조차 일상과 연결하는 추세다. 우리에게도 김치, 비빔밥 외에 일상 명품이 존재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평범한 골목길에 자리한 우리의 주거 공간 ‘한옥’에서 일상의 옷 ‘한복’을 짓고 보통의 날들을 만들어가는 갤러리 외희야말로 일상성이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현장이었다.

한지 미닫이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공간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옥의 매력. 주칠로 마감한 서안은 양병용 작가의 작품으로 찻상과 책상으로 두루 사용한다.

안방은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만든 VIP룸이기도 하다. 피팅을 할 수 있도록 거울을 세워두었는데, 거울을 안 볼 때는 뒤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뒷면에 책가도 패턴을 넣었다.
매일의 옷
한복을 입고 여행하는 것이 지금처럼 트렌드가 되기 전, 이미 2007년에 한복을 입고 해외에서 프리 허그를 자청한 이가 있었다. 한복 디자이너 이외희. 민간 문화 외교 같은 묵직한 명제가 아닌, 단순히 자신이 한복 짓는 일을 의미 있게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반문으로 도전한 일이었다. “어릴 때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가 저를 자전거에 태워 온 동네에 손녀 자랑을 다니셨는데, 그때 모시 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곤 했어요. 할머니를 따라 광장시장에 가서 옷감을 고르던 것도 생각나요. 할머니가 옷을 지어주면 저는 똑같이 인형 옷을 만들어 입혔죠. 30대 초반, 문득 손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한복이 떠올랐어요.” 대학원에서 한국복식사를 공부하고 한국궁중복식연구원을 거쳐 중요무형문화재 구혜자, 박선영 선생께 전통 복식을 배웠다. 전통 복식의 고증을 위해 박물관을 훑고 며칠 동안 꼼짝하지 않고 바느질을 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작은 바늘에 에너지를 담는 일이 행복했다. 함께 공부한 이들과 갤러리를 열고 한복 강좌 아이디어를 모았다. 엄마가 아이에게 지어주는 한복, 일상적으로 입는 저고리 등 의상을 전공하지 않아도, 바느질을 처음 접한 이도 자신의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는 클래스를 열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한복을 지어 입느냐는 걱정 어린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쇼를 위한 한복보다는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들고 싶었어요. 한복 프리 허그 여행은 그런 결심을 굳히기 위한 나름의 퍼포먼스였죠. 특별한 날을 위해 짓는 비일상적 한복보다는 평소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들고, 가르치면서 가치를 공감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고요.”

최근 궁 근처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관광을 다니는 젊은 층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한복 디자이너라면 전통을 왜곡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앞설 텐데, 그는 외려 반가운 마음이 크다. 분명한 건 우리의 일상에 지극히 전통적인 아주 오래된 일상복이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아닌가. 전통 한복은 전통 한복대로 격을 지키되, 일상 한복은 말 그대로 편안하게 접할 수 있는 보편적 미감과 기능이 따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외희의 한복은 전통 한복의 구조와 비례는 그대로 따르되, 소재나 디테일에 변화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직선 고름을 양장 기법인 사선 바이어스로, 충무누비 대신 다이아몬드 누비를 적용하는 식이다. 원색보다는 무채색으로 배색을 넣거나 원색에 무채색을 중첩해 오묘한 색감을 만들어내는 것도 특징이다. 세탁하기 쉬운 소재를 선택하는 것은 물론이다. 게다가 마름질, 재단, 바느질까지… 몇 번의 수업으로 직접 만들어 입을 수도 있다! “한복을 만들어 팔거나 대여하는 일을 하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고 일도 편하겠죠. 일회적인 일보다는 같이 즐기고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놀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한복 짓기를 배우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배우기 시작하면 재밌어서 1년, 2년째 수업을 듣는 분도 많아요. 배냇저고리부터 시작해 아이가 자랄 때마다 전통 한복을 지어 입히는 분도 계시는데, 아이들도 같이 와서 놀고 가곤 해요.” 그는 문턱을 낮추기 위해 문화센터 강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복 뿐 아니라 베개, 천연 염색, 비누 만들기, 다도 등의 수업도 진행한다. 어린 시절 추억과 놀이가 지금 한복을 짓는 일로 연결된 것처럼 한복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환영한다.

슬라이딩 새시를 열고 들개문을 들어 올리면 탁 트인 거실과 마주한다. 전통 복식을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해 동시대적 감각을 잊지 않는 것처럼 공간 역시 한옥의 기본 형태는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 것이 특징. 레노베이션은 현대건축을 주로 다루는 이승윤 건축가가 진행했다.

노후에 세컨드 하우스로 사용하기 위해 간단한 입식 주방, 세탁실 등을 구성했다. 거실과 주방 사이 문을 닫으면 거실 또한 하나의 독립된 방이 된다. 왼쪽에 걸린 민화는 홍경희 작가의 작품으로, 안으로 행복하라는 의미를 담아 ‘내희’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정섭 목수의 나무 장과 김형규 장인의 달항아리 작품을 장식했다. 동양적 꽃꽂이는 몬도 블로섬 서영주의 작업.

외희의 모시 적삼. 카디건처럼 걸쳐 입을 수 있는 디자인으로 고름 폭을 달리했다.

지금 우리의 살림집
외희는 지난해 인사동에서 가회동 골목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일상에서 입기 쉬운 한복을 만들 듯 40평 남짓한 전통 한옥에 편리한 기능을 담아 모던하고 심플하게 고쳐 지었다. 한옥의 전통 방식은 지키되, 어떻게 하면 현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불편하지 않을까를 고민하니 디자인은 저절로 풀렸다. 좁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곳곳에 수납장을 짜 넣고 여닫이문을 미닫이문으로 교체했다. 춥거나 덥지 않도록 단열을 보강하니 동시에 방음이 해결됐다. 지금은 작업실로 사용하지만 노후에는 세컨드 하우스로 쓸 요량으로 주방과 세탁실도 구성
했다. ㄴ자 안채는 안방과 거실, 주방, 복도를 지나 바느질방으로 연결되는데, 주방과 바느질방 사이의 복도 공간은 양쪽 문을 닫으면 하나의 독립된 방이 된다. 사랑채의 경우 마당과 레벨을 맞춰 마당이 사랑채까지 사랑채가 마당까지 연장되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냈다. 전시 공간이나 다실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바닥에 온돌을 깔고 타일로 마감했다. 마당은 물이 잘 빠지도록 물길을 내어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없다. 요즘처럼 날이 무더울 때는 잠깐씩 마당에 물을 뿌려 열기를 식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뿌리는 행위 자체가 안식이 된다.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지는 공예품과 자연 향을 품은 식물을 공간 곳곳에 장식했다.

주방 선반장을 장식한 다완과 비누. 외희만의 향기를 공간에 담기 위해 지난해 꽃을 피운 작약잎을 거두어 햇볕에 말려 숙성시킨 뒤 천연 비누를 만들었다. 비누 만들기 클래스도 하고 지인들에게 선물도 한다.

파노라마 창으로 빛을 최대한 끌어들인 바느질 작업실.

한복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베개나 배냇저고리 만들기 등 다양한 클래스도 진행한다. <행복> 독자를 위한 오픈 하우스 시간에 사진 속 베개를 만들 수 있다.

거실 한편의 장은 내부를 빨간색으로 마감해 양병용 작가의 주칠 서안과 잘 어우러진다. 원단을 보관하는 장으로 사용한다.
바깥 공간을 확장해 욕실을 구성했다.

다도를 함께 배우는 친구들과 일상 한복을 만들어 입는 바느질 수업을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모시옷을 만드는데, 완성되면 다 같이 입고 꽃차 파티를 즐길 계획이다. 왼쪽 앞부터 황혜정, 오서현, 김성희, 박지영, 서기문, 외희, 장금희 씨.
“작은 바늘을 잡고 실을 꿰고, 실크 원단을 다루는 것 자체가 무척 섬세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무던해지려고 노력해도 뾰족뾰족 예민할 때가 많아요. 근데 이렇게 한옥에 지내면서 쉼이라는 여유가 생겼어요. 한옥은 비워야 하잖아요. 공간에 무언가를 채우지 않고 비워내는 연습을 하면서 한 템포 내려놓으라고 공간이 저를 가르쳤죠. 또 창문이나 서까래, 디딤돌 등 나무와 돌같은 소재가 강한 조형성을 만어내지만, 동시에 사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죠. 마치 두꺼운 명주솜 이불을 덮은 것 같은 안온한 느낌이랄까요?” 그는 집은 보살피고 기다린 만큼 동글동글 포근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침이면 창문을 활짝 열어 집을 숨 쉬게 하는 것은 물론 정리 정돈을 생활화하니 1년 전 입주할 때처럼 흐트러짐이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생기가 돈다. 마당 한편에 있는 연못의 물고기가 겨울에도 살게끔 사랑채로 자리를 옮겨주고, 식물도 정성껏 돌봐 꽃을 피운다. 한옥에 이어 금곡동에 짓고 있는 집(네 가족이 살 집)은 모던한 현대건축이지만 작은 마당, 파노라마 창 등 한옥에서 발견한 공간의 장점을 면면에 반영했다. 새 집을 짓느라 여념이 없을 텐데 그는 언젠가는 불을 그리고 싶다는 또 다른 꿈을 이야기했다. 한복을 통해 세상 밖으로 환하게 이름을 알린 ‘외희’는 한옥을 통해 비움을 배우고 안식을 얻었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거나 노력하지 않고도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 모습을 아름다움으로 꿰어내는 지금이 행복하다.


<행복> 독자를 초대합니다
북촌 외희 갤러리에 독자분들을 초대합니다. 메밀 속을 채운 낮잠 베개를 만드는 바느질 클래스를 진행합니다.

일시 9월 12일 (수) 오후 2시
장소 가회동 외희 작업실
참가비 8만 원(재료비)
인원 8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오픈 하우스’ 코너에 참가하고 싶은 이유를 간단히 신청해주세요.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