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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수오미넨 핀란드 대사 ‘행복’을 스스로 ‘정의’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
이딸라의 유리 볼에 담긴 오트밀죽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출근하는 순간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서 빠져나와 업무에 집중한다. 퇴근 후 산책을 즐기거나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고 나면 비로소 찾아오는 고요. 에로 수오미넨Eero Suominen 주한 핀란드 대사의 하루는 꽤 간소하고 단순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은 그의 일상은 핀란드식 삶 자체다.

성북동에 위치한 주한 핀란드 대사관저의 다이닝룸.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이곳에서 아침을 먹기도 하고,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응접실로 사용하기도 한다. 길이와 모양이 제각기 다른 발로VALO 펜던트 조명등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활동하는 수산 엘로Susan Elo가 디자인했고,벽에 걸린 그림은 핀란드 신진 아티스트 안나 레툴라이넨Anna Retulainen의 작품이다.
1000℃가 넘는 불길 속에서 유리물이 끓어오른다. 유리 장인들이 파이프에 숨을 불어넣자 파이프 끝에 매달린 붉은 덩어리가 출렁거리며 형태를 갖춰간다. 이내 색이 고운 유리 오브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도시 리히매키Riihimäki. 1920~1950년대 유리공예 산업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1990년 공장이 파산하면서 찬란하게 빛나던 리히매키의 유리는 자취를 감췄다. 이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유리 공장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에로 수오미넨 대사에게 핀란드의 유리공예가 특별한 이유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유리 작품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매력적이지요. 당시에는 어느 집에서나 리히매키의 유리 제품을 볼 수 있었어요. 핀란드 디자인은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엔지니어로 살아온 제 아버지의 인생이 가장 눈부시 게 빛난 시절도 이즈음부터였어요. 디자이너와 글라스 블로잉 장인의 의견을 조율하며 사용자의 쓰임을 고려한 유리 제품을 생산하셨지요. 이는 핀란드가 중요시하는 평등의 가치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2016년 9월 1일 주한 핀란드 대사로 부임했다. 30년 넘게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독일 본, 이탈리아 로마, 오스트리아 빈 등 여러 나라와 도시를 거쳐 한국 서울에 발을 들였다.

대사관저 2층에 있는 침실. 창가에 놓인 책상은 에로 수오미넨 대사가 아버지에게서 구입한 것이다. 그는 1900년대 핀란드의 클래식하면서도 실용성을 고려한 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붉은 장식장 위에 베이징에서 구입한 앤티크 조명등을 놓았다.

침실에는 가족사진을 두었다. 스웨덴 외교관인 아내가 중국에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베이징으로 향한다.

아래 핀란드 대사관저에 있는 정원.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이곳에서 산책을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디자인
지난 6월 12일,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이딸라의 미드 서머 페스티비티 행사를 위해 성북동에 있는 대사관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철저히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한 핀란드 디자인의 가치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사관저 내부는 빛이 환히 들어오고, 핀란드의 숲만큼은 아니지만 녹음이 짙은 마당이 도시와 차단된 기분마저 들게 만든다. 핀란드 대표 건축가 알바 알토가 1933년에 제작한 암체어 401과 버드 바이 토이카를 비롯해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와 오브제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그 어떤 위화감도 들지 않는다. “핀란드 디자인은 단순하고 아름다우면서 기능적입니다. 엘리트 의식에서 비롯된 디자인이 아니라 다 함께 즐기는 디자인이지요. 카이 프랑크가 디자인한 이딸라의 카르티오잔은 제품의 본질과 기능에 충실하고 가격도 합리적입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생일이나 특별한 기념일에도 이딸라를 선물합니다. 작년에 핀란드 독립 1백 주년을 기념해 출시한 알바 알토 화병을 딸아이와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지요.”핀란드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널리 쓰는 제품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이 많다. 천재 디자이너 타피오 비르칼라가 만든 유리 컬렉션 울티마 툴레를 보면 빙하가 녹아내리는 모습이 연상되고,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라 불리는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화병과 건축물에는 유기적으로 흐르는 선의 미학이 담겨 있다. “오늘 제가 맨 넥타이는 마리아꾸르끼 제품인데 자연이 주는 색과 패턴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하는 브랜드예요. 우리는 자연을 통해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일상을 즐기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배우기도 하지요.”

대사관저 1층 리빙룸에는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암체어 401과 핀란드의 국민 캐릭터이자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무민 인형이 놓여 있다.

사우나는 정신을 다스리며, 아이를 낳기도 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집집마다 사우나가 있는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에너지를 충전한다.

정원으로 향하는 창가 근처에는 사물리 나망카Samuli Naamanka가 디자인한 암체어 이엘라JIELLA를 걸었다.

사색과 유머는 인생의 지혜
핀란드 국기를 보면 흰 바탕 위에 청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흰색은 겨우내 눈 덮인 대지를, 청색은 핀란드의 수많은 호수와 하늘을 상징한다. “우리는 늘 자연과 가까이 하며 살아요. 백야가 시작되는 여름에는 따뜻한 빛이 주위를 감싸고, 겨울에는 어둠이 내려앉죠. 그 시간에 무엇을 하려 애쓰지 않고 밝음과 어둠이 안겨주는 정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고요를 즐기는 그의 태도는 핀란드 라이프스타일에도 적용된다. 핀란드 사람들은 여름에는 숲과 호수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 있는 자신만의 작은 오두막에서 쉬며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호숫가에 앉아 있거나 사우나를 즐기며 다음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한다. “한번은 큰딸과 함께 주말을 보낸 적이 있어요.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딸아이가 ‘우리 오늘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라고 하더군요. 각자 TV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공상도 하면서 굉장히 좋은 주말을 보냈어요. 머릿속이 꽉 차면 새로운 것을 생각해낼 여유가 없어요. 가끔은 가만히 앉아서 사색을 즐기며 비워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대사관저 지하에 있는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며 스트레스나 근심, 걱정을 모두 내려놓는다. 대사관저의 2층은 그가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사적 공간. 스웨덴 외교관인 아내가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는터라 살림살이가 많진 않지만, 빈티지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에 맞춰 꾸몄다. 거실에는 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해 만든 1900년대 독일 빈티지 서랍장을 두었다. 침대가 있는 방에는 그가 아버지에게서 구입한 핀란드 가구 브랜드 빌내스Billnäs의 책상을 놓았는데,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형태가 1920년대 핀란드 디자인을 보여준다. 베이징에서 구입한 오리엔탈풍의 조명등도 그가 아끼는 빈티지 컬렉션이다. 개인 공간을 이례적으로 공개한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어디에서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집에서는 철저히 휴식을 취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복 공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그에게 오늘부터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핀란드식 삶을 알려달라고 하자 “약간의 유머”라며 웃으며 답한다. “유머는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주고 오픈 마인드를 지닐 수 있게 해줍니다. 상하 관계를 따지지 않고, 누구든 존중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태도를 중시하는 핀란드 교육법과도 연결돼요. 상대방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지 못한다면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울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아이가 부모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부모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먼저 인생을 살면서 실수를 경험해봤기 때문이지요. 숱한 실수를 겪으며 주체적으로 살아온 부모에게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이도 자신의 삶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지요.”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소문난 독서광이다. 빈에서 근무하던 당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과 관련한 일을 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데, 최근에는 미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의 회고록을 읽고 있다고. 소파와 테이블, 꽃처럼 생긴 조명등은 모두 핀란드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이딸라의 테이블웨어에 차린 핀란드식 아침 식사. 포리지에 블루베리 수프를 부어 마시고, 요구르트를 곁들인다. 진한 모닝커피는 필수다.

귀리를 넣어 식감이 투박한 핀란드식 아키펠라고Archipelago 브레드와 아스파라거스를 넣고 구운 키시Quiche 등으로 차린 점심.

수오미넨 대사의 고향 리히매키는 유리 공예로 유명한 도시였고,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리히매키의 유리 오브제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다이닝룸 창가에 놓인 이딸라의 버드 바이토이카.
자연을 닮은 핀란드의 맛
핀란드 라이프스타일을 말할 때 건강한 음식 문화가 빠지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스웨덴과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자연에서 식자재를 구해 재료 본연의 맛을 내는 요리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름이면 전 국민이 숲으로 가 스트로베리, 블루베리, 링곤베리, 클라우드베리 등 갖가지 베리를 따서 요구르트와 파이, 수프 등 다양한 음식으로 즐긴다. 에로 수오미넨 대사가 아침으로 즐겨 먹는 요리 중 하나가 블루베리 수프를 끼얹은 포리지Porridge(귀리에 물이나 우유를 넣어 걸쭉하게 끓여 만든 음식)다. “핀란드의 일반 가정에서 흔히 먹는 음식입니다. 포리지 속 귀리는 혈압을 낮춰주고, 블루베리는 비타민을 보충해주는 건강식이죠. 여기에 링곤베리 파우더를 뿌려 먹으면 아주 맛있어요. 그뿐인가요? 주변이 바다이고 18만여 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보니 수산물도 풍부해요. 생선을 활용한 요리도 많지요.” 핀란드 사람의 주식이나 다름없는 연어는 수프를 끓여 먹거나 크레페에 돌돌 말아 먹으며, 햇감자를 향신료와 함께 볶아 생선 요리에 곁들인다. 핀란드는 의외로 세계 최대 커피 소비국이다. 대부분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커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유엔 산하 국제커피기구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에서는 1인당 연 평균 12kg의 커피를 마신다. 에로 수오미넨 대사 역시 출근하기 전 진한 모닝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메리카노와는 거리가 먼, 많은 양의 진한 커피라 처음 마셔본다면 독하고 쓰게 느껴지기도. 에로 수오미넨 대사는 남은 임기 동안 자연을 닮은 핀란드의 음식 문화와 디자인, 삶의 태도를 더 많은 한국인에게 알리고 싶다. 그가 말한 핀란드식 삶이란 특별할 것 없지만, 남들이 알아주는 성공 혹은 돈이 많아야 행복할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우리에게 새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환기한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고… 인생에서 진짜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알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채워가는 것, 취향을 즐기는 삶. 그게 곧 당신만의 행복이 가득한 집이 아닐까요.”

글 김혜민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