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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PD, 스타 셰프를 만나다 주방의 철학자 페란 아드리아
어떻게 카탈루냐 외딴 해변에 있는 식당이 미식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꿀 수 있을까. 그 파란을 이끈 수수께끼의 요리사는 과연 어떤 인간일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스페인 수상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전설적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 그는 금세기 가장 천재적 요리사로 불리는 동시에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축구 선수 메시에 버금가는 세계적 지명도가 있는 인사다.

주방의 철학자라 불리는 페란 에드리아 셰프는 분자미식학 개념을 요리에 접목한 최초의 인물이며, 연금술사 못지않은 솜씨로 미식가와 평론가의 미각을 즐겁게 사로잡은 전설적 요리사다.

엘 부이 시절 페란 아드리아 셰프는 1천5백 가지가 넘는 레시피를 개발했고, 그 메뉴들을 정교한 사진 작업으로 남겨,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도록 했다.
페란 아드리아의 식당 ‘엘 부이El Bulli’는 단순히 미쉐린 스타로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또 다른 은하계 같은 존재였다. 1년 중 6개월만 문을 열고 수익의 20%를 연구 개발에 쏟아부었다. 이를 위해 점심 장사도 접었다. 그리고 2011년 한창 명성을 구가하던 시점에 페란 아드리아는 엘 부이의 문을 닫았다. 연구 개발비를 지나치게 쓰는 바람에 적자가 쌓여 문을 닫았다는 후문도 들렸다. 레스토랑이 있건 없건 이미 엘 부이와 페란이라는 브랜드는 그 이름만으로 수백억 원의 미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다. 매년 2백만 명이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으나 실제로 그의 요리를 맛본 행운을 누린 이는 하루 50여 명에 불과했다는 식당. 뒤집어 생각하면 그랬기 때문에 전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 보지 못한 길, 갖지 못한 것에 더 애타고 갈망하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자료를 읽고, 각종 영상물을 섭렵하면 할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페란 아드리아라는 인물은 이제까지 취재해온 셰프와 결이 많이 다른, 신경질적인 완벽주의자 스타일(물론, 이런 부류의 셰프는 많다)에 살짝 맛이 간 천재 과학자 캐릭터까지 버무려진, 매우 다루기 힘든 인터뷰 상대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셰프의 비서는 나에게 주어진 인터뷰 시간은 딱 40분이라고 못 박았다. 앞뒤 일정이 바로 이어지는 관계로 촬영 시간을 반드시 엄수해주기를 강조했다.


분자 요리의 창시자
과학적 방법을 요리에 접목하는 ‘분자 미식학’이라는 개념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대가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페란 아드리아는 창의적이고 과감하게 분자 요리의 개념을 활용했다. 조리할 때 원심분리기 같은 과학 실험 도구를 사용하거나, 액화 질소로 진기한 식감의 디저트를 만들어보는 것이 지금은 청담동 주방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요리법이지만, 20년 전에는 완전히 달랐다. 엘 부이의 분자 요리법은 평론가들을 열광하게 만든 새로운 연금술이었고, 미식가들의 지갑을 여는 마법 같은 요리의 탄생이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은 자연 상태의 것에서 불로 익히거나 발효시킨 정도의 변형 과정만 거친 것이었다. 그래서 접시에 담긴 양배추는 기본적으로 양배추 모양을 유지했고, 프라이드치킨은 닭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을 세 살배기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다 과학과 요리, 예술의 경계를 허문 연금술사, 페란 아드리아가 홀연 등장해 주방을 수천 년간 지배해온 통념을 깨뜨린 것! 거품같이 생겼는데 실은 채소일 수도 있고, 초콜릿 분말의 식감인데 쇠고기 등심 맛이 나는 차원이 다른 요리가 탄생했다. 미술에 비유하자면 비구상, 추상주의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반 고흐나 르누아르 같은 요리가 기존 미식의 패러다임이었다면, 페란 아드리아의 요리는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접시 위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블리피디아 프로젝트의 시작
페란 아드리아 셰프를 인터뷰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핵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첫 질문부터 분자 요리에 대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블리피디아 연구소에 도착해 그의 비서를 만나자마자 내 계획은 꼬이기 시작했다. “페란에게 인터뷰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어요. 분자 요리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언론에서 그 질문을 많 이 하는데 페란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해요.” 인터뷰를 온전히 끝내고 싶으면 분자 요리에 대해서는 절대 질문하지 말라는 것. 자신의 업적을 분자 요리의 창시자로 한정 짓는 것이 불쾌했던 걸까. 어쨌든 첫 질문으로 엘 부이의 문을 닫고 새로 시작한 블리피디아 프로젝트에 대해 물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블리피디아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서양의 요리 역사를 집대성하는 백과사전을 만드는 엄청난 작업이죠. 이 연구소에는 세계의 음식 전문가뿐 아니라 역사학자, 언어학자, 인류학자 등이 함께 모여 협력하고 있어요. 블리피디아는 단순한 조리 역사서가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이 자연에서 재료를 얻어내고 가공하거나 또는 가공하지 않은 채 변형하고 그것을 다채로운 공간과 형식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모든 걸 다 해체해서 재정립하는 것이 목표죠. 연구 범위를 서양으로 국한시킨 이유가 있어요. 한국, 중국, 일본의 식문화도 그 뿌리가 대단하다는 걸 알지만 솔직히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었어요. 조사하는 데 한계도 있었고요. ” 요리사가 진두지휘해 수천 년의 요리 역사를 총망라하는 대백과사전을 제작하다니! 천재적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가 없었다면 애당초 기획부터 불가능할 사업이다. 이런 대역사를 기획한 그도 대단하지만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수십 억의 연구 자금과 공간을 제공한 스페인의 스폰서 기업과 시 정부의 결정 또한 실로 대단해 보였다. 도전적 발상의 가치를 알아주는 후원자가 있어야 페란 아드리아 같은 괴짜 천재들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요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흔적을 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우리가 피자라고 하면 흔히 이탈리아 전통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1천 년 전에는 이탈리아에 피자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겨우 2백 년 전에 남부에서 생겨난 음식이죠. 맥주도 마찬가지예요. 맥주 하면 벨기에나 독일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맥주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는 그 궤적을 하나하나 따라가보려고 해요. 결국 요리사는 자신이 태어난 땅과 바다, 바람, 먹어온 음식, 가족의 기억, 이런 것들이 응축된 결과물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블리피디아 연구소에서 진행한 페란과의 인터뷰.

2011년 문을 닫은 엘 부이.


동생 알베르트와 함께 타파스 레스토랑 ‘티켓’을 오픈했다. 티켓의 타파스 메뉴 중 하나로, 달걀로 만든 받침 위에 참치와 올리브를 올렸다.

바르셀로나의 또 다른 명소가 된 두 형제의 레스토랑 ‘보데가 1900 바’의 메뉴.

티켓과 보데가 1900의 메뉴는 전통적인 타파스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했다. 한입에 맛볼 수 있는 초밥 컨셉을 적용했다.

요리의 본질은 질문과 사유
페란 아드리아 셰프는 1천5백 가지가 넘는 레시피를 개발했다. 그러한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는 하나의 요리를 여러 요소로 해체한 후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즐긴다. 이때 구성 요소는 재료의 맛과 향기, 모양뿐 아니라 음식을 소비하는 공간까지 포함한다. 그는 20년 전, 엘 부이에서 숟가락의 용도를 진지하게 사유했단다. 그리고 숟가락이 음 식을 뜨기 위한 도구만이 아니라 음식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을 다양한 레시피로 발전시켰다. 요즘은 일반화된 스푼에 담은 전채 요리의 아이디어도 페란의 이러한 철학적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역사적인’ 취재를 시작하고 20분 만에 인터뷰의 정상 구조는 완벽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페란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 시작하더니 이제 나를 본격적으로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페란의 대화법에 빠져들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방송용 인터뷰라기보다는 선방의 문답에 가까웠다. 당시 대화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런 식이었다.

페란 김치가 무엇입니까?
음… 김치는 무엇일까요?
페란 지금 제가 물은 질문에 굉장히 당황하고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걸 저희가 하고 있는 거예요. 김치는 소스인가요? 전채 음식인가요?
사이드 디시, 반찬, 밥과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페란 저는 이곳 근처 식료품점에서 병에 든 김치를 샀는데, 이것은 무엇인가요?
김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 사람에게 김치는 밥과 같이 있어야 하는 음식이거든요.
페란 그럼 지금 이야기하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매운 김치는 과거의 것인가요, 현재의 것인가요?
조선시대에 고추가 들어오기 전 한국의 김치는 맵지 않았어요.
페란 그렇죠! 김치의 본질을 보려면 타임라인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15년 전 유럽 사람은 김치를 몰랐어요. 지금은 거의 소스처럼 먹습니다. 문제는 이게 지식이 아니라 정보라는 거죠.

그의 신들린 강연에 빠져 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인터뷰 시간은 두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뾰족 안경테의 비서는 이미 천재 셰프의 열변을 중단시킬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실 우리도 다음 촬영 일정 때문에 자리를 떠야 했지만, 주방의 소크라테스가 쏟아내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 수 없었다. 카탈루냐인들은 “진정한 천재는 두 가지의 상반된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센sen과 라욱사rauxa, 즉 이성과 광기이다. 페란 아드리아는 바로 그런 믿음의 살아 있는 표본이다. 바벨탑 건설만큼 방대하고 무모해 보이는 인류 요리 백과사전 편찬작업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글을 쓴 이욱정 PD는 푸드멘터리의 선두 주자이자 국내 음식 문화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미식 탐험가다.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음식 다큐멘터리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셰프 못지않은 요리 솜씨로 인기를 얻은 그의 낙은 진미를 맛보고 세계 최고의 스타 셰프를 만나는 일이다. 대표작으로는 <누들 로드> <요리 인류> <요리 인류-도시의 맛>이 있다.



글과 사진 이욱정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