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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이원형 씨 삶이 작품을 만들고 작품이 삶을 만드는 사람
낙타의 육봉처럼 솟아오른 등, 남보다 짧고 가는 왼쪽 다리로 그는 누구보다 높이, 멀리 솟아올랐다.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가 격찬하는 조각가가 된 그의 인생에서,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강렬한 터치로 빚어내는 그의 작품에서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거인, 일그러진 영웅, 그 어떤 찬사도 합당치 않은, 다만 세계적인 조각가 이원형 씨.

이원형 씨의 오랜 지인이자 그의 일대기를 잡지 등에 기고한 소설가 최일옥 씨의 집 정원에서. 그와 작품이 원초적인 교감을 나누는 듯하다.


그의 작품은 바로 그 자신이다
Won Lee, 이원형.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알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국제조각가협회 서클 멤버, 미국 버몬트 아트센터 이사, 캐나다 토론토 스쿨 오브 아트 이사, 네덜란드 즈볼레(Zwolle) 국제조각협회 자문위원. 캐나다 교포 조각가 이원형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직함이다.
그는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 그의 불행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인 데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와 꺼지지 않는 창작력까지 겸비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삶은 고통인 동시에 희망이고, 그의 작품은 언제나 끝을 알 수 없는 시작이다. 그와의 대화는 정녕 세계적 조각가임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대의 식자 識者들을 매료시킨 사회주의 이념에 탐닉한 아버지는 북으로 넘어갔고, 주사 한 대면 헤어날 수 있는 소아마비였건만 그 시혜마저 그를 멀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늘어져가는 다리, 휘어가는 등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어 남몰래 고민하며 보낸 어린 시절을 그는 더 이상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북으로 간 아버지로 하여 그들 가족에게 씌워진 멍에는‘빨갱이’였고, 그 그늘은 어둡고 깊기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방첩대에 불려 다니던 어머니는 그 지옥 같은 나날이 힘겨워 2남 3녀 5남매를 이 땅에 남겨놓고 태평양 너머 미국 땅에 정착한다.
남보다 짧고 가는 왼쪽 다리, 그 불균형의 여파로 뒤둥그러진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그가 평생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의 멍에를 말하듯 오른쪽 날갯죽지 뼈마저 낙타의 육봉처럼 솟아나고 말았다. 육신은 뒤틀리고 일그러졌을지언정 그의 정신은 자신처럼 장애를 지고 사는 사람을 돕는 의사를 꿈꾸었다. 그러나 의과대학은 필기시험에 합격한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일단 영어라도 배워두자는 마음으로 외국어대학 영어과에 진학했다.
건강한 신체를 담보하지 않은 대학 졸업장은 그의 삶을 책임지기에는 너무도 가벼웠다.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욕구를 거부할 수 없던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빨갱이 딱지가 붙은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유학의 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믿을 것은 자신의 노력뿐이라는 다짐과 함께 그는 마침내 미국 땅에 건너갈 수 있었다. 그곳 대학에서는 그의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는 외국인이 탈 수 있는 장학금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으며 미술의 기초인 그림부터 시작했다. 지도 회사와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매일 하루 2~3시간 쪽잠을 자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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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imate Encounter’, 브론즈, 81×23×13cm, 2006 2 ‘Caesura #4’, 브론즈, 80×23×15cm, 2008 3 ‘A young girl’, 브론즈, 200×61×36cm, 2005 4 ‘The dressed’, 브론즈, 200×50×43cm, 2006


마침내 1976년 미국 페퍼다인 대학을 수석 졸업하는 영광과 함께 L.A.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그러나 수석 졸업의 영광도, 그림에 대한 열정도 빵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형님의 소개로 만난 제주 아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 그들의 생계 또한 그의 몫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었다. 보헤미안 생활을 힘들어하는 아내와 함께 그림을 알아주지 않는 그 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가지고 있는 모든 붓을 꺾어버리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우선 빵 문제를 해결하자는 결심으로 밴쿠버로 떠났다. 1980년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상과대학 회계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유명한 회계 법인에 취직을 했다. 매일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었다. 점점 경직되어가는 몸으로나마 지옥 같은 인턴 생활을 견뎌냈다. 정말 죽기를 각오한 나날이었다. 1983년 그 어렵다는 캐나다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한 후 토론토로 건너가 공인 회계 법인을 개업했다.
“토론토로 이사 오며 내가 다시 붓을 들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과연 얼마일까 계산해봤어요. 그러나 그 시간이 찾아온 것은 당시의 내 계산보다 훨씬 길어졌죠.”
그림을 그리듯 치밀하고 성실하게 운영해가는 그의 회계 법인은 날로 번창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숨 돌리고 나자 창작에 대한 욕구가 그를 휘감았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걸림돌이 그를 막아섰다. 무서운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음을 실감했다.
“아내의 반대, 그것은 절벽과 같았습니다. 회계사 사모님으로 존경받으며 대접받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 그런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려 했어요.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동전 한 닢 챙기지 않고 모두 남겨둔 채 집을 나왔지요.”
그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회계사 사무실 지하에서 생활하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작업을 하며 지내던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조각을 전공한 그녀는 그보다 그의 작품을 먼저 사랑했다. 학교가 끝나면 그의 작업실에 들러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이 당시 그녀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이 사람 작품을 홀로 사랑하며 지내기를 8년.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어요. 나를 받아줄 수 있느냐고…. 그냥 오라 했어요. 까만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이 사람을 그냥 바라봤죠.”
지금, 그의 곁에는 늘 그녀가 있다. 미소를 잊지 않은 채 그의 조수이자 비서와 아내 역할을 힘차고 즐겁게 수행하는 그와 띠동갑인 아내가 수줍게 웃으며 당시를 회상한다.
불타는 창작 열기는 배움의 갈증을 동반했다. 손끝에서 나오는 작품이지만 그의 머리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고, 그의 가슴은 그 지식을 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는 감동의 순간을 위해 펄떡거렸다. 2002년, 나이 57세에 미국 버몬트에 있는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 대학원에 입학했다. 첫 수업 시간, 그는 교수들에게 거침없이 내가 왜 아티스트가 되려 하는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폭탄 같은 발언을 건넸다.
“그리고 몇 달 후,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알았어요. 하고 싶으니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 후,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다 문득 피카소가 떠올랐어요. 내게는 피카소와 같은 색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마티스나 반 고흐 등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니 스스로 너무 작게 느껴졌어요. 그러나 좀 건방진 말인지 모르겠지만 로댕이나 미켈란젤로, 자코메티 등 조각의 거장 그 누구를 생각해봐도 그들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인정하며, 조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작가들이 몇십 년을 해도 만들지 못할 어마어마한 수의 조각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2005년‘들뢰즈 미학(Deleuzean Aesthetics)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만난 들뢰즈의 미학 이론은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기다림의 의미를 안다. 기다림은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씨가 정열이란 빛과 노력이란 물로 싹을 틔워 개화하기까지의 시간이다. 가슴 밑바닥에서 용틀임하는 뜨거운 마그마가 분출을 정지한 휴화산, 그는 휴화산이었다. 휴화산은 억압되어 있던 시간의 깊이와 열정만큼 힘차게 치솟는다. 분출을 시작한 그의 창작 열기는 멈출 수가 없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형상이 꿈틀댄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창작의 열기와 때를 기다리며 감내한 고통의 비명과 달관된 시선은 그의 작품에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숭고한 혼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극한적 한계와 규제를 감상적으로 생각하거나 나약하게 보지 않고 삶의 희망으로 바꾸었기에 휴머니즘으로 감싸 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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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loor Wiper’, 세라믹, 23×64×32cm 2 ‘Love in Korea’, 브론즈, 54×27×36.5cm056  3 자신의 작품 ‘A double’과 ‘Lu Lu 18-2’ 사이에 앉은 이원형 씨. 뒤틀리고 교란되고 고통 받는 인간의 형상, 인간 존재의 연약함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환희의 합창을 노래하다
6월 2일, 그의 작품 1백여 점이 한 공간에서 커다란 울림을 토해낼 것이다. 내로라하는 개성 넘치는 음색이 낱낱이 울릴 것이나 그 모든 것은 단 하나의 합창을 위해 노래한다. 바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한 작가의 다양한 조각 작품들이 토해내는 울림이다. 그 합창은 하나지만 1백 개의 소리를 들려줄 것이며, 1백 개지만 하나의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는 병약한 육신에서 성장한 지고한 예술혼이 노래하는 합창이다.
그의 아름다운 영혼이 흙에 부여한 생명, 그 생명이 다시 청동이라는 차갑고 두꺼운 옷 속에서 뜨겁고 부드럽게 노래를 한다. 크기가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포즈와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들은 오직 하나를 노래한다. 바로 인간의 거짓 없는 육신이 보여주는 지고한 영혼과 사랑 그리고 티 없는 순수를 담은 동심을 이야기한다.
혹자는 그의 작품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도 형상화하려 하지 않은 허울을 벗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무도 솔직하여 차마 마주 바라보지 못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거짓과 허울을 벗지 못한 나약한 위선 덩어리인 우리이기에 그의 순수가 어렵게 다가온다. 순수와 동심을 잃은 우리는 바로 우리의 참모습 앞에서 고개를 떨구거나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그 말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다. 인간의 참모습을 깨닫기 위해 고뇌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작품이야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며, 나아가 참 나(진아 眞我)를 만나는 순간이다. 참 나를 찾으라, 울려오는 대합창. 그것이 바로 이원형, 원리 Won Lee가 노래하는 합창의 주제이자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조각의 대합창을 시도한 것일까. 그것은 이번 개인전의 부제 副題를 보면 알 수 있다. ‘아프리카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자선 전시회’. 그는 작품이 돈 되는 날이 오면, 자신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겪은 불행에 대한 작은 원수 갚음이란 생각에서 나눔을 실천하리라 결심했다. 나눔은 감사에서 시작되며, 또 다른 감사를 잉태한다.
“나는 다섯 살 나이에 6・25를 겪었고, 그 후 전쟁의 고통과 상처는 고스란히 여성과 어린아이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아프리카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있으며, 단 하루도 부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이 말이 그가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의도다. 미국 명문 미술대학 프랫 인스티튜트의 모건 교수는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 이번 전시회의 인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Won Lee의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형태로부터 우리 안에 존재하는 꿈틀대는 영혼이라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영혼이 내재된 완전한 인간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가 창조한 조형적 표현은 조각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한편, 매우 현대적이고 서정적인 언어로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들은 미국 뉴욕, 캐나다 토론토, 멕시코 푸에르토바야타, 대한민국 서울에서 네 차례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대한 순회 전시회의 첫 시발점이 바로 그의 고향 서울이다.

세계가 그를 기다린다
처음 그의 작품을 주목한 곳은 영국이었다. 한 아낙네가 용변을 보는 도발적 형상, 그것은 관람자를 우롱하는 듯하면서도 지극히 에로틱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 매료된 영국 런던의 한 조각공원에서 이 작품 ‘Girl at the Outhouse(뒷간의 소녀)’와 추상 작품‘The Fool’을 영구 보존하는 조건으로 구입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2005년 세계 미술 시장을 주도하는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도 그의 대형 작품 ‘A Family of faces’가 한 컬렉터에게 고가로 판매되었다. 바로 그 작품이 오는 6월 30일 콩고 독립 50주년 기념물로, 그를 내친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콩고의 수도 킨샤사에 있는 대통령 궁 앞에 높이 4m라는 거대하고도 웅장한 크기로 조성된다. 미국 텍사스의 베니니 재단 조각공원과 버몬트 존슨 스테이트 칼리지에 대형 작품 ‘Meditators’가 각각 설치되었고, 멕시코 현대미술관 등 대형 전시관과 세계 각국의 컬렉터에 의해 소장되고 있다.
그의 작품과 그를 격찬하는 평자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의욕과 재능 그리고 환상까지 지닌 뛰어난 작가다. 그가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이겨낸 의지와 결심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그의 품성은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한다. 강인한 의지, 카리스마, 지성, 열정, 고뇌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안팎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이다.”_에디 파월(영국 서레이 조각공원 큐레이터)
“사려 깊고 대담하며 원초적인 그의 작품들은 강렬함과 신비함을 발산한다. 뒤틀리고, 교란되고, 고통받는 인간의 형상은 질병으로 파멸된 인체의 실망과 절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인간 존재의 연약함에 대한 예언적 기질을 보여준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만이 성취할 수 있는, 관객의 내면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_데이비드 커트니지(영국 예술 투자 회사 대표)
그는 토론토와 베이징, 멕시코 세 곳에 작업실을 갖고 있다. 그가 쏟아내는 작품의 양과 질뿐 아니라 곳곳에서 펼치는 미학 강의도 유명하다. 그는 세계 대도시에서 펼칠 개인전을 준비하는 틈틈이 들뢰즈 미학을 강의한다. 들뢰즈 미학을 유창한 영어로 풀어가는 그의 강의에 몰려드는 1천여 명의 학생을 위해 대형 프로젝터를 설치해야 할 지경이다. 들뢰즈 미학은 어렵다. 그러나 조각가 Won Lee가 풀어주는 들뢰즈 이론을 듣다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들뢰즈는 기존의 사상이나 이론에서 탈피하자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의 이론은 차이의 철학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같지 않다는 차이가 아니라, 색깔까지 포함한 모든 것들의 힘(energy)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재현의 관점, 상식의 관점을 깨야 한다. 기존의 관념이나 형식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터부에서도 벗어나라. 카오스로 들어가라. 그리하여 차이의 존재를 찾아내고, 새로운 차이를 창조해내는 것이 ‘차이와 반복’이다.”
2005년 후반부터 지금까지 그가 추구하는 작품의 주제는 바로 이 ‘차이와 반복’이다. 차이와 반복은 순간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순간은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포함하여 반복한다. 그는 처절하게 빈 마음으로 순간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그의 예술이며 삶이다.

(왼쪽) 수십 년 동안 그의 벗이 되어준 나무 지팡이. 새 지팡이를 선물 받아도 결국 이 낡은 나무 지팡이를 의지하게 된다.


이원형 씨의 작품 ‘A double’. 하늘을 우러르고 서 있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만은 신이고 싶다
“…재료의 맥박이 시작합니다./ 그의 되어감으로 꿈틀댑니다./ 모델과 욕망의 기계는 주위를 맴돕니다./ 무당의 가락에/ 욕구의 손은 찢고 매만집니다./ 작품은 터부의 벽을 잘라나갑니다./ 그리고 혼돈의 신선한 공기를 불러들입니다./ 성스러운 새벽에/ 가상의 실체가 그들의 순간을 교환합니다.”
2006년 2월에 쓴 이원형의 작가 노트이다. 그는 흙과의 만남에서부터 흙의 맥박을 보고 흙이 살아 있음을 안다. 신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듯 혼돈의 신선한 공기를 불러들여 인간의 욕망과 성스러움을 흙과 교환한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만큼은 신이고 싶다. 누군가 예술가를 ‘신을 닮은 원숭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창조하기에. 더욱이 인간의 형상을 만드는 조각가 이원형은 정말 신을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업 과정은 순간의 연속이다. 의도하지 않은 표현까지도 귀결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 믿기에 그 모든 순간을 즐겁게 수용한다. 그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은 살아 있다고 본다.
“대상을 만나는 순간, 그들의 다름을 만나게 되며 그 다름을 통해 호흡을 느낀다. 따라서 모든 것은 살아 있다. 그 다름의 가장 아름답고 다양한 신비가 인체이며, 특히 여체이다. 여성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의 재생성 再生性을 믿는다. 새로운 삶은 죽음과 삶의 만남이다. 이 모든 것은 재생(Rebirth)의 길, 곧 순환이다. 나는 생명의 근원인 여성에게서 강렬한 생성의 의미를 본다. 성은 인간의 본성이며 창조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양하다. 그는 그 다양성만큼이나 고뇌한다. 그가 흙을 빚어 만든 형상이 동 銅으로 완성되어 나오기까지의 제작 과정은 참으로 길고 복잡하다. 그는 죽어 있는 흙을 보는 순간 흙의 호흡을 들을 수 있고, 그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의 작품은 그 크기와 그 크나큰 울림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 몸으로 어떻게 그처럼 많은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상상은 부질없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한 호흡까지도 흙에 불어넣기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거인, 일그러진 영웅, 그 어떤 찬사도 그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는 다만 세계적인 조각가 이원형, Won Lee일 뿐이다. 그의 작품은 www.wonleeart.com에서 만날 수 있다.

2010년 6월 1일 오후 7시. 조각가 이원형 씨의 개인전 전야 행사가 시작됩니다.
지난 33년간 국내 가구업계를 선도해온 (주)영동가구에서 새로운 기업 이미지 창출을 위해 개관한 갤러리‘경’의 첫 초대전이 그것입니다. ‘아프리카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자선 전시회’도 겸한 이번 전시에서 인류애 가득한 이원형 씨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일시 6월 2일~12일 장소 갤러리 경((주)영동가구 내) 문의 02-549-5710 054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