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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행복] 바느질 에세이집 펴낸 배우 김현주 씨
수많은 드라마를 거치며 세파를 견뎌낸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낸 배우 김현주 씨. 그가 10년 전부터 바느질과 뜨개질에 빠졌고, 앞치마, 에코 백, 파우치, 뜨개 목도리를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기억과 상념을 모아 에세이를 썼다. 한 땀 한 땀, 한 올 한 올, 한 자 한 자 채워나간 여자 김현주의 속 깊은 이야기.
찬비 내리는 겨울날, 그를 만났다. 밖에는 찬비가 어른거리는데, 카메라 조리개에 담긴 그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그 주위엔 갓 구운 빵 같은 온기가 흘렀다. 낡은 스웨터의 보푸라기처럼 아련하게 추억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배우 김현주 씨는 올겨울 바느질 에세이집을 냈다. 드라마나 영화가 또 다른 훈장이 되어야 할 타이밍에 바느질이라…. 어딘지 퇴화된 세계인 듯한 이 ‘수예’의 세계에 그는 흠뻑 빠져 있었다.
현주, 가늘고 보드라운 계집애 냄새를 풍기는 이름. 그리고 배우 김현주, 세상 끝에서도 깨진 무릎 후후 불며 ‘괜찮아, 난 꿈이 있어’를 외칠 듯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배우. 모진 풍파를 다 겪고도 꿋꿋하게 일어서서 미래를 개척하는 그(<유리구두>), 오뚝이 같은 성격의 억척 처녀(<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두말 할 필요 없는 서희(<토지>), 상처를 간직한 주인공(<인순이는 예쁘다>), F4의 누나이자 정신적 지주(<꽃보다 남자>), 그리고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 보여준 억척 아줌마 변호사(<파트너>)….그는 줄곧 강인한 생명력의 주인공을 연기했고 지금껏 별다른 연기 논란이 없었던, ‘연기 좀 하는’ 배우다. <인순이는 예쁘다>를 연출한 표민수 PD는 “김현주가 아니었더라면 인순이는 존재하지 못했다”고 극찬했었다. ‘감성의 들숨과 날숨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연기’라는 평론가의 찬사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눈밑 그늘. 그의 연기를 볼 때마다 ‘저 눈밑 그늘만으로도 이 여자는 연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양조위가 담배 연기만으로 절망을 연기하듯, 고현정이 귀고리와 눈썹만으로 욕망을 연기하듯. 앳된 표정과 세상 다 알아버린 듯한 표정이 공존하는 연기를 그 눈밑 그늘이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일화들. 산으로 둘러싸인 촌에서 자라났고, 돈 벌고 싶어 하는 열여덟 살 소녀로 소녀 잡지 모델로 데뷔해 CF ‘국물이 끝내줘요’ 등등을 히트시키며 승승장구, 열아홉에 서울에 자기 이름의 집을 사고 가족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는 그 일화들…. 왠지 그에겐 세상을 미리 보아버린 듯한 조숙한 청춘이 엿보였다.

청춘의 소염제는 뜻밖에도 바느질 그런 그가 낯설게도 ‘바느질 에세이’라는 글을 묶어 책을 냈다. <현주의 손으로 짓는 이야기>란 제목이 붙었다. “숨쉬기…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끔씩 숨이 쉬어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게 자신만의 호흡을 찾아가는 것, 정말 시원하게 숨을 쉬는 것, 답답한 숨통을 화악 열어보는 것. 어쩌면 내게, 그것이 바로 바느질이다.” 이렇게 꽤 근사한 글들이 책 안에 들어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생각이 생각을 낳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을 때 언제부턴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재봉틀을 돌리고 바느질땀을 뀄어요. 재봉틀 페달을 자동차 액셀이라 생각하고 신나게 밟으면 스트레스가 절로 풀리는 것 같았죠. 고민의 가지 끝에 맺힌 것은 또 다른 고민일 뿐이라는 걸 바느질하면서 깨닫게 됐죠. 바느질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마음속 수선스러운 이야기들을 저만치에서 쳐다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기던걸요.” 모든 청춘이 그렇듯, 수류탄 핀처럼 불안해하던 날들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펄펄 끓는 연애의 열에도 내맡겨져 봤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변이 자신을 꽉 붙잡고 있다는 생각에(그는 꽤 속 깊은 맏딸이다) 어느 날 홀연히 자리를 박차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서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는 바느질과 뜨개질을 했다. 그가 만든 파우치 하나, 가방 하나, 쿠션 하나는 그 청춘의 고민이 남긴 전리품이리라.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매웠던 그는 책을 탐독하고, 수예점을 찾아다니며 귀동냥, 눈동냥으로 바느질과 뜨개질을 배웠다. 2년 반 동안 꽃꽂이 강의를 듣고 자격증 시험에도 덜컥 합격하고, <인순이는 예쁘다>를 끝낸 후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엔 플로리스트 수업도 들었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는 청담동에 작은 작업실도 하나 만들었다(그는 작업실이란 거창한 문패 대신 ‘놀이방’ ‘놀이터’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 이걸 좀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일본 유학까지 꿈꿨다. 여기까지 듣고 나자 왠지 ‘여자의 성숙’ ‘온기’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여성스럽다고요? 원래 전 말투가 건조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깍쟁이 같은 구석도 있어요. 남자처럼 통도 크고 시원시원한 편이어서 그런지 바느질을 하면 크게 크게 만들고, 꽃꽂이 밑작업하려고 크로키를 할 때도 스케치북 밖으로 그림이 달아나요. 선생님들이 매번 ‘현주 씨! 뭘 담으려고 그렇게 크게 만들었어?’ 하는걸요.” 그 순간 그는 가시를 다 따버리고 배시시 웃는 이웃집 여동생 같다.

(위) 티워머는 그가 직접 바느질해 만든 것이다. 양쪽 구멍에 엄지와 검지를 끼우면 집게처럼 안정적으로 뜨거운 티포트를 잡을 수 있다.


속 깊은 즐거움을 알아가는 시간 그는 한국 나이 서른세 살의, 중간 연령층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 책에서, 인터뷰에서 인생의 어떤 염증과 또 그 소염 작용을 알아낸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을 쓰는 시간은 곧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내가 만든 물건에 담긴 추억, 곧 내 상처, 기쁨, 좌절을 다 꺼내 들여다봐야 그 물건에 얽힌 에세이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죠. 책 한 권을 쓰면서 인생의 길을 많이 정리한 것 같아요.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만 남았으니 내겐 정말 힘이 나는 책이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낙관적 음성.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고민으로 시작해 행복으로 태어난 아이들(그가 만든 물건들-편집자 주). 나는 그렇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 길에 바느질이 함께한 것이다. “누구든 저처럼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떨 땐 찾기 싫어서 돌아앉아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조금 더 아프고 싶고 힘들고 싶고 그래서 누구에겐가 매달리고 싶고,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찾지 않는 걸 수도 있고. 저도 그랬거든요. 너무 훌훌 털고 일어나면 안 될 거 같아서. 하지만 분명히 어떤 방법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바느질하며 한 귀퉁이라도 찾아냈듯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에 몰두하며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주는 위안, 자기 안의 깊은 동굴을 들여다본 사람만의 깨달음. 서른세 살의 김현주는 이제 인생이 인상적인 단편소설에서 스토리 라인이 탄탄한 장편소설로 변해가는 걸 알게 된 듯하다.

(위) 데뷔 이후 3~4년이 지나고부터 바느질에 빠진 김현주 씨. 이제는 취미를 넘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니트 카디건은 미쏘니 제품, 나머지 의상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티워머를 제외한 리빙 소품은 안선미 씨 소장품.


1 삼각 필통.
2 숟가락 모양으로 아플리케 처리한 식탁 매트.



3 동전 하나도 귀하게 여기고 싶어 만든 동전 지갑과 명함 지갑 등.
4 신문 패턴의 패브릭으로 만든 뉴스페이퍼 가방.


이 여자의 성숙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자꾸 궁금해졌다. “글을 쓰고 싶어요. 나중에 나이 들어 단편소설집이나 수필집 하나 써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고.” 지금처럼 빼곡히 잘 채워나간다면 마음 안에 투명한 말들이 고요하고 격렬히 쌓일 것이고, 그것이 글이 될 것이다. “또 원예 치료도 배우고 싶고, 가구도 만들고 싶어요.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꼭 하게 되던걸요.”
그가 숲 속에 떠도는 향기처럼 바느질감과 재봉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동안 다른 초신성들이 그의 자리를 다퉜을지라도, 그가 누린 시간은 참 귀한 것이었다. 낡은 스웨터의 보푸라기 같을지라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걸 그는 이제 알아버린 것이다. 바로, 사는 것의 ‘속 깊은 즐거움’을 알아보는 눈이 여자 김현주에게 생겼다. 그 덕에 난 참 오랜만에 ‘속 깊은 여자, 속 깊은 여배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5 커플 워머. 여자용은 아이보리색, 남자용은 회색이다.
6 천을 덧대 리메이크한 슬리퍼.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