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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 달착지근한 우리 옥수수
해발 700m에 있는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는 험준한 산세에 묻혀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용복 농부의 집은 배추밭에 폭 안겨 있는 꼴인데, 그 사이로 멀대처럼 우뚝 솟은 옥수수가 드문드문 보인다. 그에게 옥수수는 지겹도록 먹고 자란 밥이며, 굶주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음식이다. 일흔이 넘어서도 재래종 주먹찰옥수수 재배를 고집하는 것은 그 달착지근한 맛을 알고 찾아오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 무렵 우리나라에 들어온 옥수수. 과거에는 보릿고개를 넘게 해준 고마운 식재료였고, 지금은 남녀노소 좋아하는 간식거리다.
구황작물에서 제철 별미로
갓 딴 옥수수는 쪄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쫀득거리는 옥수수알 사이로 배어 나오는 달곰삼삼한 맛. 사카린의 일종인 뉴슈가를 살짝 넣으면 옥수수의 단맛은 배가된다. 앞니로 야금야금 먹어가며 하모니카 부는 시늉도 낼 수 있으니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세계 3대 곡물 중 하나다. 남미에서는 옥수수로 사람을 빚어 만들었다는 신화가 존재할 만큼 옥수수를 신이 주신 선물이라 여겼다. 적은 일손으로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어 ‘순금 열매’라고도 불렀고, 인디오들이 즐겨 먹던 최고의 주식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16세기 후반 무렵 중국을 거쳐 전해졌다. 남미의 원주민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길고 뭉툭하게 생겨 구슬처럼 알이 잔뜩 달린 옥수수가 영 탐탁지 않았나 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에서 옥촉玉蜀(옥수수)을 설명하는데, “맛이 달아 먹음직스럽지만 곡식 종류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딱 잘라 곡식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옥수수는 기근이 심할 때, 먹을 것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먹는 구황작물이었다. 지금은 여름철 별미로 꼭 먹어야 할 식품이지만, 50년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옥수수는 땅이 척박해 쌀 재배가 어려운 강원도 산간 지방의 주요 식량 중 하나였다. 현재 국내 옥수수 생산량은 약 7만 3천6백81톤이며, 이 중 강원도 생산량은 2만 7천8백13톤으로 37.8%를 차지한다. 여름이 절정에 오를 무렵 강원도에 가면 옥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농가를 볼 수 있고, 밭 가장자리에 콩과 함께 심어둔 곳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상품성이 좋은 개량종 옥수수가 널리 퍼지면서 재래종 옥수수 재배는 급격히 감소했지만, 토박이 농부들이 그 씨앗을 지키고 전해왔다. 산골 마을에 사는 이용복 농부의 밭 가장자리에는 재래종인 주먹찰옥수수가 줄지어 서 있다.


강냉이 익어가는 계절
누가 여름 아니라고 할까 봐 목청 터지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작은 산골 마을을 뒤흔든다. 장장 20일 넘게 지속되는 폭염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촬영 당일 제법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가 이제 오네. 옥수수 다 말라 죽게 생겼는데…. 올해는 영 실하지 못해요. 비가 와야지, 여름 내내 햇빛만 내리쬐니 옥수수가 자랄 틈이 있나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쌀밥 지어 먹는 집이 몇 없었다는 이곳에서 이용복 농부는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찌거나 삶아 먹고, 보리쌀과 감자와 섞어 밥해 먹고, 맷돌에 갈아 솥에 넣어 강냉이죽을 끓여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주먹찰옥수수는 맛이 쫀득하니 고소하고 달아요. 그래서인지 많이들 찾아요. 심어놓기만 하면 잘 자라서 옛날에는 이 주변이 죄다 옥수수밭이었습니다. 주먹찰도 심고, 개량종인 미백도 함께 심었지요. 4월부터 8월까지 씨앗을 두 알씩 심어 서로 지지하면서 클 수 있도록 합니다. 주먹찰은 거름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옥수수잎과 수숫대를 소의 분뇨와 섞어 발효시켜 밭에 뿌려야 해요. 9월 초까지 수확하는데 키가 칠척(210cm)이 넘어갑니다. 밭에 콩과 섞어 심기도 하고요.” 옥수수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는 것이 특징으로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큰다. 흥미로운 점은 옥수수가 많이 나는 곳에 반드시 콩이 있다는 것이다. 옥수수는 지력 소모가 엄청나 땅에 질소를 공급해주는 기능이 있는 콩이나 호박을 같이 심는 것이 좋단다. 예부터 관행처럼 해왔다고 하니 농사 짓는 데 경험으로 터득한 농부의 지혜만큼 요긴한 것도 없는 듯하다. 이용복 농부는 고추와 섞어 짓기도 하는데, 고추를 심은 가장자리 두둑에 경계선으로 옥수수를 둘러 심는다. 이듬해 씨앗으로 쓸 것은 옥수수 껍질끼리 묶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한다. 벌레가 먹지 않는 한, 상온에서 최소 3~4년 정도는 거뜬하다.

왼쪽부터 재래종 옥수수 중에서도 크기가 가장 큰 메옥수수, 낟알의 색이 제각각인 얼룩배기옥수수, 검보랏빛을 띠는 흑찰옥수수, 생김새가 작고 귀여운 쥐이빨옥수수, 강원도를 대표하는 주먹찰옥수수.

8월 초면 옥수수의 껍질이 완연한 초록빛이 되고, 그 사이로 상앗빛 속살을 드러내야 하건만, 올해는 비가 오지 않은 탓에 작년에 비해 제대로 영글지 못했다.

하미현과 이용복 농부, 정순자 씨는 처마 밑에 앉아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강원도 옥수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옥’ 소리 나게 맛 좋구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재래종 찰옥수수의 재배 면적은 7천 헥타르에 달했다. 1989년 우리나라 최초의 극조생종인 찰옥 1호가 개발되면서 강원도 중심의 옥수수 재배가 남부 지역을 포함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충북 괴산에서 유명한 대학찰옥수수도 보성과 제원 지방에서 수집한 토종 옥수수를 교잡하여 만든 것으로 여전히 인기가 높다. 이때부터 미백찰, 일미찰, 미백 2호 등 다양한 개량종이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개량종보다 실하고 맛 좋은 재래종 옥수수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개 모양과 맛, 색, 익는 시기에 따라 구분한다. 이용복 씨가 재배하는 주먹찰옥수수는 강원도 평창 진부면에서 오랫동안 재배해온 것으로, 자루가 짧고 뭉뚝한 편이다. 상앗빛을 띠며 찰기가 있고, 맛은 달착지근한 편. 검은색 같기도 하고, 보라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흑찰옥수수도 찰기가 있으며 옥수수자루 그대로 쪄서 먹는다. 낟알의 껍질이 얇고 부드럽게 씹힌다. 알곡이 쥐 이빨처럼 생긴 쥐이빨옥수수는 재래 종 옥수수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다. 주로 팝콘용이나 사료로 사용하며, 모양이 예뻐 근래 들어 화훼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 등이 있다. 얼룩덜룩한 무늬가 돋보이는 얼룩배기옥수수는 강원도 속초에서 오랫동안 재배해온 품종이다. 샛노란 메옥수수는 백색 옥수수 중 하나로 한 자루에 낟알이 4백 50개 이상 붙어 있다. 알도 매우 굵다. 강원도의 명물인 올챙이국수가 바로 메옥수수를 불려 만든 것으로 찰기가 거의 없어 뚝뚝 끊어지는 면발 모양이 올챙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옥수수는 영양 성분도 풍부하다. 씨눈은 단맛이 있고, 독성이 없어 막힌 혈을 풀어준다. 옥수수 뿌리와 잎은 이뇨 작용이 뛰어나 끓여서 주로 먹는다. 뿌리부터 잎, 열매까지 버릴 게 하나 없는 옥수수는 보릿고개 넘긴 이들의 허기를 달래준 그저 그런 음식이 아니라, 정말로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니었을까. 밤낮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뜨거웠던 여름도 한풀 꺾일 모양이다. 옥수수만큼이나 달콤한 단비 소식에 주먹찰옥수수가 잘 크겠다고 말하는 농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퍼진다.


입말한식가 하미현이 전하는 옥수수 맛

주먹찰옥수수 당도가 높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쪄서 먹거나 죽, 수프, 버터구이로 적합하다.
흑찰옥수수 낟알에 단맛과 고소한 맛이 꽉 차 있고, 끝 맛에 옥수수 특유의 풍미가 우러난다. 옥수수통구이나 젤라토로 추천한다.
얼룩배기옥수수 찰기가 있고 낟알이 단단하다. 식어도 굳지 않고 식감이 부드럽다. 옥수수감자 샐러드나 옥수수범벅으로 먹는다.
쥐이빨옥수수 메옥수수의 일종으로 길이가 짧고, 낟알이 매우 작다. 튀김용으로 적합해 팝콘으로 먹으면 맛있다.
메옥수수 물에 불리면 양이 많아지고, 전분이 많아 주식대용으로 먹는다. 끝이 동글동글하며 단맛보다 고소한 맛이 진하다. 밥이나 술, 국수로 만든다.


기획과 취재를 함께 한 입말한식가 하미현은 사라져가는 토종 식재료와 이를 재배하는 농부를 발굴하고, 입말로 전해지는 음식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내림 음식의 원형을 ‘과거의 맛’으로 재현하고 , 현대에 맞는 레시피를 개발해 ‘지금의 맛’으로 풀어낸다.




글 김혜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참고 도서 <한국토종자원작물도감>(이유), <토종 농사는 이렇게>(그물코)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