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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겨울을 이겨내고 얻은 황금빛 속살 황태
쉬이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드넓은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존재할까. 그중 이름을 얻은 것은 또 얼마나 될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바닷속 생명 중에 꽤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명태다. 얼리고 말리며 동태, 북어, 황태, 코다리 등으로 부르는데 황태를 으뜸으로 친다. 산골짜기에서 겨울을 보내며 맛도 영양도 깊어지기 때문. 여전히 겨울 한복판인 용대리에서는 명태가 바람에 부대끼며 노르스름한 속살로 변모 중이다.

황태마을로 잘 알려진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45년 전 이곳에 황태덕장을 시작한 라종호 회장과 황태세상의 황태로 김치를 담가 선보인 이하연 김치 명인.
반백 년을 목전에 둔 용대리 황태
지난 연말, 해물섞박지로 식품 명인 58호(농림축산식품부)에 선정된 봉우리 한정식의 이하연 대표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아침 직접 장을 보며, 웬만한 식재료는 제일가는 산지의 것을 공수하고, 김치만큼은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담근다는 것. 좋은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다니는 이하연 명인은 꼼꼼히 따져 고른 거래처와 십수 년간 연을 맺기에 어디 하나 메모해둔 것도 아닌데 수십여 곳의 산지와 생산자의 이름까지 줄줄 꿴다. 그런 그가 얼마 전 ‘기가 막히게 좋은’ 황태를 발견했다고 한다. “지난해 한 명절 상품전에 참여했다가 ‘황태세상’의 황태를 알게 되었는데, 맛이 정말 제대로더라고요. 맞은편 부스였는데 그쪽은 내 김치 맛에 반하고 나는 황태 맛에 반한 거예요. 그날 바로 황태를 잔뜩 사서 김치를 담갔어요. 김치를 망치면 한 해 농사를 잘못 지은 것과 다름 없어서 장도 젓갈도 모두 내가 만들어 쓸 정도인데, 그냥 한번 먹어보고 바로 김치에 넣었으니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그랬겠어요. 황태는 잘못 고르면 김치에 쿰쿰한 냄새가 나는데, 새로 담근 김치 맛을 보니 황태를 정말 잘 골랐구나 싶더라고요.” 봉우리 한정식에 황태 메뉴까지 선보일 정도로 이하연 명인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은 황태는 황태마을로 유명한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의 덕장에서 겨울을 난 것이다. 딱딱한 북어와 포슬포슬 부드러운 황태는 말린 곳이 달라 이름이 다른 것이니 결국 다시 생각하면 좋은 황태를 결정짓는 제일가는 조건은 기온, 바람, 습도 등 자연임을 알 수 있다.

황태를 언제부터 먹었는지에 대해 따로 자료는 전해지지 않지만 풍문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함경도에서 만들어 먹었다는 설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강원도 근처에 정착하며 함경도와 날씨가 비슷한 진부령이나 대관령 일대에서 황태를 말리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황태세상의 창업주 라종호 회장 역시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전쟁 후 남쪽에 터전을 잡으며 고향이 비슷한 이들과 함께 황태를 만들어 먹었다. “처음부터 황태로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 고향에선 흔하게 먹던 거니까 한번 해보자 한 것인데, 날씨도 엄청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데다 3월 즈음부터는 골짜기에서 바람까지 터지니 여기가 정말 하늘이 내린 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덕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찾는 사람에게 조금씩 팔고 하다가 사업자 등록을 낸 게 45년 전이지.” 

고향을 떠난 후로만 따져도 황태와 함께한 세월이 50년이 넘는 라종호 회장은 지금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딸이 가업을 이어간다. 형제덕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지금은 황태세상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전국 각지의 소비자를 만나고, 용대리에 황태 요리 전문점도 운영한다.

1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태세상을 운영하는 라정수 이사. 널어둔 황태끼리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매일 둘러보며 황태를 살핀다. 
2 황태는 기계로 작업할 수 없어 사람 손으로 일일이 뼈를 제거하고 결대로 찢어 황태채와 포를 만든다.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 눈이 만드는 최고의 황태
동해 바다에서 흔히 잡히던 명태가 자취를 감춘 지 벌써 20년도 넘었다. 동해에서 흔히 잡힐 때는 잡은 즉시 얼려 내장을 빼고 덕장에 걸었는데, 이제는 한 해 잡히는 수가 십수 마리에 불과하다. 주문진에 있는 수산물관리원 등 정부에서는 명태 양식 사업을 준비 중이지만 현재 보유한 명태도 세 마리에 불과하단다. 한 마리에 50만 원씩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라니 그야말로 명태씨가 말랐다. 요즘은 러시아와 일본 해역이 명태의 주 어획원. 일본 원전 방사능 문제로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도 황태에는 별다른 여파가 미치지 않는 건 일본산 명태는 식감이 부드러워 생태로 먹을 뿐 말리면 모양이 나지 않아 황태로 가공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태세상은 러시아에서 잡히는 명태만 사용하는데, 명태를 잡자마자 배에서 얼려 부산 앞바다로 들어오면 냉동 상태 그대로 거진이나 고성의 할복장으로 옮긴다. 명태의 배를 갈라 알과 내장을 빼낸 뒤 냉동차에 실어 용대리로 옮겨 덕장에 내건다. “이곳은 설악산 근처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보니 할복장을 지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동ㆍ냉장 시스템이 필수지요. 한해 처리하는 물량이 워낙 많아 운송과 저장을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용대리는 오염되지 않은 청정 자연이라 깨끗하게 황태를 말릴 수 있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명태를 확보하는 12월이면 부산, 거진, 고성, 인제 등을 오가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라종호 회장의 딸 라정수 이사는 수백만 마리의 황태 품질을 관리하고 황태 요리 전문점의 메뉴를 개발하고, 식재료 관리도 책임진다.
내장이 조금이라도 남은 상태로 널어 말리면 속살이 노르스름해지지 않고 울긋불긋해지므로 깨끗하게 작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업이 끝났다고 바로 덕장에 내걸 수는 없다. 날이 따뜻하면 수분과 함께 육질의 양분이 빠져나가 쭈글쭈글 모양도 예쁘지 않고 제맛도 나지 않기 때문에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면 그제서야 내건다. 낮에 햇볕이 내리쬐면 살짝 녹았다가 밤에는 다시 꽝꽝 얼기를 꾸준히 반복하고, 눈을 맞아 속살이 풀어지고 다시 단단해지며 포슬포슬 부드러운 육질이 만들어진다. 특히 이른 봄이면 골짜기에 바람이 터져 두툼한 속까지 고르게 마른다. 해마다 날씨가 달라 짧게는 2주, 길게는 한달까지도 차이가 나는데, 올해는 3월 말까지는 내걸어야 할 것 같단다. “다 마른다고 끝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숙성을 거쳐야 황태 맛이 고소해집니다. 중국산 황태도 러시아 인근 바다에서 잡은 명태로 말리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과 품질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이 숙성의 차이인 것이지요. 다 마른 황태는 설악산 지하수 물을 끌어다 적셔서 뼈를 발라내고 편편하게 모양을 잡은 뒤 햇볕에 말립니다. 중국의 황태 작업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건조기에 넣어 말리거나 난롯불을 사용하더라고요. 여기에서 맛과 품질의 차이가 나는 겁니다.”

작업이 끝난 황태는 구이용, 찜용, 황태채로 선별해 판매 상품으로 만든다. 예전에는 말리는 과정에서 부서지거나 모양이 고르지 않은 것을 모아 채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대부분 먹기 좋게 채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기에 좋은 품질의 황태로 채를 만든다. 대여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황태가 완성되는데, 이 중 편편하게 펼치기 위해 두드리는 작업만 기계의 힘을 빌린다.

3 열처리를 한 번 거친 뒤 1주일~20일을 말리면 붉은빛이 도는 코다리가 되고, 산골짜기에서 모진 바람을 맞으며 4개월을 말리면 황금빛 속살의 황태가 된다. 
4 이하연 명인이 담근 황태백김치와 황태포기김치. 배추에 황태를 켜켜이 넣고 황태 가루를 소와 함께 버무린다.

맛과 영양을 다 잡은 황태
명태를 황태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건 우리 바다에서 흔한 생선이었고, 겨울에만 잡히기 때문에 1년 내내 두고 먹을 방법을 모색하기 위함이었을 터. 한데 놀라운 건 명태가 황태로 변하면서 영양이 더욱 풍부해진다는 점이다. 단백질 함유량은 56%에 달하며 지방은 단 2%에 불과하고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한 고단백ㆍ저지방 식품으로, 해독 작용이 뛰어나 숙취나 피로 해소는 물론 중금속 해독에도 효과가 좋다. 그뿐 아니라 맛도 일품이다. 맛이 고소해 그대로 구워 먹거나 국으로 끓여도 좋지만, 감칠맛이 뛰어나 장을 담글 때 장독에 꼭 들어가는 필수 재료다.

용대리 황태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메뉴를 직접 만든 라정수 이사는 우리가 흔히 먹는 황탯국과는 전혀 다른 레시피를 선보인다. 오로지 황태로만 맛을 내고, 황태 고유의 맛을 즐기고자 한다면 한번 시도해보아도 좋겠다. 감초 물에 아주 살짝 데친 황태채를 냄비에 물과 들기름을 넣어 푹 끓인 뒤 소금으로 간하면 완성이다. 무가 맛있는 겨울철엔 무를 얇게 채 썰어 제일 마지막에 넣어 시원한 맛을 더해도 좋다. 마늘은 황탯국의 시원한 맛을 반감시키므로, 꼭 넣고 싶다면 편으로 썰어 소량만 사용한다. 이렇게 끓인 황탯국은 사골 육수처럼 뽀얀 색을 띤다. 이하연 명인은 황대 대가리로 육수를 내 물김치를 담글 때 활용하는데, 이곳의 황태로 육수를 내보니 색도 좋고 맛도 진해 설에는 그 국물에 끓인 떡국을 대접했다고. “황태를 곱게 빻아 황태 가루를 만들어두면 천연 조미료로도 그만입니다. 김치 담글 때 보통 멸치 가루를 많이 넣는데, 이번에는 소를 버무릴 때 황태 가루를 함께 넣었어요. 김치에서 깊은 감칠맛을 느끼게 해주거든요. 황태채를 한 입 크기로 썰어 소로 만들어 배추에 켜켜이 넣으면 익으면서 김치도 맛있어지고 쫀득하게 씹히는 황태도 별미예요. 열흘쯤 두었다 먹으면 황태 속까지 김치 맛이 배어 황태만 골라내면 반찬으로도 훌륭하지요.”

알맞은 날씨가 되기를 기다리고, 눈이 내린 뒤엔 서로 들러붙은 황태를 매일같이 떼어 가지런히 펼치고, 바람이 불어 단단히 마를 때까지 보살피며, 기계가 들어설 자리 없이 수백만 마리를 손으로 매만져 황태를 일군 라종호 회장과 그런 살뜰한 아버지의 황태를 보고 자란 라정수 이사. 그는 “아버지가 하시던 일” 이라 더욱 잘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흰 살결이 황금빛 자태를 뽐내는 건 팔 할이 자연의 힘이라면, 나머지는 인간의 기다림과 바지런함일 것이다.

 요리 이하연 취재 협조 황태세상(033-462-7889)

글 박유주 기자 | 사진 김동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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