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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건축가 페터 페치Peter Vetsch의 현대판 고성 디즈니랜드 성 닮은 집에서 세상 사람들의 꿈을 대신 꾸다
한국에서 꽤 이름난 건물을 설계한 사람에게 물었다. 직접 본인의 집을 짓는다면 어떤 집이 좋겠냐고. “내 살기 가장 편한 집이죠.” 마치 우문을 탓하는 것처럼 툭 내던지는 대답이다. “1백 평 되는 고급 맨션도 내가 편하지 않으면 한 평 감옥이 되고, 허름한 초가삼간도 내 살기 편하면 아흔아홉 칸 대궐이 되는 겁니다.” 그의 말처럼 집은 가장 주관적인 공간이다. 그런데도 가끔 남을 의식하면서 집을 짓거나 보여주기 위해 꾸미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이 진정 ‘내 살기 가장 편한 ’ , 자유로운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그리 보자면 스위스의 환경 건축가 페터 페치Peter Vetsch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관적인 공간을 만든 사람 이다.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성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은 듯한 곳이 바로 그의 집이다.

환경 건축가, 꿈을 위한 공간을 만들다
취리히 시내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디티콘Dietikon은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탓에 간판을 내건 호텔 하나 찾아보기 힘든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이 조용한 마을에 세계인의 이목을 끄는 유일한 명소가 있다. 바로 건축가 페터 페치의 집. 건축가가 사는 집이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설계나 세련된 디자인을 기대해도 좋으련만, 어찌된 것인지 그의 집은 뾰족한 첨탑들이 솟아오른 옛날의 성 모습이다. 아무리 보아도 디즈니랜드 입구에 있는 바로 그 성을 참 많이 닮았다. ‘언더그라운드 하우스underground house’, ‘동굴 집cave house’이라는 환경 건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건축가가 어찌 이리 ‘유치한’ 발상을 했을까 싶은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어때요? 내 집 멋지죠? 취리히와 디티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현대식 성입니다.” 마치 피터팬처럼 성의 계단을 단숨에 오르내리는 페터는 예순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년처럼 흥분되어 있다.

“21세기에 중세시대 성을 카피한다는 게 우스워 보이죠? 꼭 디즈니랜드 같죠?”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지, 페터는 금세 상대의 마음을 읽어낸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이죠. 도대체, 왜 하필 성이냐고요? 하지만, 왜 성이면 안 되나요? 제 성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건 바로 우리들의 꿈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사는 이 성은 세상 사람들이 이루고픈 꿈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이 같지만, 디티콘의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높은 집, 나의 판타지를 성으로 지은 겁니다.”

페터의 어린 시절 꿈은 지금의 모습에서 연상할 수 없는 농부였다. 그래서 농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농업학교가 자신의 생각처럼 자연을 지키고 돌보는 일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았다. 그 후 순수미술을 배우기 위해 독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유명한 예술가 요셉 보이스와 건축가 한스 홀레인에게 사사를 했다. 졸업 후 건축 설계 사무실에서 실무를 시작한 지 40년, 줄곧 건축가의 길을 걸어왔다.

“그거 아세요? 독일어로 ‘농부bauer’와 건물을 ‘짓는다bauen’는 말은 같은 어근인 buan에서 시작되었어요. 자연을 일구고 돌보는 사람, 집을 짓고 돌보는 사람, 모두 같은 맥락이죠.”

페터에게 건축은 꿈이었고, 다행히 그는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동굴처럼 만든 에코 하우스로 세계적인 환경 건축가가 된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지은 언더그라운드 하우스에서 16년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현대인이 잊고 살아가는 꿈을 되찾아주고 싶었단다. 유치하다는 혹평을 감내하면서까지 세상에서 가장 주관적인 그만의 공간, 꿈을 상징하는 성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페터의 설명을 듣고 나니 외관을 보자마자 실망했던 마음이 슬쩍 미안해진다.

1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주인 부부는 1층 거실에 긴 식탁을 놓아 미팅 룸을 마련했다 . 이곳은 벽난로에 불을 피우면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따뜻해지는 온돌이 깔려 있어 겨울에도 따뜻하다.
2 환경 건축가로 명성이 높은 페터 페치.
3 부인이 아끼는 소파와 이 소파에 어울리도록 그린 부인의 그림.
4 지하 주차장을 통해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 끝에는 화가인 부인이 손님들을 반기는 그림을 놓아두었다.
5 언더그라운드 하우스를 설계하고 있는 페터가 주재료로 사용하는 철재를 이용해 일본인 디자이너가 만든 의자와 부인의 그림이 걸려 있는 거실 코너.
6 아틀리에에는 전시에 출품했던 설치 작품들이 놓여 있다.


삶터와 일터가 조화를 이룬 무릉도원
상징적인 의미의 외관과는 달리 성의 내부는 또 다른 세상이다. 화가인 부인이 꾸몄다는 내부는 이곳이 고전적인 성이라는 생각을 잠시 접게 할 정도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실내는 모두 흰색 테라코타로 마감되었고, 지하와 지상 3층으로 이뤄져 있다. 지하에는 페터의 건축 설계 사무실과 주차장이 자리한다. 1층은 나선형 계단을 중심으로 벽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 그리고 긴 식탁과 아메리칸 스타일의 키친이 있는 리빙 룸으로 구분된다.

“개인적으로 우리 부부는 프랑스 앤티크 가구를 좋아해요. 집 꾸밈에 한창일 때 프랑스 남부에 있는 오래된 성을 허문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늦었더군요. 이미 고풍스러운 가구는 모두 다 팔린 뒤였고, 남은 게 바로 이 벽난로뿐이었어요. 다행히 벽난로가 너무 멋있었고, 이를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18세기 벽난로가 21세기 성에서 다시 태어난 거죠.”

벽난로는 특별히 그가 아끼는 ‘공간’이다. 자칫 모델 하우스처럼 보일 수 있는 맑고 깨끗한 페터의 성에 유일하게 세월의 흔적과 온기를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마치 성공적으로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친 의사라도 되는 듯 어찌나 벽난로에 애착을 갖는지 그의 부인도 질투할 정도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에는 부부의 침실과 서재, 트레이닝 룸, 욕실이 있는데 그중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로 욕실이다. 작은 욕조의 맞은편에는 마치 로마시대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둥근 욕조와 이를 따라 세워진 둥근 벽을 볼 수 있다. 처음엔 가족이 사용하는 목욕탕으로 시공을 했지만 아이들이 저마다 일을 찾아 집을 떠나게 되면서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욕조에 맞는 커다란 매트리스를 제작해 끼워 넣고 둥근 벽을 따라 책을 놓아두니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멋진 서재로 변신했다.

“우리 부부가 가장 아끼는 곳이에요. 이곳의 매력은 밤에 나타나요. 원형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밤이면 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하늘과 별을 지붕삼아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아요. 침실보다는 여기서 아침을 맞는 날이 더 많죠.”

욕조에 가득 찬 물 대신 부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욕실. 발길을 돌려 욕실 곁의 나선형 계단에 오르니 이 성의 꼭대기 층에 있는 첨탑방에 다다른다. 화가인 아내의 작업실이자, 그가 운영하는 미술 교실 강좌가 열리는 곳이다. 페터의 말을 빌리자면 미술 강좌라기보다는 ‘부인들의 수다 교실’이 열리는 이곳에서는, 마치 알록달록한 양탄자처럼 펼쳐진 취리히 시내와 디티콘 마을, 그리고 그가 설계한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단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지하에서 첨탑 꼭대기까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연결된 페터의 성 내부는 가구를 최소화하면서 실내의 회벽을 강조하는 디자인으로, 마치 갤러리 같은 세련된 느낌을 전해준다.

알프스의 산자락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운좋은 건축가 페터 페치, 더 바람이 있다면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공간을 좀 더 만들 수 있길 바랄 뿐이라고 한다. 건축가 페터 페치가 세상 다른 이들이게 건네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그가 사는 집, 성에 담겨져 있다. ‘세상 사람들이 잊고 살아가는 꿈을 진짜 되찾아줄 수는 없지만, 나의 성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 묻어놓았던 꿈을 한번쯤 생각할 수 있다면….’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을 닮은 페터의 바람이다.

1 첨탑에 있는 부인의 아틀리에는 이 집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취리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 프랑스 앤티크 시장에서 구입한 시계는 과거 프랑스 귀족들이 사용하던 오리지널 앤티크라고 한다. 너무나 정갈한 실내에 낡은 듯 우아한 시계가 더해지니 편안한 느낌이 든다.
3 늘 넘치는 손님을 위해 마련한 긴 식탁 위에 그와 어울리는 긴 형태의 조명등을 조화시켰다.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접이식 조명등은 이곳을 감각적으로 연출해주는 일등 공신.
4 지하 주차장에서 성의 첨탑까지 하나로 연결된 나선형 계단에는 화가인 부인이 직접 할로겐 조명과 장식물을 제작, 설치해두었다.
5 자신이 지은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단지가 보이는 정원에는 잔잔한 연못이 유유히 자리하고 있다. 작품과 풍광이 어우러진 최고의 공간. 
6 실제로 프랑스 고성에서 사용했던 앤티크 화로. 연료를 넣는 문이 쇠가 아닌 유리로 제작된 점이 눈길을 끈다. 
7 지하에 마련된 페터의 건축 사무실. 지하지만 밝은 햇살과 바람이 드나드는 쾌적한 곳이다.

김미영 nouvim@naver.com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