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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마음 맑은 우리 꽃차 바라만 보기엔 아까운 꽃, 차로 피어나다
찻주전자에 마른 꽃 한 송이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순식간에 꽃잎이 활짝 벌어지며 꽃 향이 피어나고 맑은 꽃 색 찻물이 우러난다. 오감으로 즐기는 꽃차는 우리 몸과 마음에 평온을 준다. 그 어느 계절의 꽃보다도 자태가 눈부시고 황홀한 봄꽃. 그래서 봄은 꽃차를 즐기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집 앞뜰에 새로 올라온 들꽃을 따고 있는 꽃차 전문가 송희자 씨.


들꽃이 가져다준 새로운 인생
지난 4월 초,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작은 시화詩畵전에서 꽃차 전문가 송희자 씨를 만났다. 20년째 꽃차를 연구하는 그가 그동안 써온 시를 선보인 자리였다. “시도 쓰시는 줄 몰랐다”하고 말을 꺼내자, 그는 올해 수확한 목련이라며 여리디여린 연둣빛 목련차 한 잔을 내게 건넸고, 담양에는 목련이 예쁘게 피고 있다고 했다.“20년간 아름다운 꽃을 곁에 두고 살다 보니 시가 남았다”는 송희자 씨는 전남 담양 백양사 근처에서 찻집 ‘머루랑다래랑’을 운영한다.

서울 토박이인 송희자 씨는 1993년 시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담양에 정착했다. 남편에게는 정겨운 옛집으로 귀향하는 일이었겠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는 시골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소일거리라고는 산책이 전부이던 시절, 어느 날 뒷산에 핀 들꽃 한 송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그 꽃 이름도 몰랐어요. 이렇게 예쁜 꽃이 있었는데, 왜 이제야 보 였나 싶었죠. 그렇게 한번 꽃이 눈에 들어오더니 이후엔 눈에 꽃만 보였어요. 꽃 이름이 알고 싶어서 책을 뒤지기 시작했고요.”20년 전만 해도 꽃차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약초와 우리 차를 주제로 한 책에 몇몇 가지가 소개된 것이 전부였는데, 오히려 <동의보감> 등의 의학 서적을 뒤적거리다 보니 꽃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선조들은 꽃을 약재로 썼으니, 차로도 즐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때부터 꽃차를 연구하기 시작해 이제 그가 만드는 꽃차는 1백50가지에 이르고, 여기에 열매와 잎차까지 더하면 2백 가지가 훌쩍 넘는다. 꽃의 고운 빛깔을 잡아둘 방법을 찾아 집 주변에 핀 꽃을 따서 말려도 보고 덖고 쪄보기도 하고 꿀에 재워도 보며 하나씩 터득해가는 일이 즐거워 일일이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다 보니 어느새 수십이 되고 백이 넘더라는 송희자 씨는 꽃차에 관한 책도 두 권이나 펴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 둘씩 모은 꽃차를 소개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찻집 ‘머루랑다래랑’을 열었다. 이곳은 담양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어 초창기에는 꽃차를 맛보기 위해 부러 찾아오는 이보다는 지나는 길에 우연히 들르는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식당인 줄 알고 들어오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러다 꽃차를 판다고 하면 다들 뭘 마셔야 할지 고르지를 못하더라고요. 꽃이라고 하면 화장품 냄새가 날 것 같다며 더러 꺼리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러다 한 잔 마시고 나면 꽃차의 매력에 반해서 꽃차를 사 가곤 했어요.”하나 둘씩 꽃차를 찾는 이가 늘어나자 송희자 씨는 꽃차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요즘에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그가 만든 ‘마음 맑은 우리 꽃차’를 구입할 수 있다. 물론 1백 가지가 넘는 꽃차를 모두 판매하지는 않는다. 포장 비용이나 인건비 등을 고려해 32가지 꽃차, 20여 종의 잎차와 농축액 등을 시판 중이다. 한 해 판매용으로 생산하는 꽃차는 종류별로 적게는 300kg에서 많게는 1톤에 이른다. 이들은 전국에 계약 재배하는 50여 곳의 꽃 농장에서 수확해 생화 그대로 이곳으로 옮겨와 꽃차로 다시 태어난다.


1 아침 일찍 뒤뜰에서 따온 진달래. 대부분의 꽃은 새벽에 따야 그 향과 맛이 가장 뛰어나다. 진달래는 열을 가하면 고운 빛깔을 잃으니 생으로 샐러드나 화전 등에을 만들어 먹기도 하며, 그늘에서 말려 차로 마신다.
2 목련은 흐르는 물에 뒤집어 씻은 뒤 3~4일 말리면 차로 즐길 수 있다. 말린 목련을 포장할 때 손으로 집으면 체온으로 인해 상하기 쉬우니 핀셋을 사용한다.
3 꽃차 전문가 송희자 씨가 추천하는 여덟 가지 봄꽃차. 봄에 피는 꽃은 대체로 꽃잎이 얇아 그대로 말려 차로 즐기며, 꽃잎이 두껍거나 꽃술에 꿀이 많은 꽃은 진딧물과 곤충의 알 등이 남아 있을 수 있어 그늘에서 말린 뒤, 수증기로 살짝 쪄서 사용한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팬지, 매화, 목련, 도화, 찔레꽃, 홍화, 백화, 아카시아.


꽃도 사람처럼 저마다 성질이 다르다
송희자 씨는 꽃은 사람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겉만 보고는 알기 어렵고, 보기에 예쁘다고 모든 꽃을 차로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듯 꽃도 저마다 성질이 다 다르니 가공법도 제각각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름을 알고 싶고 성격도 궁금해지잖아요. 꽃도 마찬가지예요. 먼저 이름을 알고 나면 주의 깊게 살펴요. 아침에 피는지, 밤에 피는지, 잎은 어떻게 생겼는지 찬찬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자연히 이 꽃을 어떻게 가공해야 하는지 알 수 있어요.”

꽃잎이 얇은 봄꽃은 대체로 말려서 차로 즐긴다. 단, 잎이 두꺼운 차는 말린 뒤 수증기로 살짝 찌거나 덖기도 한다. 요즘 한창 작업 중인 목련은 말리는 과정이 꽤 까다롭다. 마르면서 금세 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목련의 고운 빛깔을 유지하려면 정확한 온도와 습도를 맞춰야 한다. 꽃차의 재료는 갓 피기 시작한 꽃이다. 꽃봉오리 사이로 숨구멍이 살짝 열린 것이 가장 향을 많이 머금고 있으며 맛도 뛰어나다. “봉오리를 그대로 말리면 꽃이 제대로 피지 못해 생명력을 잃어요.

손가락을 넣어 꽃잎을 부드럽게 벌려 숨구멍을 만들어준 다음 밑부분을 위로 세워 말려야 해요.” 수년간 해오며 터득한 그만의 요령이다. 목련을 말리는 송희자 씨의 집 뒷마당에 목련이 만발해 이미 고운 빛을 잃고 있었다. 어제 서리를 맞아 갈변했단다. 아직 다 따지도 못했는데 색이 변해버려 손해가 크겠다 하니, 올해 목련은 이미 다 수확한 것이라고 한다. 나무에 핀꽃을 전부 다 따버리면 나무가 생명력을 잃기 때문에 한 나무에서 많아야 3분의 1 정도만 따고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욕심이 과하면 나무한 그루를 잃는다니, 눈앞에 찬란하게 핀 꽃을 두고도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것이다.

목련은 손질 과정에서도 색이 변해 상품 가치를 잃는 양이꽤 되는데, 갈변한 목련은 물에 적신 깨끗한 면포에 싸서 밥솥에 넣고 여섯 시간 정도 발효시켜 발효차로 즐긴다. 가끔은 코냑 같은 술을 넣어 만들기도 하는데, 코냑의 향이 더해진 발효 목련차도 풍미가 상당히 독특하다. 아껴두었다 찻집을 찾는 단골들에게 인심 좋게 내주기도 하고, 꽃차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나눠 마시기도 한다. 이른 봄부터 초여름까지 팬지와 목련, 매화, 도화(복숭아꽃), 아카시아, 홍화, 찔레꽃이 차례로 피는데, 이들 모두 송희자 씨가 판매하는 꽃차의 주력 상품이다. 그중에서 찔레ㆍ아카시아ㆍ목련은 이곳 담양에서 수확하고, 팬지는 예산에서, 홍화는 광주에서, 대부분의 매화는 순창에서 수확한다.

꽃이 피는 시기는 매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집 앞 7백여 평의 땅에 여러 종의 꽃나무를 조금씩 심어두고, 싹이 움트기 시작하면 꽃 수확 작업을 계획한다. 꽃의 향과 맛을 최대한 보존하려면 수확한 후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한창 수확할 때는 늘 새벽에야 잠자리에 든다. 꽃을 따는 시간도 꽃차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대부분 꽃은 밤부터 새벽까지가 따기 좋은 시간. 식물이 활발히 활동하는 낮에 따면 꽃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스스로 열을 발산해 확 피기 때문에 쓸 수 없게 된다.

달맞이 꽃처럼 밤에 피는 꽃은 이슬이 걷히기 전, 일반적으로는 오전 10시 이전에 따는 것이 가장 좋다. 단, 칡꽃처럼 한낮에 따는 꽃도 있다. 겨울에 피는 꽃도 있으니 송희자 씨의 꽃차 작업은 1년 내내 쉼 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은 겨울에는 1백 가지 꽃을 혼합해 백화차를 만든다. 1백 가지 꽃을 일일이 모아 꽃마다 다른 방법으로 손질해 그만의 비율로 블렌딩해 선보이는 이 차가 바로 송희자 씨를 대표하는 꽃차다. 겨울의 동백, 봄의 수선화ㆍ매화ㆍ벚꽃ㆍ개나리, 여름의 홍화ㆍ수국ㆍ아카시아ㆍ장미, 가을에 피는 국화와 구철초 등을 일정한 비율로 혼합해 6개월간 숙성시킨다니 이 레시피를 완성하는 데도 수년이 걸렸다.

얼마 전 5차분의 백화차가 완성되어 판매를 시작했다.“백화차는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 단백질을 함유해 꾸준히 마시면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됩니다. 이 차가 재미난 건, 마시는 사람마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꽃 향을 느낀다는 사실이지요. 같은 차를 마시면서도 저마다 다른 향을 느낀다니 참 매력적이지 않나요?”


1 찻집 입구에 장식해둔 말린 꽃잎들. 연보랏빛 현호색과 연분홍 홍겹매, 겨울에 피는 동백, 클레마티스. 송희자 씨는 색이 변하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아 상품성이 떨어지는 꽃잎이라도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2 팬지는 그늘에 말린 뒤, 한 시간 정도 강한 햇볕에 내어 다시 한 번 말린 다음 수증기로 가볍게 찐다.
3 ‘마음 맑은 우리 꽃차’를 대표하는 백화차. 사계절에 피는 꽃 1백 가지를 일일이 말려 일정 비율로 섞어 6개월간 숙성시켜야 맛볼 수 있다.
4 반죽에 국화꽃을 얹어 만든 국화꽃찐빵.
5 땅콩 소스에 버무린 원추리꽃무침과 봄꽃 샐러드.
6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진달래, 갓꽃, 제비꽃 화전.
7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 중인 꽃차.


꽃을 향유하는 문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차를 마신다고 하면 딱딱한 격식과 예법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송희자 씨는 꽃차만큼은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수시로 편하게 마시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단, 꽃을 띄울 때 손이 닿으면 꽃이 상하기 쉬우므로 핀셋이나 젓가락을 이용해야 한다는 팁만 기억하자. 꽃차는 향으로 먼저 마시고 맛으로 또 한 번 마시지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바로 찻잔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꽃을 감상하는 일이니 투명한 유리 재질의 다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10분 이상 끓인 물을 바로 부어 40초~1분 이내로 우려마시는데 꽃을 많이 넣으면 쓴맛이 나고, 지나치게 오래 우리면 역한 향이 올라온다. 말린 꽃은 매우 가볍기 때문에 꽃이 제 모습대로 피어오르게 하려면 물을 부을 때 찻잔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따르는 것이 방법이다. 꽃차는 처음의 물을 따라 버리고 두 번째 우린 찻물부터 마신다. 세번에서 다섯 번까지 우려 마실 수 있다. 우릴 때마다 향과 맛이 조금씩 다르니 이것도 꽃차의 묘미다. 그의 집에서 장을 보러 나가려면 차로 20분 넘게 달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집 앞ㆍ뒤뜰에서 자라는 꽃과 채소가 그의 밥상에도 오른다. “여기가 전부 제 슈퍼마켓이에요”라는 그의 말대로 요즘에는 밀전병을 부쳐 진달래를 올리고, 원추리꽃과 나물을 데치고, 꽃으로 버무린 샐러드면 한 끼식탁이 완성된다. 늘 꽃이 오르는 그의 식탁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꽃도 하나의 식품’이다. 송희자 씨는 이 같은 사실을 널리 알리고, 먹거리나 비누 등 꽃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다음 목표다. 꽃차 만드는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가 농촌진흥청, 서울여자대학교 등에서 꽃차창업마이스터 과정을 개설해 꽃차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

꽃은 땅에 피어서도 찻잔에 피어나도, 접시 위에 자리해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꽃만 보고 살았더니 속상한 일도, 화나는 일도 없다는 송희자 씨는 꽃차를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부지런히 꽃을 매만진다.

글 박유주 기자 |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