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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호미곶의 해풍시금치 겨울 바닷바람이 키운 달달한 맛
한반도의 동쪽 끝,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 호미곶이다. 남들은 겨울철을 농한기라고 하지만 호미곶만은 이때가 가장 바쁘다. 해돋이를 보러 온 손님 맞아야지, 과메기 말려야지, 무엇보다 노지에서 자란 시금치를 출하해야 한다. 그 이름도 당당한 ‘호미곶해풍시금치’ 수확하는 날.


언 땅 위에서 겨울 바닷바람 맞고 자란 시금치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은 영일만 옆으로 불쑥 튀어나온 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는 의미가 담긴 ‘호미’에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부리 모양의 육지를 뜻하는 ‘곶’이 붙어서 생긴 지명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 새해 첫날이면 전국에서 일출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댄다. 호미곶에서 나고 자란 호미곶해풍시금치작목반의 김기홍 대표는 오십 줄을 넘어선 지 꽤 되었지만 평생 동안 딱 두 번 눈을 봤다고 한다. 그만큼 호미곶은 강수량이 적고 겨울철에도 최저 기온이 영하 5℃안팎으로 기온이 높다.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온 지형과 따뜻한 기후는 이곳 호미곶에 일출 말고도 또 다른 겨울 풍경을 만들어냈다. 겨울철 노지에서 시금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모래밭,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 풍부한 일조량이 필요한데, 호미곶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겨울철에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져 밤새 땅이 얼었다가도 낮이면 바로 풀려버려요. 땅이 얼었다 풀렸다 반복해야 시금치 향이 좋고 맛이 답니다. 바로 앞에 있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해풍을 맞다 보니 맛이 더 깊어지
지요. 산 주변에는 그늘이 많지만 바다 근처의 땅은 주변에 나무가 없어 그늘이 지지 않아요. 그래서 낮 동안 햇볕도 충분히 쬘 수 있습니다. 이러니 다른 지역에 비해 우리 시금치가 맛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노지에서 겨울을 고스란히 견디면서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는 이 얄궂은 도돌이표가 이곳에서 나는 시금치를 특별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겨울 바닷바람에 단련돼야 비로소 제맛을 내는 과메기와 다르지 않다.

제철인 겨울에 먹어야 향과 맛이 진하다
시금치는 사철 나오긴 하지만 겨울이 제철이다. 겨울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강인하게 자란 덕에 달달한 제맛을 낸다. 사시사철 마트에서 시금치를 볼 수 있는 것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시금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종자가 달라서이기도 하다. 봄에 파종해서 여름에 먹는 시금치는 서양계 종이고 겨울 시금치는 동양계 종이다. 동양계 종은 이파리 끝이 뾰족하면서 깊이 파인 자국이 있으며 뿌리는 붉고 서양계 종에 비해 크기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동양계 종과 서양계 종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방법은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당도의 비밀도 이 붉은 뿌리에 있는데, 뿌리가 붉을수록 당도가 높다. 또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시금치는 뿌리가 짧고 깔끔한데 노지에서 재배하면 뿌리가 길게 뻗고 잎은 검은 녹색을 띤다.

겨울 시금치는 보통 9월 말에 파종을 시작해서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출하한다. 경북 포항의 ‘포항초’,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재배하는 ‘섬초’, 경남 남해에서 나는 ‘남해초’ 등이 대표적인 겨울 시금치다. 세 곳 모
두 바다가 가까이 있는 노지에서 자란다는 점이 비슷하다. 포항은 예로부터 시금치 재배지로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금치를 재배했는데, 현재 포항제철이 들어서 있는 백사장에도 시금치밭이 많았다고 한다. 시
금치에 지역 이름을 붙여서 브랜드화한 것은 1980년대 포항초가 시초였다. 포항초는 지역에 따라 곡강시금치, 구룡포시금치 등으로 나뉜다. 호미곶해풍시금치는 3년 전 호미곶의 대보리와 강사리 지역 주민들이 모여
작목반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회원이 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3년 동안 품질을 높이고 판로를 개척하면서 작목반 회원이 33명으로 늘어났다. 현재 호미곶의 시금치 농가 면적은 30헥타르 정도다.

김기홍 대표는 스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금치를 재배해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새벽마다 죽도시장으로 시금치를 팔러 가는 엄마를 도와야 했다. 그때는 시금치의 ‘시’ 자만 들어도 지겨웠다. 하지만 대를 이어 시금치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포항, 그중에서 호미곶만큼 시금치를 생산하기 좋은 환경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공장 단지가 없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 지역이다. 포항초의 원조 격인 곡강시금치 재배 단지가 산업 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이제 노지에서 시금치를 키울 수 있는 곳은 호미곶밖에 없다.

호미곶해풍시금치는 무농약 인증도 받았다. 조합원들을 설득해서 농약을 치지 않는 대신 잡초는 일일이 손으로 걷어내고 시금치가 자라기 시작할 때부터는 그냥 놔둔다. 다행히 겨울에 재배하기 때문에 해충이 별로없다. 호미곶해풍시금치는 동양계 종 시금치의 개량종이다. 처음에는 재래종을 했지만 요즘에는 주로 개량종을 심는다. 재래종은 재배 기간이 90일 정도지만 개량종은 40여 일 정도로 짧고 수확량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 시금치를 맛보면 하도 달아 설탕을 섞었냐고 합디다.” 결국 맛의 비결은 종자가 아니라 환경이다.

수확기 이용해 일손 줄이고 겨우내 두세 번 수확
밤새 언 땅이 풀리려면 오전 나절 햇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확은 주로 오후에 한다.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시금치밭은 작목반 김상국 부회장의 밭으로 며칠 전부터 수확에 들어가서 이미 한쪽 밭은 깨끗하다. 짙은 녹색의 시금치들은 바닥에 납작 붙어 있는데, 겨울 해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고육지책일 것이다. 수확은 ‘시금치 수확기’라는 기계를 이용한다. 벼를 베는 콤바인처럼 시금치 수확기가 땅속을 지나가면서 뿌리를 자른다. 원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고랑을 내놓으면 수확기가 지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 밭은 면적이 넓지 않아 따로 고랑을 내지 않았다. 먼저 수확기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을 만들기 위해 사람 손으로 시금치를 캐낸다. 땅이 풀려서인지 호미가 잘 들어간다.

“수확기를 사용하면서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요. 이제 수확하고 나면 다시 파종해서 겨울이 가기 전에 한번 더 수확해야지요. 호미곶은 겨울이 제일 바빠요.” 이발소를 운영하다가 시금치 농사에 재미를 붙인 김상국 부회장은 여유가 있는 반면, 김기홍 대표는 마음이 급하다. 수확보다는 시금치밭에 비닐을 덮는게 먼저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가뭄이 이어지는 등 기상 조건이 좋지 않다. 게다가 추위가 일찍 와서 시금치가 예년보다 늦게 자라기 때문에 온도를 높이기 위해 비닐을 씌우는 것이다. 비닐을 덮어두면 2~3℃ 정도 온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어 시금치가 빨리 자란다.

김 대표의 시금치밭은 바다 바로 앞에 있는데, 바다와 맞닿은 부분에 그물로 된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울타리는 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3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바닷바람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시금치 이파리에 멍이 들어요. 해풍시금치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비닐하우스 대신 그물 울타리를 설치하면 바람과 햇볕은 다 들어가면서 불필요한 바람은 막는 효과가 있어요.”

김기홍 대표는 3년 전 작목반을 결성하면서 결심한게 있다. 호미곶해풍시금치를 명품 시금치로 만들려면 먼저 기술 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물 울타리 외에 시금치 수확 기도 김 대표가 개발한 것으로, 인건비와 노동시간을 줄이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시금치를 수확하면 단으로 묶는 작업을 해야 한다. 칼로 뿌리를 자르고 손질해서 무게에 맞춰 한 단씩 묶는 것으로 보통 바닷바람을 피해 실내에서 작업한다. 작목반에 넘기기 전에 물에 한 번 세척하는데, 시금치는 찬물에 담갔다 건지면 다시 잎이 파릇파릇 되살아나며 4~5일은 거뜬히 신선도가 유지된다고 한다. 시금치는 주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백화점이나 친환경 꾸러미로도 납품된다. 다른 시금치보다 가격이 5백~1천 원 정도 비싼데, 한 단(300g)에 2천~2천5백 원 정도에 판매한다.


1 해풍시금치는 뿌리 부근이 빨갛고 이파리 끝이 뾰족하다.
2 김기홍 대표는 3년 전 무농약 인증을 받은 호미곶해풍시금치 브랜드를 만들었다.
3 호미곶해풍시금치는 11월부터 1월까지가 가장 맛있다.
4 호미곶 사람들은 시금치가 기본 반찬이다. 멸치국수에 시금치무침만 고명으로 올려 먹으면 별미.


시금치튀김이나 생으로 과메기와 함께 무치면 별미
시금치는 제철인 겨울에 먹어야 맛있다. 겨울 시금치 중에서도 11월부터 1월까지 수확하는 시금치는 설탕만큼 달다. 시금치는 채소 중에 비타민 A를 가장 많이 함유했다. 시금치 100g당 카로틴이 2500~6700㎍으로 녹색이 진할수록 영양가가 높다. 진한 녹색 채소는 암 발병률도 낮춰주는 것으로 보고됐다. 철분과 엽산 또한 풍부하다. 만화 영화 주인공 뽀빠이가 시금치만 먹으면 힘이 불끈 솟아 악당을 무찌르곤 했는데, 시금치에 들어있는 철분 덕분이다. 물론 독일의 과학자가 시금치의 영양 성분 중 철분의 함량을 표시할 때 소수점을 한 자릿수 뒤에 잘못 찍는 바람에 생긴 해프닝이었지만, 아이의 건강을 위한 엄마가 준비하는 식탁에는 여전히 시금치 반찬이 필수 조건이다.

호미곶에서는 시금치가 김치 못지않은 기본 반찬이다. 시금치무침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거뜬하게 비울 수 있고 온갖 음식에도 시금치를 넣어 먹는다. 시금치는 연한 부위만 골라 날것으로 먹거나 살짝 익혀 먹
는 것이 좋다. 시금치를 익힐 때는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살짝 데쳐 찬물에 빨리 헹구면 색이 선명하고 예쁘다. 너무 익히면 시금치가 힘없이 늘어지고 영양분이 파괴된다. 익힐 때는 뚜껑을 열어놓아야 색깔이 선명하다. 시금치무침은 어느 지역이나 똑같다. 데친 시금치에 소금,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무치면 된다. 물을 끓이다가 시금치를 넣고 집간장 약간과 소금으로 간해서 만드는 시금칫국은 그 맛이 담백하다. 부침가루를
입혀서 튀긴 시금치튀김이나 밀가루 반죽에 생물 오징어를 잘라 넣고 시금치를 넣어 고루 섞어 부친 시금치부침개도 이곳 사람들이 해 먹는 시금치 요리다. 김기홍 대표는 술안주로 알맞은 메뉴를 알려주었다.

“시금치로 별의별 요리를 다 해 먹어요. 삶아서 양념하지 않고 쌈으로도 먹습니다. 너무 푹 데치면 맛이 없어요. 겨울철에 나는 과메기에 생시금치와 초장을 넣고 무치면 별미죠, 별미.”

앞으로 시금치를 고를 때는 뿌리가 길고 붉은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거센 해풍을 견뎌낸 시금치를 먹으면 겨우내 추위도 거뜬히 이길 것 같다.

글 김민선 | 사진 한상무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