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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럴 디자이너 조소훈 공간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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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럴 디자이너, 아직은 생소한 직업이다. 비슷한 직업으로는 꽃장식가인 플로리스트가 있으나 이보다는 의미가 좀더넓다. 꽃주문을 받아 그에 따른 꽃을 만들기도 하지만 공간에전체를 디자인 하는 연출가 이기도 한다.
플라워 팩토리의 조소훈 대표는 플로럴 디자이너. 그는매일 꽃시장에 나가오늘은 어떤꽃이새로 나왔나하는 눈길로시장을 누빈다.
“사람들은 꽃의 얼굴만 보잖아요. 저는 보송보송한 솜털부터 줄기, 특이한 이파리, 떡잎의 뒷면 등 다양한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커피한잔마실수있는 여유를주고싶었습니다.”
<행복> 4월호 표지의 주인공이 된사진은 조소훈 씨가 플라워 팩토리를 오픈하며 사진가와 함께 준비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꽃의 정면뿐 아니라 옆모습, 뒷모습을 다양하게 포착한 이사진들을 보면꽃의힘이 단번에 느껴진다. 표지 사진의 꽃은 상사화??????. 봄에싹이튼잎이 진뒤에야 꽃이피기 때문에 잎과 꽃을 함께 볼수없다. 잎과 꽃이 서로 그리워하며 만나지 못한다하여 이름도 상사화. 붉은 꽃과 연둣빛 줄기, 그리고 흰색 그릇이 어우러진다. 충돌없이다만조화로울뿐이다.
“원래 저는 도시와 아파트를 좋아했고 자연이나 꽃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꽃을 배우면서 좋아하게 되었죠. 지난해에는‘새끼들’에게 물을 줘야해서 휴가도가지못했습니다(웃음).”
 
photo01 어린시절그의꿈은 현모양처. 수학을 너무 좋아해서 대학에서는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다 결혼한 다음에 집을 장식할 요량으로 꽃작업을 배우게 되었다. 여자는 결혼해서 살림을 하고, 1 더하기 1은2가되어야 하고, 원인과 결과가 딱딱 맞아떨어지고, 약속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가꽃을 만나면서부터 달라졌다. 죽을 때까지 아파트에서 살겠다던 여인이 주택과 정원에 대해알게 되었다. 그를 구속하던 생각과 가치에서 자유로워 졌고 더불어 유연함도 생겨났다. 사고의 폭이 넓어졌으며 더러는 약속에 늦고가끔은 실수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더큰변화는부모님에게찾아왔다.
“작업하다 남은꽃을한두송이 가지고 귀가하면‘어머이런꽃을 가지고 왔네?’하시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셨어요. ‘꽃이 폈네!’‘시들었네!’‘얘는꽃이 피는데 왜쟤는 꽃이 안피지?’하시며 점차 많은 관심을 보이셨어요. 요새는 제가 바빠 꽃을 못가져갔거든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운동 다
녀오시다꽃을꺾어오셨더라구요(웃음).”
 
photo01 꽃한송이만 놓으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있다고 말하는 그가 제안하는 꽃장식요령한가지. 다마시고 난작은 주스병이나 물잔, 아니면 화채그릇에 꽃이나 이파리를 꽂거나 띄워서 침실이나 화장실에 두면 그곳이 바로 호텔이라고. 낱개가 아닌 묶음으로 구입한다면 창가에 작은 주스병 열개를 진열하고 꽃을 꽂으면 된다. 일상적인 꽃데커레이션을 중시하는 그가 가장아름답다고여기는꽃이있는 풍경은“저희 집화장실”이라 말한다.
“고속터미널 꽃도매시장, 동네꽃집등꽃은 어디에나 있어요. 어디서 사는가보다누가어떤꽃을선택하는가가중요하지요. ”
어느 날청담동 인근을 산책하다 꽃한송이 구입하고 싶어진다면 플라워 팩토리에 들르시길. 건물 6층에 있는데, 평지에 있는 듯베란다 풍경이 일품이다. 꽃이있는 그곳에서 차한잔을 즐기며 꽃장식에 대한 조언을 들을수있다. 원한다면꽃작업도배울수있다. 문의02-515-9611
 
photo01 1974년 태어난 플로럴 디자이너 조소훈 씨는 미국‘서던 캘리포니아 스쿨 오브 플로럴 디자인’과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서 가드닝, 부케, 행사, 웨딩, 장례 등 다양한 플라워 디자인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뒤에는 플라워 회사인‘콘로이스 플라워’에서 플로럴 디자이너로 일했다. 지난해 귀국해‘플라워 팩토리’를 오픈했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