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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태일농장의 패션프루트 영양 풍부한 여신의 과일
눈치챘겠지만 패션프루트는 ‘패션passion’과 ‘프루트fruit’의 합성어다. 그만큼 열대 과일 특유의 진한 향과 맛이 일품인 과일이다. 겉모양은 달걀 크기의 망고스틴 같고 껍질을 까보면 석류처럼 알맹이가 탱글탱글 들어 있다. 국내에서는 수입 냉동 과일로만 접할 수 있었던 패션프루트가 한 농부의 열정으로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토평동 태일농장을 찾았을 때 순간 동남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패션프루트는 넝쿨성 작물이라 재배한 지 1년 후부터 과실을 맺는다. 씨앗은 뉴질랜드에서 들여왔지만 제주도의 화산토와 바람, 햇볕과 궁합이 잘 맞아 4~5년이 지나면 수확량이 넉넉해진다.

오른쪽 아열대 과일 패션프루트 재배에 성공한 김태일 씨

동남아 여행 경험이 있다면 한 번쯤 맛보았을 과일이다. 이름만 듣고 바로 모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혀끝에 감돌았을 맛을 기억해보자. 새콤달콤하면서도 끈기가 느껴지며 여운이 남는 향까지. 동남아의 강렬한 날씨만큼이나 매력적인 맛이다. 패션프루트passion fruit는 단순히 아열대 과일 중 하나라고만 소개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렇지 보습과 항산화 작용, 피로 해소 효과가 매우 뛰어난 영양 만점 과일이기 때문이다. 크기는 작지만 여성에게 좋은 성분을 석류보다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피부 보습 효능이 있는 니아신이 석류의 5.2배, 장내 배변 활동을 돕는 식이섬유는 석류의 2.6배, 피로 해소를 돕고 피부를 개선하는 비타민 C는 3배 많이 함유하고 있다. 항산화 효과가 있는 베타카로틴(비타민 A)은 석류에는 들어 있지 않는 반면 패션프루트는 64㎍(100g당)가량이나 된다. 반면 지방은 석류에 비해 58%밖에 되지 않고, 당분도 84%밖에 되지 않으니 칼로리 걱정도 없다. 이러니 ‘여성의 과일’이란 별명의 석류를 뛰어넘어 ‘여신의 과일’이라고 명명할 만하다. 패션프루트는 반으로 갈라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기 때문에 섭취하기도 간편하다.

원산지는 브라질 남부지만 태국, 대만 등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열대 지방에서 재배하는 과일이다. 해외 리조트 등에서 맛본 국내 소비자들이 특유의 맛과 향에 반해 수입산 냉동 패션프루트를 찾곤 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냉동 상태로 수입한 제품만 유통되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국내에서 생산하고 판매하는데,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도 무농약 농법으로 생산해 친환경 인증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입품보다 훨씬 향이 진하고 맛도 뛰어나다.

“대만에서는 백 가지 향과 맛이 난다고 해서 백향과라고 부르더군요. 저도 처음 먹어봤을 때 오미자보다 맛과 향이 오묘해서 놀랐어요. 신맛이 강한데도 단맛이 감돌아 거부할 정도의 신맛은 아니고, 달콤한 맛, 쓴맛, 짠맛, 고소한 맛도 나요.”

아무래도 국내산 패션프루트의 제1 소비자는 생산자 김태일 씨인 듯하다.

제주도의 토양과 바람, 햇볕을 먹고 자란다 제주도 서귀포시 토평동 태일농장 입구에는 스타팜Star Farm 마크가 부착되어 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농산물을 생산하거나 차별화된 작물을 재배하는 경우, 농촌 현장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농가를 대상으로 스타팜을 선정하는데, 올 1월 김태일 씨는 무농약 인증과 함께 아보카도와 패션프루트 같은 특수 작물을 재배한다는 점을 인정받았다. 국내에서 아열대 작물 재배를 시도하는 사람은 많지만 판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아보카도는 열매를 맺기가 쉽지 않은 작물이라 재배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다. 태일농장에서는 1천2백 평 남짓한 하우스에 아보카도, 패션프루트를 심고 제주도 농작물인 노지 감귤과 황금향 등도 재배하고 있다.

태일농장을 운영하는 김태일 씨는 2004년 제주도로 귀농한 8년 차 농부다. 인천에서 아버지와 사무용 가구 공장을 운영하다가 IMF사태를 겪으면서 사업을 접었다. 이민 준비로 호주와 뉴질랜드를 오가면서 아보카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생소하긴 했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이민 허가를 앞두고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한국의 남쪽 섬에서도 아열대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호주 대신 서귀포로 ‘이민’을 감행했다.

“아열대성 기후로 접어든 제주도라면 아보카도 재배지로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FTA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틈새시장을 공략하면 아열대 작물도 국내에서 상업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무엇보다 재배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려면 기후와 토양 등 지역적 요건이 맞아야 한다. 아열대 작물이라 해도 기온이 30℃를 넘어가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제주도는 겨울이 짧고 봄이 긴 편이다. 여름철에도 한여름 외에는 30℃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기에 좋은 환경인 것이다. 태일농장이 있는 서귀포시 토평동은 해발 180m 지역으로 밤새 눈이 많이 쌓여도 낮 12시면 거의 녹는다. 겨울철 영하 5℃까지 내려가도 새벽 세 시간 정도만 최저 온도일 뿐 그 이후에는 영상으로 올라간다. 비료를 거의 뿌리지 않아도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순전히 제주도 특유의 화산토 덕이다. 화산토는 아보카도 원산지인 남미의 토양과 비슷해서인지 나무가 토양의 양분을 잘 흡수한다.

여러모로 제주도 서귀포가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서자 작물 재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직 국내에는 아보카도 재배에 대한 기술이나 성공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뉴질랜드 사이트에 접속해 아열대 과일 특성이나 재배 조건 등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1년간 작물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친 후 뉴질랜드에서 아보카도 묘목 1백 본을 수입했다. 농민이 그것도 직접 뉴질랜드와 인천공항에서 검역을 통과하고 들여왔으니 현대판 문익점인 셈이다. 물론 아보카도 묘목을 훔쳐온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작물을 들여오고 그것을 재배하고자 하는 열의와 추진력이 남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 5 과육을 반 갈라 그대로 먹거나 주스로 마신다.
2, 3 보라빛으로 다 익으면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7~8월까지가 수확기다.
4 패션프루트보다 먼저 시도했지만 아직 재배에 성공하지 못한 아보카도. 조만간 제주산 아보카도를 맛보게 되기를.


1년 만에 넝쿨째 주렁주렁 열매가 맺다 요즘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아열대 작물 중에서도 아보카도 재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묘목을 들여와서 접목하자 2년째부터 꽃이 피었는데, 열매가 잘 맺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영하 4℃까지는 내한성이 있는데도 한차례 눈을 맞자 그대로 죽어버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충해와 수정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하지만 나무가 덜 숙성해 열매가 잘 여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틈새 작물을 열심히 물색하기 시작했다.

“아열대 작물 중에서 최소한의 재배 비용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품목을 찾았죠. 패션프루트는 넝쿨성 작물이라 1년 만에 열매를 맺으니 아보카도보다 재배하기 쉽겠더라고요. 내한성이 있어서 별다른 장치 없이도 잘 자라니 이거다 싶었죠.”

뉴질랜드에서 씨를 들여와서 재배하기 시작한 게 5년 전이다. 패션프루트는 아보카도와 비슷한 품종이라 재배 방법도 비슷해 일하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번식력이 아보카도보다 훨씬 좋아서 1년생 묘목에서도 수확이 가능하다. 또한 해충이 별로 없어서 농약을 칠 필요도 없다. 5월에 꽃이 피면 7~9월에 수확하고 그다음에는 줄기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큰 줄기는 남겨두고 잔가지를 자르면 새 줄기가 나오면서 이듬해에도 꽃이 많이 핀다. 첫해에는 열매가 많이 맺지 않았지만 지인들 위주로 시식해본 결과 맛이 괜찮다는 평가에 자신감을 얻었다. 1년생일 때 1백 개 정도 달리던 열매가 4~5년 정도 되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주렁주렁 맺혔다.

“제주도 사투리에 ‘자랑자랑’ 열렸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많이 열렸다는 뜻인데, 지금 패션프루트가 그래요.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친환경으로 재배할 수 있는 것도 제주도의 토양과 바람, 햇볕 덕분이지요.”

패션프루트는 수확 방법도 간편하다. 시기가 되면 보라색으로 변한 후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지므로 아침저녁으로 그 열매를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 일손을 빌리지 않아도 아내와 둘이서 충분히 수확을 마칠 수 있다. 현재 태일농장에는 1년생을 포함해 모두 40그루의 패션프루트가 자라고 있다. 패션프루트는 5년 정도 재배하면 수명을 다하기 때문에 미리 묘목을 다시 심어야 매년 일정한 양을 수확할 수 있다. 지난해는 처음으로 200kg가량을 수확해 판매했다. 김태일씨는 구체적인 수입을 공개하기 꺼려했지만, 개당 1천 원을 호가하므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물임에는 분명하다.


8년 전, 호주 이민을 준비하다가 제주도로 귀농한 김태일 씨 가족. 제주도 서귀포를 여행하다가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기 좋은 곳이라는 판단이 썼다고 한다.

또 다른 아열대 작물 재배에 도전한다 판매와 유통은 홈페이지를 통한 개인 주문과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 등과의 거래가 주를 이룬다. 패션프루트가 점점 대중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다. 서울신라호텔에서도 김태일 씨의 패션프루트를 구매해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더 파크뷰 뷔페 레스토랑에서는 반으로 잘라 생으로 제공하기도 하는데, 패션프루트 무스와 젤리 등 패션프루트를 이용한 다양한 디저트도 마련돼 있다. 요구르트와 스무디 및 샐러드 메뉴도 준비 중이라고. 반면 김태일 씨가 직접 개발한 레시피는 좀 더 간단하다.

“우리 집은 저뿐 아니라 아이들도 하루에 몇십 개씩 패션프루트를 먹습니다. 모양이 조금 이상한 것은 우선 우리 식구 차지니까요. 반갈라서 그대로 먹거나 압착한 후 즙을 물에 희석해서 주스로 마시는 게 가장 간편하는 먹는 방법이에요. 씨만 분리해서 먹으려면 믹서에 넣고 1.5초씩 세 번 정도 살짝 돌리면 씨와 과육이 분리되죠. 씨까지 간 것을 냉장고에 24시간 보관해두면 걸쭉한 상태가 되는데, 이것을 잼처럼 식빵에 발라 먹으면 맛있습니다. 껍질은 말려서 차로 마실 수 있으니 버릴 게 하나 없는 과일이에요.”

김태일 씨는 그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익힌 아열대 작물 재배 노하우를 공유하고, 아보카도와 패션프루트 등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아보카도친환경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는 조만간 제주도의 일곱 개 농가와 함께 아열대 작물을 위주로 한 영농법인을 세울 생각이다. 그 전에 아보카도 재배에 성공하는 것이 숙제로 남아 있다. 현재 열매는 달려 있지만 아직 시험 단계다. 예정대로라면 올 12월 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 수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패션프루트의 재배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다른 아열대 작물재배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프런티어 농부 김태일 씨의 최종 목표는 직접 재배한 아열대 작물을 이용해 가공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생과로만 팔면 불량이 나올 경우 처리하기 애매하지만, 가공을 하면 상품성이나 계절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 이미 아보카도는 화장품이나 의약품 등에 쓰고 있으며, 패션프루트는 워낙 향이 독특하므로 농축 기술을 통해 화장품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리고 그는 농장에서 아열대 작물 관련 프로그램을 체험하며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는 관광 농업까지 해보고 싶다. 아열대 과일 패션프루트의 열정이 김태일 씨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과 꿈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1 패션프루트는 반으로 갈라 스푼으로 떠먹는 것도 좋지만, 맛과 향이 강해 즙을 내 얼린 것으로 셔벗과 빙수를 만들어도 맛있다.
2 (위에서부터) 패션프루트 퓌레를 이용한 상큼한 젤리. 파나코타 베이스에 패션프루트 퓌레와 젤리, 잼을 넣어 만든 파나코타. 패션프루트 퓌레를 잼으로 만들어 굳힌 후 라임 무스 사이에 넣어 굳힌 디저트. 모두 서울신라호텔 베이커리 ‘패스트리 부티크’에서 맛볼 수 있다.



3 상큼한 맛이 일품인 패션프루트 요구르트.
4 패션프루트로 만든 드레싱을 얹은 제철 샐러드. 특유의 향긋하고 새콤한 풍미의 드레싱으로 활용해 입맛을 돋우는 데 그만이다. 특히 니아신과 비타민 C, 식이섬유 등이 풍부해 피곤한 날 먹으면 피로 해소는 물론 피부 보습 효과도 볼 수 있다.

촬영 협조 태일농장(064-733-9427, www.e-avocado.com), 서울신라호텔(02-2230-3305)

글 김민선 | 사진 민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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