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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우리밀 푸르게 물결치는 밑밭 사이로
드넓게 펼쳐진 밀밭이 바람에 일렁인다. 지난가을에 파종해 꽁꽁 언 땅에서 싹을 틔워 겨우내 들판을 푸르게 가꾸던 밀의 이삭이 싱그럽게 피었다.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 보리와 함께 가난한 밥상을 풍성하게 채우던 우리 밀이다. 쌀에 이어 제2의 식량으로, 값싼 수입 밀에 밀려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꿋꿋이 뿌리를 지킨 전남 광주시 광산구의 우리 밀밭을 찾았다.


면적이 여의도만 한 광산구의 아득하게 펼쳐진 드넓은 밀밭을 걷고 있으면 이 세상이 오직 하늘과 밀밭만 있는 듯하다.


우리 밀, 봄날을 꿈꾸다 여름 기운이 온 세상에 뻗치면 시퍼런 밀이 햇볕 아래서 누렇게 익어간다. 작년 10월 파종해, 정월 대보름 즈음에 밀의 새순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면 농부들은 밀밭을 꾹꾹 밟아주며 한 해의 풍요를 기원했다. ‘밀밭 밟기’는 겨울 동안에 얼었던 밀밭을 밟아 땅을 부드럽게 해주는 풍습인 것. 그 덕분에 밀이 튼튼하게 뿌리내려 이삭을 피워내고 5월 말이면 푸르던 이삭이 황금빛으로 물들면서 알이 차오르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 밀 재배지인 이곳 전남 광주시 광산구에서는 6월 10일경부터 장마가 오기 전에 밀을 거두어들인다.

“밀은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래 오랜 기간 재배해온 작물 중 하나입니다. 한때 값싼 수입 밀에 밀려 우리 밀의 씨가 마를 위기에처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도 밀의 재배 역사는 꽤 길지요. 그 옛날에는 귀한 곡물이어서 밀전병, 유밀과 같은 별식을 만들 때나 누룩을 빚을 때 썼다고 합니다. 6.25전쟁 이후 미국에서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서민들의 먹을거리가 된 것이지요.”

쌀을 잇는 제2의 식량이라 부르건만 밀은 요즘도 수입해오는 것이 대부분.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 조합장 김영섭 씨는 밀의 연간 1인당 소비량이 40kg에 이르건만 우리가 즐겨 먹는 빵, 국수, 과자 등의 주재료인 밀가루가 대부분 묵은 수입 밀인 현실이 안타깝다고 혀를 끌끌 찬다. 우리 땅에서 자라나는 우리 밀이야말로 대표적 로컬푸드요, 친환경으로 재배한 무공해 농작물이건만 값싼 수입 밀의 거센 파고에 밀려 밀 자급률이 겨우 2%를 넘기는 수준이라고. 하지만 한때 종자조차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던 우리 밀로선 기적과도 같은 수치다. 2007년까지만 해도 0.4%에 그쳤다고 하니 우리 밀을 살리고자 노력한 농부들의 노력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수입 밀의 가격이 워낙에 저렴하다보니 그에 비해 네 배 정도 비싼 우리 밀을 찾는 이가 점점 줄어들었지요. 1984년 정부의 우리 밀 수매 중단 이후엔 “애국이건 안전한 먹을거리건 이제 밀은 그만 심어야겠다”는 농민들의 한숨 소리가 깊었습니다. 종자를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니, 30년 전만 해도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밀밭을 ‘빼앗긴 들판’이라 부를 정도였지요.”

밑발을 되살려, 빼앗긴 들에 봄을 찾기 위해 시작한 것이 1990년대 한창 붐을 이룬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다. 우리 땅에서 난 농작물이 우리 몸에 맞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 겨울 작물인 밀은 겨울철에 쓰지 않고 놀리는 유휴 농경지에 벼나 콩 등 밭작물과의 이모작이 가능하고, 재배 기간이 짧아 농약을 칠 필요가 없으므로 안전하다. 노동력도 거의 들지 않는다. 게다가 이산화탄소는 빨아들이고 산소는 배출해내는 대기 정화 기능도 나무보다 뛰어나다.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하니 탄소 마일리지를 절약할 수 있는 신선한 로컬 푸드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밀이야말로 농촌을 살리고 환경을 지키는 건강한 친환경 먹을거리일 수밖에.

“옛말에 ‘싼 게 비지떡’이라고, 수입 밀 가격이 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입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태생이 친환경 작물로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우리 밀을 따를 수는 없지요. 아직도 우리 밀이 갈길은 멉니다.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길이니, 농민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지요. 하지만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종자도 개발하고, 밀가루와 국수에만 머물던 가공식품도 최근엔 라면, 과자, 만두, 핫도그 등 다양하게 만들고 있지요. 우리 밀과 우리 밀 제품을 찾아주는 것이 빼앗긴 밀밭을 되찾는 길이랍니다.”


1 밀은 겨울에 파란 싹을 틔워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공급하는 친환경 작물이라고 강조하는 한국우리밀농업협동 조합 조합장 김영섭 씨. 우리 밀을 먹는다면 환경 개선에도 일조할 수 있다고.
2 식생활이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우리 밀로 만든 빵, 과자를 찾는 이가 많다. 씹을수록 고소한 통밀 건빵과 과자는 농협에서 구입할 수 있다.

3
(위에서부터) 겉껍질만 벗겨낸 통밀, 찰기를 더한 ‘신미찰’이란 종자로 재배한 후 도정한 ‘찰미쌀’, 통밀에서 오염 부위만 2분 도미한 통밀쌀.
4 6월 초부터 밀을 수확하기 시작하는데, 한국농업협동조합 조합원으로 있는 농 부들이 수확한 밀을 모아 도정해 밀쌀로 판매한다. 제분해 가루로 만들어 2차 가공식품으로도 다양하게 선보인다.


통밀쌀, 알곡 그대로 영양을 살리다 밀에 싹이 튼다는 건, 밀이 어미가 된다는 소리다. J. H.파브르가 <파브르 식물기>에서 밀싹을 ‘젖’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그 안에 영양분이 풍부하게 녹아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밀 싹에는 칼륨과 칼슘, 비타민 C뿐 아니라 빈혈을 방지하고 성인병을 예방하는 성분도 있다고. 영양제가 흔치 않던 시절에는 비타민이 부족한 겨울이나 아프고 난 회복기에 밀싹을 내서 먹곤 했다. 지금도 농가에서는 밀을 깨끗이 씻어 일어 하룻밤 물에 불린 후 물을 따라내고 채반에 담아 밀 싹을 콩나물 기르듯 키워 먹는다. 집안이 아닌 밭에서 다 자란 밀은 대개 제분 과정을 거쳐 가루로 만든다.

밀에도 쌀이나 보리와 마찬가지로 겉껍 질, 속껍질, 씨눈이 있는데 겉껍질만 벗겨낸 것이 통밀. 쌀과 보리는 속껍질까지 벗겨야 먹을 수 있지만 수확한 후 즉시 겉껍질을 벗기는 밀은 속껍질이 얇아 식감이 거칠고 딱딱해도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이 통밀을 빻은 후 가루를 체로 쳐서 밭은 고운 가루가 흰 밀가루이고, 남은 찌꺼기가 밀기울인데, 여기에는 속껍질과 씨눈등이 많이 섞여 있어 불포화 지방산, 비타민, 미네랄 같은 영양분과 섬유질이 풍부하다. 따라서 흰 밀가루는 영양소가 모두 깎여 나간 것.

“‘밀’이라고 하면 밀가루를 떠올립니다. 밀은 ‘가루음식을 먹는다’는 뜻에서 분식粉食, 쌀과 보리는 ‘곡식을 먹는다’는 뜻에서 입식粒食이라고 하죠. 요즘은 도정 기술이 발달해 밀의 영양소가 온전히 살아 있는 알곡 그대로의 ‘통밀쌀’이 제품으로 나와 있습니다. 밥을 지을 때 섞으면 잡곡밥으로 즐길 수 있지요. 통밀쌀은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더해지는데, 여기에 찰기를 더해 ‘신미찰’이란 종자를 새롭게 개발해 ‘찰미쌀’이라는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통밀쌀은 통밀과 다르다. 통밀은 도정하지 않은 알곡이고, 통밀쌀은 잡곡으로 즐길 수 있도록 속껍질의 오염물만 보통 2분 도미하여 살짝 깎아낸 것. 그 때문에 통밀쌀도 통밀과 마찬가지로 섬유질이 풍부하고 미네랄과 비타민, 특히 비타민 B 복합체가 다량 함유되었다. 따라서 밀가루를 선택할 때도 통밀을 알곡째 그대로 갈아 만든 통밀가루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6월은 밀 먹는 때입니다. 예로부터 하지夏至가 오기 전에 밀을 거두어 거칠게 빻아 고운 가루는 밀가루로 썼지요. 밀수제비, 밀국수가 단골 메뉴였습니다. 체에 걸러진 거친 밀기울은 단단하게 뭉쳐 누룩 (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을 디뎠지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밀을 서리해 가져다가 ‘밀 그스름’을 해 먹기도 했습니다. 밀 그스름은 밀을 이삭째 군불에 까맣게 그을려 두 손으로 살살 비벼 껍질을 벗겨내는데,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비비면 탄 껍데기는 날아가고 익은 밀알만 남습니다. 따끈한 밀알을 추려 입안에 넣고 씹으면 톡톡 터지는 밀알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어찌나 고소하던지 입언저리가 시커멓게 될 정도로 허겁지겁 먹곤 했으니까요.”

해질녁 밀밭은 고흐의 그림 속 오르베 밀밭처럼 운치있다.

1 밥을 지을 때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통밀쌀을 섞어 지은 밥.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2 보리는 대맥大麥, 밀은 소맥小麥이라고도 하는데, ‘맥’은 국수와 빵을 만드는 재료를 뜻한다. 
3 우리밀광역클러스터 단이 설립한 우리밀식품㈜에서는 국산 밀로는 처음으로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을 획득한 ‘광산우리밀’로 수제비, 국수, 핫도그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한다.

광산우리밀, 지역을 대표하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 시구가 절로 읊조려지는 광산의 밀밭이 맑게 갠 하늘 아래 끝없이 이어진다. 밀 재배지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몰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광주시 광산구의 밀밭은 면적이 6백 헥타르에 이르며, 7천여 농가가 경작하고 있다. 지난 2011년 8월에는 광주광산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의 ‘광산우리밀’이 국산 밀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을 획득하기도 했다.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은 상품의 품질이나 명성이 특정 지역에서 비롯되는 경우 그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상품임을 명시하는 제도로, 광산구에서 생산하는 국산 밀과 이를 가공한 제품에 ‘광산우리밀’이라는 브랜드를 달 수 있는 것. 아직 브랜드가 출시되지는 않은 상태이지만 우리밀광역클러스터단이 세운 우리밀식품㈜에서 광산우리밀을 이용한 제품을 ‘우리밀로’라는 이름으로 국수부터 핫도그까지 다양하게 출시한다.

6월 1일에는 광주 광산구 송산유원지에서 ‘제6회 광산우리밀 문화 축제(culture.gwangsan.go.kr)’도 개최한다. 광산우리밀 요리 경연 대회는 물론 행사 마지막 날인 3일에는 ‘가족 사랑 건강 걷기 대회’도 연다. 송산유원지를 출발해 황룡강 변을 따라 밀밭 체험장을 지나는 6km 구간은 우리 밀의 생태 환경과 자연 풍광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6월 1일까지 광산구 내 동주민센터와 광산구 생활체육회에 신청하면 된다. 자장면・칼국수・만두 등 광산 우리밀로 만든 음식도 각각 2천 원에 맛볼 수 있으니, 평화로운 풍경의 밑밭으로 나들이를 떠나도 좋겠다.

 촬영 협조 한국우리밀농협(062-944-7788), 우리밀클리스터사업단 우리밀식품㈜(1588-6208) 

담당 신민주 기자 | 사진 한상무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