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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탁마하지 않는 조각가 이영섭 씨 대지가 잉태하고 조각가가 발굴한다
‘조각’이라 하면 깎아내는 작업을 상상한다. 그런데 어느 조각가에게는 조각이 흙을 파내 작품을 매장해 굳힌 뒤 캐내는 작업을 뜻한다. 이렇게 ‘발굴’한 그의 작품은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어눌한 손맛’이고‘여백의 조각’이다. 이 독특한 작업을 시작한 사람은 조각가 이영섭 씨. 경기도 여주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 보았다.
photo01 산 너머에 천 년 넘은 절이 묻혀 있단다 어릴 적 들은 여주 고달사高達寺 터 이야기는 조각가 이영섭 씨가 어른이 되어서도 환상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좌표를 다시 찾고 싶었던 7년 전 어느 날, 그는 고달사 옆 버려진 빈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즈음 절터에 유적 발굴단이 와서 출토 작업을 시작했다. 2m를 파내자 1천 년 전 유적지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정작 불상이나 탑 같은 중요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 말부터 고려까지 고고한 위상을 떨쳤을 고달사도 흔적만 겨우 남았다는 사실에 허망했을 법도 하다. 이영섭 씨는 새삼 ‘난 조각가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만들었다가 꺼내면 되지.’ 그날로 이영섭 씨는 앞마당을 작품의 발굴 터로 삼았다. 15년 넘게 해온 테라코타 작업을 접은 그는 종일 마당에 앉아 숟가락으로 땅을 파고, 들여다보고, 물로 씻어내고, 또 훑어내는 일을 반복했다.
매일 꿩 울음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새벽 마당을 맨발로 조용조용 걸었다. ‘머리가 출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적인 몸놀림으로 해 질 때까지 자기만의 발굴 작업에 몰입했다. 이영섭 씨는 곧 독특한 창작 방식을 고안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덩어리를 밖에서 안으로 깎아내는 것이 조각의 정석이지만, 그는 원하는 모양으로 땅을 파고 작품을 매장해 굳힌 뒤 출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땅에는 마사토가 섞여야 제 맛이다. 마사토에는 굵은 흙과 고운 흙이 섞여 있기 때문에 여기에 물컹한 혼합 재료가 닿아 굳게 되면 표면이 자연스러운 무늬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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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도 여주에 있는 이영섭 씨의 작업실.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뒤 회칠한 벽이 눈앞에 삼삼해 집을 하얗게 칠하고 지중해 느낌이 나는 대문을 달았다. 2 껑충한 소녀상, 다정한 모자상, 앙증맞은 동자상…. 곳곳에 서 있는 석조상은 주인보다 먼저 손님을 반긴다. 3 위트 넘치는 강아지 조각상. 큰 놈은 야외 테이블의 의자로 쓰인다. 4 돌가루를 밖으로 배출할 수 있도록 그가 직접 고안한 작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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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흙은 이영섭 씨의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작품에 ‘시간’을 입혀줍니다. 세월에 풍화된 듯한 감촉을 느끼게 합니다. 손이나 기계로 깎은 작품은 제가 죽을 때까지도 이런 느낌을 자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흙이 품었던 그의 작품은 마치 오래된 해태상이나 석조탑의 표면을 보는 듯하다. 어딘가엔 이끼가 내려앉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땅속에 매장하는 혼합 재료 성분의 대부분은 시멘트다. 그 흔한 시멘트가 아스라히 마모되어 온기를 풍기는 돌조각이 되다니!
 
photo01 “요즘은 첨단 기술이 발달해 돌을 비누 깎듯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다비드상을 거의 똑같이 깎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사실적 묘사 기술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는 유쾌한 발상이 중요해졌습니다.” 이영섭 씨가 발견한 유쾌한 발상은 자연의 우연성이었다. 흙을 파내고 붓으로 털면서 몰드(틀)를 만든다지만, 혼합물을 몰드에 넣어 굳힌 뒤 꺼낼 때까지는 작품이 어떻게 모습을 갖출지 작가도 알 수 없다. “질감에 따라 작품의 느낌이 아주 다르게 마련인데, 질감의 상당 부분은 자연이 만들어내거든요. 그래서 작품을 발굴하는 순간이 되면 정말 설렙니다.”
 
1 흙에 묻은 지 3일쯤 지나면 크레인을 이용해 작품을 발굴한다. 2 계곡에 구르는 돌도 그에게는 작품으로 보인다. 눈, 코, 입을 살짝 그리니 사람이 되었다. 3 이영섭 씨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 여주의 고달사 터.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4 위트 넘치는 강아지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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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에, 삶에 여백의 미가 깃들다 몇 해 전 이영섭 씨는 고달사 옆 인적 없는 집을 버리고 산자락 끝 인가로 다시 내려왔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아하던 그가 이제는 요리도 곧잘 한다. 매년 4월 말경이면 지천에 돋아나는 두릅을 따다가 두릅 파티를 열기도 한다.
작품도 한층 경쾌해졌다. 역발상逆發想을 반기고 새로운 시도를 즐긴다. 표면에 드러난 장식물의 재료도 달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천 년 넘은 기와 조각이나 냇가에 있는 옛 석조 다리 파편을 넣길 좋아했다. 사라진 것들을 재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즘엔 철사나 타일, 보석, 유리 등을 쓴다. 현대적인 소재도 이영섭식의 풍화 작용을 거치면 그윽해진다. 그렇지만 첫 발굴 작업부터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난 여백의 미는 여전히 눈에 띄는 매력이다. “어딘가는 비어 있고 세부 묘사가 생략된 곳도 많지요. 보는 이가 자기의 감정을 포함시켜서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한국 미술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학문과 덕을 닦아 한 단계 한 단계씩 심화시키는 과정을 비유한 성어成語 ‘절차탁마切磋琢磨’. 이는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며 숫돌에 간다’는 뜻으로 원래 장인이 옥이나 돌 등을 다스리는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영섭 씨는 20여 년간 스스로를 절차탁마해왔으면서도 돌을 절차탁마하지 않는 조각가다. “냇가에 구르는 돌이 제게는 풍화된 모습 그대로 작품입니다. 자연의 기운을 고이 담고 있거든요. 얼굴처럼 보일 때는 살짝 눈, 코, 입을 그려주기만 합니다.” 그는 신라의 석공이 탑을 절차탁마하여 ‘완전평면’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보아서 편안한 느낌, 만져서 따스한 상태가 평면이었겠지요.”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이 보아서 평온한 작품은 무엇일까. 이영섭 씨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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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영섭 씨의 신작 ‘의자’. 2, 3 작품 표면을 장식한 유리 조각과 조약돌. 풍화된 느낌을 내기 위해 소주병이나 와인병 조각을 일일이 불로 녹여 모서리를 닳게 만들었다. 4 땅에서 꺼낸 뒤 물로 씻어보아야 작품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있다.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이때는 깨부순다. 실루엣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연장을 대면 작품은 기운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연장은 눈, 코, 입 등을 그릴 때만 사용된다. 5 계곡에서 주운 주홍빛 돌이 이영섭 씨 가슴에 수줍은 소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혹은, 이영섭 씨가 그녀에게 다가갔거나. 6‘생각하는 이영섭’의 이런 표정은 그가 홀로 작품을 구상할 때 주로 나타난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연신 수줍은 듯한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