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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라! 오래된 부채바람 미술품처럼 아름다운 앤티크 부채 모으는 한은경 씨
에스키모인도 부채를 사용했다는데, 진짜일까? 유럽에서는 부채로 사랑 고백을 했다는데, 과연 어떻게 했는지? 전 세계 부채를 수집하며 부채의 문화 및 역사를 연구하는 ‘부채 도사’ 한은경 관장에게 물어보자.

요즘 세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소지품이 몇 있다.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손수건이다. 어디에서든 쉽게 일회용 티슈를 뽑아서 쓸 수 있고, 물비누가 갖춰진 공중 화장실도 흔하니 손수건을 쓸 일이 별로 없다. 또 하나는 부채다. 상업 공간마다 에어컨이 보편화되었고, 가정에도 냉방 시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부채를 찾지 않는다. 은행 상품이나 학원 입시 수업 등을 광고하기 위한 용도로 배포하던 프로모션용 플라스틱 부채도 거의 사라졌다. 더우면 부채를 찾지 않고 선풍기를 켜거나 에어컨 앞에 선다.

돌아보면 무더위에 부채는 얼마나 요긴한 물건이었는지 모른다.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서 땀이 뻘뻘 나면 부채 혹은 책받침을 꺼내 부쳐대곤 했다. 한낮에 곤히 잠든 손자를 위해 할머니는 부채로 접힌 목이나 다리에 맺힌 땀을 휘휘 날려주었다. 마루에서 수박을 먹다가 파리가 달려들면 부채로 쫓아내기도 했다. 집엔 으레 색동 태극선이 있었는데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부채는 차츰 일상 풍경에서 잊혀지고 있다.

부채의 화려한 과거
하지만 예전에는 부채가 이처럼 무관심한 취급을 받지 않았다. 부채의 옛 위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부채 연구소 ‘한바람 에디션(www.hahnbaram.com)’의 한은경 관장이다. 전 세계의 귀한 앤티크 부채 8백여 점을 소장한 그는 부채의 예술적·기능적 가치를 연구한다. “부채는 자그마한 한 면에 조각·회화·세공을 모두 담은 ‘종합 미술’의 산물입니다. 더위를 식히는 용도를 비롯해 다양한 기능으로 쓰였고요.” 그는 오동나무 장에 보관된 소장품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18~19세기 유럽에서 만든 접선(접는 부채)은 쫙 펼치면 로코코 시대 여인들의 드레스 같다. 정교한 세공이며 화려한 페인팅을 눈으로 훑다 보면 황홀해진다. 화사한 색감이 발휘된 일본 접선은 한 점의 회화 작품 같다. 펼치는 방향에 따라 네 가지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는 부채가 있는가 하면, 바가지처럼 볼록 튀어나온 부채, 대모(거북이 등껍질)나 상아를 조각해서 이어 붙인 부채 등 소재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셀 수 없이 형태가 다양하다.

“에스키모 사람들도 부채를 사용했답니다. 불을 지필 때나 의식을 치르며 춤을 출 때 부채가 필요했지요.” 한은경 관장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채의 쓰임새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한다. 우선 더위를 식히거나 곡식 껍질을 털어서 날리는 등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다. 둘째, 패션 액세서리로 사용되며 장식 예술의 기능을 했다. 이때 부채는 의복이나 머리 장식처럼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셋째, 제사나 주술 등 각종 의식의 도구로 쓰였다. 제사장은 춤을 추거나 의식의 한 과정으로 관객의 시선을 모을 때 부채를 들었다. 이처럼 다양한 용도 중 특히 장식 예술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부채의 예술성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1 조선 말기 궁중에서 사용한 부채. 부채면에 커다란 천도복숭아와 십장생에 속하는 사슴 및 불로초를 그렸다.
2 19세기 말 영국의 레이스 접선. 얇은 비단의 부채면에 18세기 복장의 남녀가 체스를 두는 장면이 그려졌다. 부채를 들고 있는 여자 곁에 놓인 의자 위에 동양풍의 부채도 보인다. 유명한 부채 화가 프랜시스 호톤Francis Houghton의 작품으로 그림 아래에 그의 서명이 있다.

동서양을 타고 넘던 부채 바람
인류는 언제부터 부채를 사용했을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채는 이집트 투탕카멘 왕릉(기원전 1334~1325년)에서 발견된 황금 단선(접히지 않고 평평하며 자루가 달린 부채)이다. 고대부터 무더운 지역에서는 시종이 왕을 위해 부채로 햇빛을 가리거나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주었다. 부채의 예술성이 화려하게 꽃핀 것은 접선이 탄생하면서부터다. “중국 송나라 문헌에 이르길 10세기경 일본에 접선이 존재했고, 이 기술은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한·중·일 부채는 개성이 각각 다르다. 우리나라 합죽선은 접선 중 유일하게 180도 가까이 펼쳐지며 부챗살의 개수가 많다. 합죽선은 한지에 수묵화를 그리거나 시를 적는 방식이 대부분인데, 중국이나 일본의 접선에 비해 수수하고 단순하다.한지가 의외로 아주 견고해서, 잘 보존된 우리 부채는 원형과 거의 가깝다.

중국의 접선은 대모, 금, 은, 나무, 상아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진한 채색을 하거나 세밀한 조각을 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중국 부채가 유럽에 전해진 이후 1850년경에는 광동에서 아예 수출용 부채를 제작하여 대량 수출했지요. 대표적인 스타일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천의 얼굴 부채thousand faces fan’라고 하는데, 부채에 무수히 많은 사람을 그린 뒤, 얼굴에 일일이 상아를 붙인 작품입니다. 또 하나는 종잇장처럼 얇고 세밀하게 조각한 상아로 만든 부채입니다.” 당시 부채를 둘러싼 중국과 유럽간의 무역 역사를 보면, ‘실크로드’와 유사한 ‘팬로드’가 생겼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다. 일본은 일찌감치 부채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중세부터 근대 회화 작품을 일람해보면, 대부분의 남녀가 손에 접선을 들고 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만큼 부채는 상류 사회뿐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널리 애용된 소품이었다. 요즘에도 일본 접선은 주된 문화 상품 중 하나다.

“15세기에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일본 접선을 이탈리아 바티칸 교황에게 진상했지요. 접선이 들어오기 전까지 유럽 멋쟁이들은 깃털 부채나 직사각형 단선을 사용했는데, 아름답고 신기한 접선이 들어오자마자 패션 리더들의 눈을 사로잡았지요.” 파리에서 접선은 기술과 예술성이 한층 높아졌으며,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시대를 지나며 보편화되었다. 접선이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여성들이 사랑하던 섬세한 레이스나 준보석을 소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모티프를 그려 넣기도 했다.

3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든 접선. 나전 부챗살의 섬세한 조각이 돋보인다.
4 19세기 중국의 채색풍속화 접선. 부챗살로 대모, 금, 은, 상아, 조개 등 다섯 가지 재료를 사용해 화려함을 더했다.

말보다 더욱 은밀한 ‘부채 언어’
부채는 18~19세기 유럽에서 전성기를 맞으며 문화·예술의 흐름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당시에는 ‘부채 화가’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장식 미술의 거장이자 부활절 달걀 공예로도 유명한 러시아의 구스타포비치 파베르제Gustavovich Faberge가 만든 부채는 특히 독창적이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서 그는 영국으로 초청되어 왕실 및 귀족들을 알현하기도 했다. “부채는 유럽 여성의 패션 아이콘 중 하나였습니다. 매력을 뽐내는 액세서리로 쓰였고,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지요.”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초상화 속에서 자신의 매력 포인트인 아름다운 손을 자랑하듯 한 손에 보석이 박힌 부채를 든 자세를 취하곤 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벽장을 열어봤더니 온갖 멋진 부채들이 쏟아져 나와 그의 부채 편력이 증명되었다. 부채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말 대신 부채로 은밀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부채 언어’가 있었다. 한은경 관장은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발코니에 나와 빠르게 부채질한 뒤 발코니 문을 열어놓은 채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면 ‘금방 나갈게요’라는 뜻이고, 손가락으로 부챗살을 따라 문지르면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라는 뜻입니다. 부채로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지요. 여인이 자신을 향해 빠르게 부채질하면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라는 뜻이고, 빠르고 성급하게 부채를 접으면 ‘나 지금 질투하고 있어요’라는 뜻입니다.” 부채 언어가 널리 확산되자 파리에서는 부채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생기기도 했다.

가슴에 큰 바람 일으킬 때까지
“어딜 가도 부채밖에 안 보여요. 부채를 남달리 사랑하던 화가인 드가나 르누아르의 작품을 볼 때도 어떤 부채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는지를 살피죠. 부채와 관련된 패션, 풍속도, 에티켓 등 앞으로 연구하고 싶은 점이 많아요.” 하지만 부채에 관한 자료는 다른 공예품에 비해 취약한 편. 부친인 화정박물관 한광호 명예이사장이 한은경 관장에게 자신이 수집한 전 세계 다양한 예술품 중 부채를 물려주었던 것도 부채는 연구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50년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시간을 쪼개 희귀한 부채를 모으셨죠. 워낙 다채로운 예술품에 관심이 많으셨기에 아버지의 수장고에 있는 작품을 죄다 보지는 못했지만, 부채가 차곡차곡 모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요. 부채 특유의 곡선이 묘하게 제 마음을 사로잡았나 봅니다.” 그는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정리하면서 부채 연구소를 준비했고, 컬렉션 중 한국 전통 부채 분야를 확충했다.

1 조선 중기의 대모 접선. 부챗살에 검은 옻칠을 하고 선면에 들기름을 먹여 은은한 색을 연출했다. 
2 얇은 비단에 채색한 일본 부채. 갓대와 부챗살의 나전 문양이 정교하다.
3 19세기 광동에서 제작된 깃털 부채. 갓대와 부챗살에 금박 장식을 했다.
4 레이스와 얇은 비단으로 만든 유럽산 부채. 부챗살에는 화려한 나전 무늬가 있다.

“전 세계 부채 컬렉터들의 협회인 ‘팬 어소시에이션Fan Association’에서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제 컬렉션이 수적 및 질적 수준으로 보아 세계 2위랍니다. 1위는 영국 그리니치의 ‘부채 박물관’을 운영하는 관장님의 소장품이고요. 앞으로는 컬렉션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싶어요.” 이러한 바람을 실현하려면 부지런히 자료를 수집하고 답사를 다녀야 한다. 틈틈이 부채 전시회도 준비해야 한다. 2009년에는 일본에서 한바람 에디션의 주요 작품 2백 점을 전시하기로 했다. “부채 예술이 융성한 나라인 일본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이 제겐 참 의미 있는 일입니다. 부채를 각별하게 여기는 일본 관람객들과 제 작품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고, 부채를 향한 그들의 자세나 마음가짐을 한 수 배울 수 있으니까요.”사실 손님들에게 그의 애장품을 속 시원히 공개하기가 어렵다.부채 재질이 워낙 예민해서 한 번 펼쳤다가 오므려도 손상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과 부채의 매력을 나누려면 박물관을 여는 것이 좋지만, 그는 좀 더 신중하게 준비하겠다고 계획을 수정했다. “그저 ‘보관’을 위한 박물관은 의미가 없어요. 부채를 통해 부가적인 문화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생산될 수 있을 만큼 자료가 충분히 확보되면 멋진 박물관을 열어볼 생각입니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