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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재석 나에겐 현실이던, 초현실적 장면
살다 보면 어떤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이재석 작가에게는 군 복무 기간이 그랬는데, 그는 이 강렬한 경험이 자신에게 낙인처럼 새겨지기 전에 차츰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인터뷰 시간 내내 어디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재석 작가의 그림 속 뒤틀림과 생경함을 원경의 시선으로 다시 마주하며, 이 작품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보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표지가 층고 높은 레지던시에 머물며 대형 작품을 작업해보게 되었고, 앞으로 더 큰 것도 그려보고 싶다는 이재석 작가.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통해 시각적 아름다움과 압도감을 전하고자 한다.

이재석 작가는 목원대학교에서 서양화 전공 학사 및 석사를 졸업했고, 현재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레지던시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디스위켄드룸에서 개인전 를 열었고, 2021년에는 SeMA창고의 ,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의 <경계선> 등 여러 전시로 관람객을 만났습니다.
분해 또는 나열된 현실
총의 부품과 신체의 장기, 군용 텐트 그리고 나무와 돌산, 파도 등의 자연물… 이재석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적 요소는 이질적으로 조합되며 기이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이 비논리적 현상이 생생한 현실이고, 가장 사적인 이야기다. 그는 삶의 기억과 경험을 그림으로 그린다.

“군대 경험이 제 작업의 출발점이에요. 발목부상으로 군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한 공간에 누워 있는 50여 명의 사람이 나열된 신체 덩어리처럼 느껴졌어요. 게다가 군대에서는 사람은 마치 물건처럼 번호를 부여받는 반면, ‘총을 애인처럼 다뤄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총은 소중히 여겼죠. 신체와 기계가 부딪치는 경험을 계속하며 총의 부품과 신체 장기 사이의 기능적 유사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여기서 총의 방아쇠를 붉은색으로 표현하거나, 신체와 총을 장기와 부품으로 분해해 제품 사용 설명서처럼 재배치하는 등의 작업이 탄생했어요.”


‘세계관’, acrylic on canvas, 162.0×130.3cm, 2021
몸과 사물, 삶과 죽음 등 상충하는 두 주제의 결합을 담은 연작을 이어가던 이재석 작가의 시선은 코로나19의 발병으로 또 다른 모호한 경계를 지닌 대상에게 옮겨갔다. 그는 코로나19로 공간의 안팎이 엄격하게 나뉘는 상황을 텐트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텐트는 실외이면서 실내인 양면적 속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캠핑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유일하게 익숙한 텐트인 군용 텐트의 이미지를 사용하게 된 거예요. 텐트 역시 천막과 폴, 로프, 페그 등의 부속품으로 해체해 전체와 부분을 분리 또는 조립하며 화면을 구성하죠.” 11월호 표지 작품인 ‘A형 텐트_3’에서처럼 텐트 페그가 땅에 박혀 있지 않고 점선을 따라 공중에 떠 있는 표현은 전체를 구성 요소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 잘 드러나는 제품 조립 설명서 디자인을 차용한 아이디어다.


감정보다는 이성, 의미보다는 구성
처음 이재석 작가의 작품을 봤을 때,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전해졌다. 전체적으로 어둑한 색감을 사용해 그림에 그림자가 드리운 듯하고, 화면 안에는 부정적 동사로 설명 가능한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일 테다. 텐트 시리즈에서만 봐도 부속품은 서로 분리 및 조립되는 상황 속에서 ‘팽팽히 묶여 있고’ ‘중심을 관통하고’ ‘벗어나려는 듯 펄럭이고’ ‘긴장을 견디지 못한 채 풀려 있다’. 작업의 출발점인 군대에서의 경험과 이질적 감정이 계속 이어지며 작품 전반에 경직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텐트를 설치하는 방법_2’, acrylic on canvas, 130×130cm, 2020
“제 그림을 보며 극적 사연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아요. 작품 이미지와 다르게 진지한 담론을 담아내지 못하는 게 콤플렉스일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억지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그저 살면서 겪은 일을 그리는 중이에요. 작업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담기보다는 제대로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실 속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화면 상에 조화롭게 구성하는 것을 중요시해요. 예를 들어 텐트의 천이 어떤 방향으로 휘날리니, 폴이나 끈은 반대쪽으로 무게중심을 두어야 텐션이 유지되겠다는 등의 고민을 하죠. 스케치 단계부터 요소의 균형적 배치를 고려하고, 캔버스 위에서 작업할 때도 계속 바라보며 더 나은 구성으로 조정합니다.”


‘텐트를 설치하는 방법_3’, acrylic on canvas, 130×130cm, 2020
자연물로 확장된 시선
지금 이재석 작가는 또 한 번 시야를 넓히고자 하는 지점에서 있다. 군대에서의 일을 그린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돌이나 풀 같은 자연 속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작품에서는 개기일식이나 밀물과 썰물 등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자연적 현상도 자주 등장한다. “이전 작업에도 자연은 배경으로 계속 있었어요. 텐트 시리즈에서도 천만 걷어내면 그 뒤에는 바로 자연 풍경이죠. 1년 전부터 자연적 요소와 풍경에 집중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산과 논밭에 둘러싸인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레지던시에 머무르면서 더욱 그런 환경이 마련되었어요.”

이재석 작가는 거대한 자연도 나뭇잎이나 돌 같은 부품으로 이뤄진 유기체로 바라본다. ‘파도’ 시리즈에서처럼 겹겹이 이어지는 파도에 숫자를 매긴 시도는 한정적인 캔버스 위에 무한히 생기는 파도의 메커니즘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자연은 관람객이 화면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데도 좋은 소재다. “파도 위에 해와 달이 겹쳐 빛을 내뿜는 ‘개기일식’ 작품은 사람에 따라 파도를 구름처럼 보기도 하고, 파도가 움직이며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기도 해서 재미있어요. 지금은 올해 초에 전시를 진행했던, 나무를 신체 장기의 모양으로 표현하는 ‘오르간Organ’ 연작 시리즈 중 하나를 이어서 그리고 있어요.”


이재석 작가가 올해 5월부터 2년 동안 머물 예정인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레지던시. 자연을 곁에 둔 곳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성실하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재석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발짝 물러나 그의 그림을 바라보자, 인터뷰 전부터 머릿속을 뿌옇게 메우고 있던 ‘작품은 작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고하는 수단일까?’ ‘작가는 텐트 속으로 숨고 싶던 것일까?’ 하는 상상도 함께 사라졌다. “저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편이에요. 너무 몰입하면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그림도 제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제삼자의 시선이 담기죠.”

한 젊은 예술가의 인생을 지켜보는 마음으로 작품 앞에 섰다. 작업을 보며 느끼던 긴장감도 어느덧 잠잠해진다. “제 작품에서 어떤 의도를 찾으려 하기보다 화면 자체에서 오는 시각적 느낌을 먼저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대자연을 볼 때 에너지에 압도당하며 모든 감각이 얼얼해지는 느낌을 받잖아요. 저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시각적 전율을 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이재석 작가는 정교한 붓질을 통해 경험을 삶 속에 정박시킨다. 그리고 이재석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 이질적이고 뒤틀린 장면은 하나둘 모여 그만의 서사를 세상에 내보이고 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사건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어떤 은유적 장면을 찾아낼지 묵묵히 기다려보기로 한다.

글 박근영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