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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승택 매인 돌
세계 미술계 파워 피플 1위에 수시로 이름을 올리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일찍이 “이승택은 세계 미술사를 다시 쓸 작가”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미술상을 받으며 비로소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을 때도 우리는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일평생 ‘역逆의 예술’ ‘탈脫의 인생’ ‘반反의 전쟁’을 실천한 한국 실험 미술 선구자 이승택. 미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을 거꾸로 보고, 거꾸로 사고하고, 거꾸로 살아낸 그를 우리는 80세가 넘어서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91세를 맞은 올 7월, 개인전을 여는 그를 비로소 만났습니다.

1995년부터 살고 있는 연남동 집은 그의 또 다른 전시장이자 작업실이다. 거실 페치카 위에는 “세상의 진눈깨비를 맞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화상이 놓여 있다. 그 옆에 ‘묶기’ 연작의 모태가 되는 초기 작품이 있고, 그 아래 바닥의 캔버스와 실사 출력물에는 그가 수십 년 전 펼친 대지 미술과 실험 예술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승택 작가는 1932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났고, 홍익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1964년 전위적 조형성을 추구한 ‘원형회’에 합류한 후 예술 실험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2020), 런던 화이트 큐브 갤러리(2018),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2017), 갤러리현대(2022, 2015, 2014)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드니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이부다비,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무제’, 돌·나무·한지·노끈, 75.5×28.5×3.5cm, 1980년대


지하 작업실에서 그는 여전히 하루 여덟 시간 이상 그림을 그린다. 드로잉 작품은 1960~1990년대 펼친 대지 미술의 기록으로, 요즘은 그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묶기(Bind)’ 시리즈가 감동적입니다. 대부분 ‘묶다’라는 행위에서 속박을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해방’ ‘생명감’을 찾아내셨지요.
고향인 함경남도 고원에 살 때부터 러시아 사실주의 작품이 담긴 화첩들을 수없이 봤지요. 이미 중학교 시절 김일성 흉상을 사실적으로 제작해 징집에서 면제될 정도였으니까 평범한 조각 작업은 내게 도전적 작업이 되지 못했어요. 대학 때 스승인 윤효중 교수가 구해온 다양한 유럽 조각가의 화첩도 정독하면서 이미 조각의 흐름이 추상으로 넘어갔음을 직감했고, 어떤 조각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때 뭉쳐둔 노끈이 스르르 풀리는 걸 목격했는데, 그게 유기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덕수궁미술관에서 우연히 본 고드랫돌(발이나 자리를 짤 때 감아 매는 도구)의 모양이 흥미로워 비슷하게 만들어보기도 했고요. 딱딱한 돌이 말랑말랑해 보이는 게 오히려 생명감이 부여되는 것 같았습니다. ‘묶기’라는 행위가 묶이는 대상을 속박하는 게 아니라, 매인 흔적을 강조하기 위해 가미된 조각적 트릭이라는 거지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면서 새로운 본질을 끄집어내는 데서 오는 통쾌함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나의 ‘묶기’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미술 언어 대신 혁신적 미술 언어를 탐구한 나와, 그리고 내 삶과 똑 닮은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실 창문 앞으로는 1970년대부터 시도한 ‘바람’ 연작의 연장선에 있는 ‘나무종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천 개의 천을 1백여 미터의 밧줄에 박음질해 바람의 형상을 기록한 것으로, “조각의 정의는 조각이 아닌 것에 대한 탐구로부터”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 그 아래로 이번 개인전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어진 백자’ 연작이 보인다.

‘묶기’ 시리즈야말로 선생님이 세상을 거꾸로 보고, 사고하고, 살아낸 것의 증명 같습니다. 지금 갤러리
현대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제목은 <(Un)Bound>이고요. 선생님의 삶과 예술을 그동안 속박해온(묶어온) 것은 무엇입니까?

1950년대에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는 국전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출품하려면 심사 위원의 잣대에 맞춰야 했어요. 1955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모티프로 한 ‘설화’를 출품했을 때 한 좌대 위에 두 개 작품을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낙선했지요. 당시 나는 홍익대학교 교수들이 수주하는 굵직한 동상 프로젝트를 도맡아 할 정도로 사실적 조각 제작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그건 내가 추구하던 미술이 아니었지요. 미술의 역사는 부정의 역사 아니겠어요? 기존 사조에 반하는 시도의 연속이 20세기가 목격한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 새로 등장한 재료인 비닐의 부드럽고 질긴 물성을 이용해 작품을 발표했을 때도 다른 작품이 다 죽는다며 전시실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1970년에 홍익대학교 교정에서 ‘바람’ 퍼포먼스를 했을 때도 ‘빨랫줄 작가’라며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나의 새로운 시도를 동료 작가들이 인정해주지 않았지요. 속박이라기보다 무시당함, 그리고 예술적 담론을 공유할 동료가 없음에서 느끼는 답답함이었지요. 그래서 일찌감치 선후배나 동료와 거리를 두고, 관객이 있건 없건 제가 하고 싶은 미술을 마음껏 실험해왔습니다.

왼쪽 캔버스는 1960~1980년대 대지 미술 작품 ‘기와’를 최근에 드로잉화한 것. 바닥에 놓인 작품은 평생 아내가 이발해주는 머리카락을 붙여 만든 ‘캔버스 자화상’이다.
고향은 선생님의 예술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때가 열여덟 살이었지요. 1·4 후퇴 때 국군에 합류하며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땅은 눈에 선합니다. 고원은 독 짓는 마을로도 유명했고, 바람이 유독 세기로 유명했지요. 다리를 건너다가 바람에 휩쓸려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종종 있었습니다. 아마 유년 시절의 그런 기억이 나의 1960년대 ‘오지’ 작업이나 ‘바람’ 작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2층 계단참. 전통적 조각 재료 대신 책, 옹기, 지폐 등을 묶는 ‘비조각’ 행위를 살필 수 있다.
말 그대로 ‘反의 전쟁’ ‘逆의 예술’ ‘脫의 인생’을 펼치셨습니다. 퍼포먼스를 통해 바람·연기·불 같은 자연현상을 순간적으로 조각화한 ‘비물질’ 연작, 옹기·노끈·각목·한지 등 일상 물건으로 표현한 ‘비조각’ 그리고 ‘비주류’의 삶이 그 증거죠. 반역의 기질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한국전쟁 중 총상을 입어 군 병원으로 후송된 후 남쪽에 와 처음으로 스케치를 했을 때, 실력을 알아본 장교 덕에 국군 본부로 발령받았어요. 중고 서점에서 구한 책을 읽으면서 남쪽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미대에 들어가서는 외대 불문과에 다니던 고향 후배 김기린(1936~2021)과 왕래하며 니체나 사르트르 철학책도 읽게 되었지요. 미술의 역사도, 철학의 역사도 모두 부정과 거부를 통해 새로움을 추구했다는 깨달음이 생겨났지요. 역사에 남는 미술가가 되려면 세계에 없는 미술을 해야 한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서민의 생활 방식과 사물에서 발견한 미학(아무도 시도하지 않은)을 나만의 방법론으로 풀어내려고 했지요. 기존 조각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조각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작업실에 골동품이나 실패한 작업을 모두 모아뒀는데, 지금도 그 재료를 바라보면 아이디어가 봇물 터지듯 솟아나서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릴 때가 많아요. 대부분 미술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나는 “이게 뭐야?” 하고 사람들이 반응 할 때 그 작품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하고, 회의하게하는 작업이 미술의 목적이 아닐까 합니다.

화장실. 2000년대 AIDS 퍼포먼스 때 석고로 만든 남성의 성기, ‘지구놀이’ 연작이 전시돼 있다.
이승택 선생의 아내가 살뜰히 가꾼 정원에는 그의 자화상 조각, 돌과 FRP로 만든 ‘묶기’ 연작이 전시되어 있다.
‘反’ ‘逆’ ‘脫’의 자세는 녹록지 않은 인생과 연결될 테지요. 선생님이 전 성곡미술관 학예연 구실장 박천남 님에게 쓴 편지에 “일평생 왕따를 당한 나”라는 글도 있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反하는’ 예술가로 살게한 동력은 무엇인가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전쟁 후 앵포르멜 informel(제2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추상회화의 한 경향)이 들어오자 다들 그 방향으로 우르르 따라가고, 1960년대 중후반 옵아트나 팝아트, 미니멀리즘이 소개되니까 또 우르르 그 비슷한 작업이 쏟아지는데, 그게 무슨 미술인가 싶었어요. 나는 생계도 책임지면서 내가 하고 싶은 미술을 추구해야 했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것으로 소화해서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한국인 삶의 방식과 생활 기물에 착안한 한국적 아방가르드를 실천하고 싶었어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죠. 오래 산 덕분으로 지금은 나의 비조각 세계가 국제적으로 제대로 평가받고, 뉴욕의 레비고비 갤러리나 런던의 화이트 큐브 같은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하고, 구겐하임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미국 미술관 순회전에도 참여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反의 전쟁’을 치른 삶의 가장 큰 조력자는 누구인가요?
아내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누드 브론즈 작업을 할 때 모델 역을 마다하지 않았고, 미술 같지 않은 미술 작품을 하겠다고, 그것도 대작만 하겠다고 하는데도 아내는 늘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주었지요. ‘바람’ 작업을 할 때, 100m가 넘는 밧줄에 천을 일일이 박음질해준 이도, 벽 드로잉 작업 때 수십 미터에 이르는 노끈을 검정 천으로 싸매는 작업을 함께 해준 이도 모두 아내지요. 사실 아내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나보다 더 유명한 호랑이탈 공예 작가였는데, 그 작업은 내 종이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어요. 아내는 나의 영원한 뮤즈입니다. 나는 평생 술, 담배를 일절 하지 않다 보니 친구랑 어울리는 게 성향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게 아내는 최고의 친구이자, 연인이요, 아름다운 가정을 일구게 해준 우리 가족의 버팀목입니다.

1960년대에 자신의 곱슬머리를 잘 모아두었다가 시작한 ‘캔버스 자화상’ 연작은 이후 ‘모毛 서비스’ ‘털 난 캔버스’ ‘춤’ 같은 작품으로 연결되었다. 이 작품은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것. ‘무제’, 캔버스에 머리카락, 55.3×70.2× 2.5(d)cm, 2017.
사실(클래시시즘)-감정(모더니즘)-공간(추상주의)-개념 (현대미술)…. 저는 관람자로서 선생님의 미술이 이 모든것을 넘나들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스스로의 미술이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비조각은 지극히 개념적인 것에서 출발했지만, 예리한 조각적 테크닉 없이는 완성이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결과물이 하나같이 사물의 물성을 환치하며 생명감을 유발하지요. 관람자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작업을 ‘사실(클래시시즘)-감정(모더니즘)-공간(추상주의)-개념(현대미술)이 통합된 한국적 아방가르드’라 부르면 어떨까요?

세상을 거꾸로 보고, 살아내보니 세상은 어떤 곳이던가요?
세상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에 의해 굴러가는 듯 보여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다 보면 결국 진리는 드러난다는 것을, ‘거꾸로’의 삶을 통해 보았지요.

국내와 세계 미술 무대에 뒤늦게 알려지셨어요.
이 생에서 인정받기는 글렀다고 체념했는데, 팔순이 다 되어 갑자기 국내외적으로 인정을 받다 보니 새 삶을 선물받은 것 같은 감사함과 감동이 있습니다.

이번 개인전에 설치된 작품. 옹기, 돌, 천으로 감싼 나무뿌리 등 비조각을 시도한 그의 작품 세계를 살필 수 있다.
근원적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왜 예술을 하시나요? 선생님에게 예술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좋은 예술인가요?
가끔씩 생각해봅니다. 만약 1950년에 내가 북한을 탈출하지 못했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때 탈출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미술가 이승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새롭게 서울에서 정착해야 할 때 미대에 가겠다고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손재주가 있다고 선뜻 결정 할 일이 아니었어요. 다만, 내가 미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면, 역사에 남을 미술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의를 다진 후에야 가능한 선택이었죠. 미술은 미술가가 세상과 관계하는 태도라고 봅니다. 그 태도를 어떤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는지가 내 삶의 최대 숙제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고, 이슈에 대해 회의하게 하며, 새로운 시각을 자극하는 일이 무당과 연금술사를 대신할 21세기 미술가의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촬영하면서 선생님이 제게 흘리듯 건넨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술의 역사는 새로움의 역사다.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낳는다.” 91세의 선생님이 요즘 새롭게 꿈꾸는 ‘세계에 없는 미술’은 무엇인가요?
보다시피 내 작업실에는 아직도 손길을 기다리는 무수한 미완성의 작업과 재료가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생활 기물, 버려진 농기구, 가치치기한 나뭇가지, 자투리 끈 등 나의 미감을 자극한 것은 공교롭게도 한국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폐기한 것들이에요. 이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손이 먼저 움직여 작품이 되어갑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한 번도 다뤄보지 못한 아날로그 세대가 만들어내는 작업이지만 미래 세대가 봤을 때도 감동을 주는, 세상에 없는 여전히 새로운 미술이길 바랄 뿐입니다.


이승택 개인전<(Un)Bound>
기간 5월 25일(수)~ 7월 3일(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14 갤러리현대
시간 화~일요일 오전 10시~ 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02-2287-3500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갤러리현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