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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그룹 감창일 대표의 제주도살이 위대한 작가를 꿈꾸는 슬픈 호랑이에게 건배
기업가·컬렉터·예술 후원자의 계보에 예술 생산자라는 카테고리를 첨가한 씨킴. 그는 요즘 제주도의 아라리오 스튜디오에서 하루 10시간씩 그리고 또 그리는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얼마 전 그는 ‘반 고흐의 자화상’을 완성한 후 친구들에게 전화해 “야, 이제 내 방이 보인다, 화가 방을 찾았다”라며 흥분했다.


아라리오 제주 스튜디오 2층. 하도리 철새도래지가 눈앞에 와닿는 이곳에서 씨킴은 오로지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그림 앞에 무릎 꿇는 구도자의 자세로 하루에 10시간씩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제주 하도리의 철새도래지 앞으로 펼쳐진 바다, 주린 배를 어루만져 주는 밥공기처럼 뜨끈하게 마음을 만져주는 바다다. 그 옆엔, 한 곳에 머무는 법이 없으나 늘 그곳에 있는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닮은 사나이가 바람을 맞고 서 있다. “하도리는 인간이 탐욕스러워질 수 없는 동네입니다. 하느님이 날 위해 대기시켜둔 곳이죠.” 종달리 오름이 바로 보이는 외딴 섬마을에서 씨킴(김창일 씨는 본명보다 이름의 이니셜인 CIKIM으로 더 유명하다)은 지독한 셀프 트레이닝 중이다. 아라리오 제주스튜디오에서 매일 10시간씩 손톱이 닳도록 그림만 그리고 있다. 100호·200호짜리 대형 캔버스에, 소형 드로잉에나 쓰는 파스텔·콩테로 칠하고 문지르고 또 칠한다. 흩날리는 목탄 가루에 뒤범벅이 되고, 손으로 칠하다 못해 가장 착실한 도구인 ‘온몸’으로 만들어내는 액션 페인팅.“나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갑근세도 한 번 안 내본 사람처럼 가난한 표정으로 그 사나이가 말했다.

세상이 그의 다른 모습을 보기 바빠 작가라는 타이틀을 편히 붙여주지 않았던 사람, 30년 가까이 비즈니스와 작품 수집에서 성공의 탑을 올린 사람, 이제 온갖 수식을 벗고 오직 작품으로만 평가받겠다는 사람, 씨킴. 열정적인 컬렉터들이 마침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흔한 가십이지만, 씨킴처럼 작정하고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경우는 없다. 금 긋기와 편 가르기로 이루어진 일부 프로 미술계에선 그의 미술을 두고 오리지널리티 운운하고 있다. 나는 이쯤에서 ‘씨킴다움’이라는 고유명사를 이야기하고 싶다. “호랑이가 어느 날 식성에도 맞지 않는 토마토로 토스트를 구우려 합니다. 맘대로 되지 않자풀 죽은 표정이네요. 세상에 못할 일 없다 믿었던 호랑이는 한없이 작아짐을 느낍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토마토 박스를 잔뜩 쌓아놓고 끈질기게 토마토를 구워봅니다. 한번 될 때까지 해볼 심산이죠.” 이 호랑이는 바로 씨킴이다(지난달 치른네 번째 개인전의 주제도‘슬픈 호랑이, 구운 토마토’였다). 미술계의 염려와 칭찬을 동시에 받는 씨킴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이게‘씨킴다움’이다. 또 다른 불확실함에 도전하는 광기(용기라 하기엔 더 힘찬), 그 도전을 위한 자기 감금과 극기 훈련, 주위의 냉소와 무시를 보충 에너지원으로 삼는 배짱.

1 작가 씨킴에게 일용할 안식을 주는 장소이자, 작업실의 연장인 하도리 집. 복층으로 뚫린 거실 중앙에 간결한 계단이 자리 잡고 있다. 차곡차곡 정리된 풍경은 촬영을 위한 연출이 아니라, 원래모습 그대로다.
2 네 번째 개인전을 위해 이 집 안에 있던 작품을 모두 내가고 나자, 빈 벽이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한달음에 그린 ‘Don’t be silly kitty’. 선은 어긋나고, 고양이 꼬리는 길이를 잘못 계산해 잘렸는데 그게 오히려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이 그림처럼 실수도 자연스럽게 순수하게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단다.
3 서재 벽에 걸려 있는 ‘슬픈 호랑이’ 시리즈 중 하나. 토마토를 잔뜩 쌓아놓고 끈질기게 토마토를 굽고 있는 슬픈 호랑이가 보인다. 씨킴 자신이기도 하다.
4 씨킴 인생의 화두 ‘Do you have a dream?’은 이 그림에도 박혀 있다. 유학 간 아들 기쁘게 해주려고 그린 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사울 왕의 두통을 가라앉혔다던 다윗의 하프처럼 치유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고, 명치 끝을 달아오르게 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들어간 빙초산처럼, 오스스 소름이 돋는 ‘미완의 정서’가 있다. 무신경함에 날아드는 카운터 펀치! 토마토로 토스트를 굽던 슬픈 호랑이는 어느 순간 외딴 섬에 선 고슴도치가 되었다가(AlphabetI), 거울 속 고독한 자신을 발견하는 순록이 되었다가(Alphabet E), 이내 술의 힘을 빌려 길거리에서 고성방가하는 소심한 도롱뇽 자매도 된다(Alphabet S). 이 생뚱맞은 그림 앞에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환해지고 실실 웃음이 난다. 슬금슬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정말 어린애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매일 매일의 구체적인 삶이 배어 있는 어른의 그림 일기 같은. 삶과 예술의 틈에서 좌절도 하고 희열도 느끼는 그런 그림이요. 나는 정말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 유명한 개발코(재복이 들어 있다는 복코)를 찡긋거리며 씨킴이 말했다. ‘보면 볼수록 차돌에 참기름 바른 것 같은 사람이다’라고 딴생각하던 찰나, “위대한 작가는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마음이 그림과 똑같은 작가예요. 마음의그림이 곧 캔버스에 그려지는 작가.”라고 그가 또 말했다. 왜 예술가들은 예술에 자신의 인생을 함몰시키고, 왜 성공한 사업가·컬렉터·예술후원자 씨킴은 그 예술가의 가시밭길을 가려 하는가.

1 씨킴은 바닥에 내려진 캔버스 위에 국자로 물감을 붓고, 흘리고, 뿌리고, 던지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넘치는 에너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2 5톤의 조각품을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설치된 메인 스튜디오와 씨킴. 복층 구조로 만든 2층 작업장에서 1층 스튜디오를 내려다보면 제일 먼저 이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아라리오 갤러리 달력, 목탄 가루를 막기 위한 마스크, 아이디어를 얻는 사진 자료, 그리고 호랑이의 웅크린 등을 닮은 씨킴의 등.


1
아라리오 제주 스튜디오 옆에 지은 집 거실도 물감통, 스프레이, 국자, 신문, 장갑, 물감 자국이 점령했다.
2 그의 집 바람벽에 적어놓은 생활 수칙들. 그 밑은 그의 작품 ‘반 고흐의 자화상’의 모태가 된 이미지.
3, 4, 씨킴표 그림 도구.


매미의 꿈
천안 야우리 백화점의 김창일 회장(씨킴) 집무실에는 ‘매미의 꿈’을 적은 영문 동판이 걸려 있다. “드림드림드림(맴맴맴 우는 매미 소리가 그에겐 이렇게 들렸다). 사업하다 돈이 없어 어려워졌을 때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다. 수면제 30알을 들고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꿈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나의 예술로 표현하겠노라, 결심했다. 그때부터 드림드림드림.” 발음이 타닥타닥 귀에 꽂히는 그의 명쾌한 대사 중 3할은 꿈 이야기다. 길게 이야기하고픈 상대를 만나면 먼저 묻는 것이 “Do you have a dream?”이요, 유학 간 아들녀석 기쁘게 해주려 그린 그림에도 “Do you have a dream?”이 쓰여 있다. 죽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운명을 알기 때문에 꿈이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나는 떠나더라도 그 꿈만은 살아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열망의 이야기다. 아동기의 판타지 같은 꿈을 가진 이가 씨킴이다. 기업가-컬렉터-예술 후원자로 진화한 것도 이 꿈 덕분이요, 아라리오 천안, 서울, 베이징을 거쳐 뉴욕까지 계획하고 있는 것도, 대기업 과장 연봉 수준의 지원책으로 아라리오 전속 작가를 키우는 것도 꿈 덕분이다. 이력의 그 마지막 칸에 ‘예술 생산자’라는 카테고리를 끼워 넣고 늦깎이 작가로 합류한 것도, 하도리에서 면벽수도하듯 그림만 그리는 것도, 그렇게 그리고 그려서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것도 모두 매미의 꿈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그리지 않으면 터질 것 같았어요. 처음엔 원을 그렸고, 그다음엔 비가 무지개가 되는 과정을 그렸어요. 그렇게 작정한 지 7년. 회화도 하고, 콜라주, 설치, 사진도 했죠.이젠 무지개가 사라져 흔적은 없으나 그 존재는 분명히 어딘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나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드림드림드림.

하도리 미스터 킴
3천 점의 미술품을 소장한 세계적 큰손 씨킴이 아닌, 하도리 사는 미스터 킴은 새벽 3, 4시에 일어나서 명상, 운동, 작업만으로 하루를 채운다. 365일 거르지 않던 동네 목욕탕행 대신(하도리엔 목욕탕은커녕 담뱃가게도 없다), 자신을 쏙 빼닮은 차우차우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산책을 한다. 스튜디오를 나눠 쓰는 아라리오 전속 작가 이지현·이진용·레슬리 씨와 세끼 밥을 나눈다. 또 그들과 경쟁하듯 열심히 그린다. “작가들도 내게 자극받아요. 난 부지런하니까!”(딱 샴푸 선전하는 고소영 톤으로) 그는 바닥에 내려진 캔버스 위에 영웅적인 제스처로 몸을 싣는다. 국자로 붓기, 뿌리기, 던지기가 벌어지는 액션 페인팅! 그의 집 바람벽엔 ‘술은 No, 음식은 조금’ ‘귀는 2, 입은 1’이란 메모가 붙어 있다. ‘술은 No’ 밑엔 소심한 글씨로 덧쓴 ‘술은 와인으로’도 보인다. 정신적 스승이자 도반으로 여기는, ‘내 마음의 보석 상자’라고 부르는 아내와도 생이별 중이다. 대신 미스터 킴은 그의 무기이자 또 닻이었던 순간적 감각들을 정제해나가고 있다. “어우, 난 요즘 흥분 상태예요. 자제해야 해요. 그러기에 하도리, 좋습니다.”

요즘 씨킴은 하도리 해안에서 발견한 신발, 자동차 시트, 냉장고 등을 모아 그 생을 다한 쓰레기들을 예술의 형태로 만들고 있다.

술 마시는 도룡뇽 자매를 그리던 어느 날, 아라리오 스튜디오 오프닝 파티에 놀러 왔던 작가가 씨킴이 그려놓은 그림을 낙서처럼 뭉개버렸다. 한 달 밤낮을 헤매며 만들어가던 미의 기준이 다른 이의 장난으로 망쳐지는 순간, 분노와 충격이었다. 토마토를 구우려다 실패한 호랑이 씨킴의 포효가 시작되었고, 캔버스도 같이 울었다. 1시간 정도 지나니 그가 그린 도롱뇽 그림보다 술 취한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망친 그림이 더 좋아 보였다. 분노는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캔버스에 붙였다. 오랜 시간 힘 모아 그려냈던 것들이 뭉개지고 문드러진 토마토들과 함께 흘러내렸다. 캔버스는 점점 추상으로 변했다.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씨킴다움을 말하는 에피소드다. 오랜 고뇌 속에 실험하던 것들을 고스란히 제로화할 수 있는 용기. 어떤 다른 삶의 시리즈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고감도의 안테나. 지금은 그 안테나가 하도리의 어느 회색 건물 옥상 위에 장착돼 있다. 

‘End’ 보다는 ‘And’
“What is art? 무엇이 좋은 미술인지, 나쁜 미술인지 아직 못 찾았어요.” 예술 세계 최고의 100인 중 42위(2006년 독일의 권위 있는 잡지 <모노폴> 선정)라는데도, 매년 1백50억 원을 작품 컬렉션에 쏟아 붓는 세계적 컬렉터라는데도, 그리지 않으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린다는 열망의 작가임에도 그는 아직 모르겠단다. “미술이라는 꿈은 가면 갈수록 깊고 넓어져서 내가 더 초라해지네요.” 세상이 그랬듯 미술도 그에겐 End 없는 And의 세계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 내 과거만 봐요. 과거의 내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비웃지만 내가 밤에 읽어 내려간 수많은 이야기는 보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내가 만들어낸 토스트를 먹어보고 맛있으면 그걸로 돼요.” 앞으로도 그의 전진과 표류는 계속될 것 같다. 그 전진과 표류의 배 위에서 자신에게 건배! 토마토로 토스트를 굽는 슬픈 호랑이에게 우리도 건배! 

씨킴은 천안의 고속·시외버스 터미널 사업을 시작으로 야우리 백화점, 영화관 야우리 멀티플렉스, 외식사업을 이끄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세속적인 욕망에 안주하려고 할 때 ‘욕망을 던지고 붓을 잡아라’는 마음의 충동질이 일었고, 미술품 수집가가 되었다. 예술 불모지 천안에 아라리오 갤러리를 세운 이후 아라리오 서울, 아라리오 베이징, 아라리오 뉴욕(내년 초 개관 예정)으로 세를 넓히고 있다. 젊은 작가의 창작 요람을 꿈꾸며 지난해 아라리오 제주 스튜디오도 문을 열었다. 이곳은 아이디어가 샘솟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생각곳’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생각곳은 메인 스튜디오, 개인 스튜디오 7개, 전용 요리사가 배치된 식당, 작가들이 쉴 수 있는 객실 12개, 6개의 방이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구성되어 있다. 곧 아라리오 제주 스튜디오 옆에 아라리오 제주 갤러리를 세울 계획이다. 아라리오 제주 스튜디오의 설계는 옴니 디자인(02-538-8224)의 이종환 소장이 맡았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