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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부부들의 新농부가 농사짓듯 삶을 경작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땅은 떠나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데에는 학력이 중요하지 없고 학벌은 더더군다나 중요하지 않다. 나이나 성별도 따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곡식을 재배하는 마음, 자연을 섬기는 겸손한 자세에 있기 때문일 터이다.


도시 삶을 접고 귀농歸農 또는 귀촌歸村으로 인생 2막을 개척해 성공적인 사람살이를 보여주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성공적인 사람살이란 빌 게이츠처럼 세계적인 기업가이자 재산가가 되는 것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알고 그 바람을 자연스럽게 성취해가는 데서 성공의 첫걸음은 시작된다.

귀농이나 귀촌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원하는 바도 다르다.경남 마산시 자유무역지역에 있는 세계적인 휴대전화 회사 노키아사의 한국법인 노키아티엠씨NOKIA tmc를 18년 동안 성장하는 회사로 이끌었던 이재욱 명예회장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도시농업 형태로 농사를 짓다가 은퇴 후 부인 이정자 씨와 함께 마산시 외진 마을에서 농부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임파선암이라는 사경에서 삶으로 돌아와 귀농한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농어촌이 행복할 때 진정으로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인간다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고민하며 살았던 김광화·장영란 부부는 ‘살아 있음’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태어남을 위해 서울살이를 접었다. 경상남도 산청을 거쳐 전라북도 무주에 정착해 사는 귀농 생활11년째, 귀농하던 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 정현 양은 스무 살이 되었고 두 살이었던 아들 규현 군은 열세 살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려하지 말고 자립하자. 우리 부부 힘으로 서보자’라며 서로간의 소통에노력하던 첫 마음은 자연 교육으로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늙으면 귀향해 살자’던 이환의·오미정 부부는 계획을 앞당겨 1997년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귀향했다. 건설회사가 입주 뒤 등기 전에 입주민의 동의 없이 아파트를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거액을 대출받고 고의부도를 내면서 일어난 2년간의 투쟁 생활이 결정적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도시 생활의 미련을 접은 이환의 씨 부부는 ‘마음의 행로’를 따라 다섯 살이었던 큰딸 아리수, 세 살이었던 둘째 딸 이지와 자연으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못 살겠다는 마음의 반동 작용이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 알몸이 된 겨울나무가 봄을 준비하듯 자연스럽게 선택한 일이었다. 귀농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하고 농사를 지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아내의 손가락뼈가 말썽 날 정도로 지독하게 농사를 지었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서. 이런 그를 두고 토박이 이웃들은 ‘아름다운 독종’이라고 부른다.

농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머리로 농사를 짓고 농부들은 가슴으로 농사를 짓는다. 자연의 사랑을 모르면, 겸손하지 않으면 성공한 농사꾼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농사의 근본과 이치를 안다면 귀농하지 않아도 성공한 농사꾼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 공부하는 일, 회사 일…. 이 모두가 경작으로 이뤄지는 것 아니겠는가.

1 이재욱 씨가 강아지 호롱이와 논둑을 걷고 있다. 
2 보리말리던 그물을 정리하는 부부.
3 모내기를 하지 않는 태평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이재욱 씨는 2~3일에 한 번씩 논을 살펴보며 작황 상태를 살핀다.
4 부인 이정자씨가 오리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5 고추가 잘자라도록 대를 세우는 이재욱 씨. 
6 텃밭으로 야채를 따러 가는 부부의 뒷모습.

우리의 미래는 농어촌에 달렸다
이재욱·이정자 부부
노키아티엠씨의 이재욱 명예회장은 6년 전 임파선암을 호되게 앓았다. 생명을 회복한 후 그는 ‘제2의 인생이니 무슨 일을 하면서 고민하며 살 것인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대수술이었던 듯 목 부위에는 아직도 수술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발음하는 게 조금 불편해 보인다. 삶으로 돌아온 후 그는 도시 농업 형태로 벼농사를 짓던 경상남도 마산시 진북면 영학리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힘이 있나요? 남편이 결정하면 따라야지요(웃음)”라고 이야기하는 부인 이정자 씨도 함께. 이제 두 사람은 이곳 사람이 다 되었다. 하염없는 시간이 막막해 동네 할머니와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이 뭐 하는 일인가?’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던 부인 이정자 씨도 지금은 농사지으랴, 닭과 오리 키우랴, 바쁘다.

그는 노키아티엠씨의 CEO로 활동을 시작한 지 2~3년쯤 지나면서 이곳에 땅을 마련했다.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반듯한 땅을 팔려고 하지 않을 때여서 작은 천수답(물의 근원이나 물줄기가 없어 비가 와야 모를 내고 기를 수 있는 논)을 구입하기 시작했다.“남한테 말 못할 일을 돌파해가야 하는 회장만의 임무가 있어요. 그 난관들을 돌파하려면 많은 작전을 짜야 되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요. 스트레스를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다른 데 머리를 써야 하는데 등산을 하면 머리가 맑아지니까 또 회사 일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망치로 뭘 만들거나 밭을 가는 것처럼 손으로 뭔가를 하면 잡념이 일어나지 않아요.” 회사 경영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농사일은 그에게 많은 성과를 안겨주었다.

그가 재임하던 18년 동안 연평균 30% 이상의 고속 성장을 한 것이다. 부임하던 1985년 하루 2백 대였던 휴대전화 생산량이 2005년에는 연간 5천만 대를 생산하는 튼실한 회사가 되었다. 성공적인 기업 경영의 노하우가 위기의 우리 농업으로 이양된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은 말해 무엇하랴.“신바람 경영을 했죠. 소프트웨어는 내가 즐거워서 일하고, 우리 직원들이 즐거워서 일하고, 협력회사도 즐거워서 일하고, 투자회사들도 기뻐하며 일하는 것이죠. 하드웨어적으로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노키아와 세계 최고의 솔직함과 기술을 갖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판매망을 갖고 있는 미국 회사, 이렇게 셋이서 삼위일체가 되어 좋은 결과를 냈지요.” 신바람 정신을 경영에 접목한 그는 가장 약한 사람과 함께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랫사람이 일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해주고, 긍정적인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아랫사람이 자유롭고 자신 있게 일할 수 있도록 하니 성공 의지를 자발적으로 갖게 되었고, 성공을 위해 스스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적자로 문 닫을 위기에 있던 기업을 꾸준히 성장하는 기업으로 발전시킨 그가 은퇴 후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농업과 농민의 자리로 온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6년 전 알게 되었던 이영문 씨의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그의 논에 가보니 다른 논들은 모내기를 마쳐 푸릇푸릇한데 그의 논만은 갈색이다. 자운영이 피었다가 진 논에 그대로 볍씨를 뿌려 싹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그렇단다. 2~3일에 한 번씩 20여 개의 논을 둘러보며 볍씨가 싹을 잘 틔우는지, 게릴라(잡초)의 상태는 어떠한지 살핀다. 잡초와 벼를 함께 자라도록 한 뒤 논을 담수시켜 물에 약한 잡초를 약하게 하거나 논의 물을 빼서 논을 건조하게 해 물만 좋아하던 잡초를 죽이거나 약하게 하고 때로는 제초제를 때에 맞춰 뿌린다. 때를 맞추지 못하면 잡초의 생명력이 벼의 생명력보다 승하게 되는데, 그간에는 때를 맞추지 못해 실패한 적이 많았다. “한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도 제각각이듯 하나의 논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른 상태인 곳이 있는데 이를일률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실패의 주요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사진 촬영을 하고, 분석하며 관리한다. 그가 예상하는 올해 생산량은 40가마 정도. 이영문 씨만의 태평농법 버전이 빛을 발하는 원년이 될 것 같다.

“원인을 찾을 때 ‘왜?’라는 질문을 다섯 번만 하면 해답이 정확하게 나와요. 한미 FTA도 마찬가지입니다. 농가 피해를 보상하고 보전해주는 방어적인 정책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격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농민들이 교육비와 의료비를 벌기 위해 농사를 지으니 대량 생산을 하게 되는 현실에 기반한 정책이 나와야 해요. 전 국민에게 의료비·교육비를 1백% 지원하는 EU·유럽 수준은 아니더라도 농어민에게만큼은 의료비·교육비를 지원해서 피해를 입고 있는 농어민을 살려야 합니다. 앞으로 조금만 지나면 어느 순간 식량은 큰 무기가 됩니다. 그때, 모든 산업이 망하는 최악의 경우라 해도 농어촌만 살아 있으면 우리 국민 모두가 사치하지는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농어촌을 피폐하게 하면 안 됩니다. 땅과 갯벌을 살려야 해요.” 아무리 2, 3차 산업이 유행하고 자본의 흐름을 주도한다 하더라도 영원하지는 않다. 아무리 인기 있는 산업이라도 붐이 가라앉으면 세계 최고의 몇 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1차 산업인 농어업은 사람이 있는 한 지속된다. 미국이 자동차 시장을 내주면서 농산물 시장을 요구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유전자가 변형되지 않은 순수한 곡식을 갖고 있고, 아직은 순수한 자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지금의 위기를 잘 살리면 오히려 천년대계의 기반을 세울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생업으로 농사를 지으며 값비싼 농산물을 생산하기 어렵다고 한다. 농어민의 가계에 부담을 주는 큰 장애를 거둬주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그는 기업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농어촌이 살아나면 실업난으로 방황하는 총명한 청년들도 농촌에서 희망을 일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1
장영란·김광화 부부.
2 밭에서 캐 온 감자와 양상추로 점심상을 차렸다.
3 오디를 따는 규현 군

아이들의 성장은 부모를 성장시킨다
김광화·장영란 가족
아침상을 물린 뒤 김광화·장영란 씨 가족을 따라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를 따러 갔다. 김광화 씨와 아들 규현 군은 나무 위로 올라가 오디를 따고 장영란 씨와 딸정현 양은 나무 아래서 오디를 딴다. 부인 장영란 씨는 취재진에게 함께 일하기 전에는 사진 촬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과 객으로 있을 때와 함께 일하며 가족의 일원이 되었을 때 글과 사진의 전후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취재를 하는 사람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주객 없이 함께 오디를 따며 수다를 떤다. 올해 누나와 함께 공동으로 감자 등의 자립 농사를 시작한 규현 군이 기자에게 묻는다.

규현 : 누나는 주특기가 뭐예요?
기자 : 글쎄요, 딱히 주특기라고 할 게 없네요….
규현 : 우리 누나 별명이 ‘탱이’인 걸 아세요? 그 별명은 ‘잠탱이’의 준말이래요. 누나가 학교 그만두었을 때 내리 잠만 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기자 : 저도 잠자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어요.(웃음) 상상 군(김광화·장영란 씨는 두 자녀에게 인디언식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상상이 풍부한 규현 군의 별명은 상상이다)의 주특기는 뭔가요?
규현 : 글쎄요?

엄마 : 우리 규현이 주특기는 똥 잘 싸는 거예요.(일동 웃음)
규현 : 그래도 엄마만은 못하죠.(일동 폭소)김광화·장영란 씨가 귀농을 선택한 뒤 처음 정착했던 곳은 경상남도 산청의 간디공동체이다. 그리고 다시 무주로 이주한 것이 1998년. 산골 생활에 자리가 잡힌 2001년 봄,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정현 양은 중학교 1학년까지, 규현 군은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학교에 취학의무유예원을 내고 집에서 부모와 함께 지식 공부를 하거나 함께 논밭을 일구거나 6평짜리 작은 아래채를 짓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올해 스무 살인 정현 양은 이미 자유기고가로 데뷔해 활동하고 있는데, <개똥이네 놀이터>라는 어린이 잡지에 요리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기자 : 스스로 원해서 학교생활을 그만둔 뒤 부모님과 생활하며 공부를 했는데,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요?


4 길거리 농구를 하는 부자.
5 수수 씨앗을 심으로 가는 가족.

정현 : 저는 사는 것과 공부를 분리하지 않아서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밥을 해 먹으면서 요리 공부라고 주장하면 다 공부인 거고, 그걸 붙잡아서 글로 쓰면 글이 되잖아요. 아버지는 나랑 공부하면서 좋았던 것이 있으세요?
아버지 : 무지무지 많지.(웃음) 성장하는 것을 너희들이 생생하게 보여주니까 어른인 우리도 성장하는 거지. 그리고 부모 자식 사이에 서로 친구가 되고, (너희랑) 같이 생각을 나눌 수 있고, (너희들이)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하잖아. 어슬프게 부부싸움 하다가는 너희들에게 혼나기도 하고. 그리고 ‘언제 시집갈래?’ 하는 고민을 정말 안 해도 되고. 오히려 좀 더 늦게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웃음)
정현 : 엄마는요?
엄마 : 나는 지식 공부를 같이 하면서 편안하게 똥 싸러 갈 수 있어서 좋았어. 그전에는 내가 누군가와 공부를 하고 있다가도 선생인 나도 똥 마렵다는 걸 느끼지 못했고, 설혹 공부 중에 느낀다 하더라도 편안하게 화장실에 다녀올 수 없었다는 걸 느끼게 되면서 편하고 좋더구나.(웃음)

이들의 대화를 참관하니 친구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 같다. 서로가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펼친다. 막히는 데가 없고, 때로는 해설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 가족이 모든 일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사정에 따라 독서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농구를 한다. 감자를 캐다가도 자기 일이 있으면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되면 밥상 앞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이 가족은 자신들을 ‘밥상 공동체’라고 부르나 보다. 이들은 각자 먹을 밥은 각자 푸고, 설거지는 나눠 한다. 밥을 먹으며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에 대해 대화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솔직하니 아이들도 부모에게 솔직하고, 아이는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는 아이에게 묻는다.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면서 제자이고, 마주보는 거울이다.“부부 간의 소통이 잘되면 아이 교육은 덤으로 잘되는 것 같아요. 부모가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고, 같이 먹고 자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줘요.”(장영란 씨) “자식 키우는 것과 곡식 키우는 것이 똑같지는 않지만 많은 점에서 와 닿는 게 있죠. 같은 곡물도 다른 씨앗과의 거리감이 적당하고 잡초가 적을 때 월등히 잘 자라요. (김광화 씨)

이들이 짓는 또 하나의 농사부인 장영란 씨는 귀농 전부터 ‘한국글쓰기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해온 프리랜서 작가. 남편 김광화 씨는 귀농을 한 뒤 꿈도 꾸지 못했던 글 쓰는 농부가 되었다. “고추는 고추대로, 벼는 벼대로, 그 본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사람 욕심대로 했다가 농사를 망치기 쉽다. 고추 기르는 법은 고추한테 배우고, 오리 기르는 법은 오리한테 배우는 게 가장 좋다. 그렇다면 부모 노릇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지 않겠나.” 두 사람이 함께 아이 교육에 관한 경험을 담은 <아이들은 자연이다>(돌베개)에는 귀농과 교육에 관한 그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은 장영란 씨가 쓴 책으로, 절기와 농사 이야기, 그리고 장영란 씨 댁의 밥상과 음식 만드는 방법을 정감 있게 소개한다. www.nat-cal.net


1 오미정·이환의 부부.
2 이환의 씨 부부는 오리농법으로 벼농사를 한다. 이 농법은 모를 심은 뒤 일주일을 전후해 갓 부화한 아기 오리를 논에 풀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리의 움직임에 의해 생기는 탁수가 잡초 씨앗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고 오리 똥은 거름이 된다. 
3 두 딸을 위해 부부가 만든 그네. 10년 전부터 만들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만들지 못하다 올해 겨우 실행했다. 

본래 쓸모없는 것은 없다
이환의·오미정 부부

이환의·오미정 부부는 올해로 귀농 생활 11년째다. 이환의 씨는 서울에 살 때 광고회사, 기업 홍보실 등에서 근무했다. 아침 9시면 정확히 출근해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문화가 맞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입주한 아파트가 등기도 하기 전에 부도가 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재산권 확보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1년 반 동안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겪었다”고 한다. 아파트 사건이 정리되던 1997년 이환의 씨 부부는 도시생활에 대한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귀농을 결심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세 곳 정도의 귀농 지역을 방문했던 두 사람은 유기농업이 발달해 있고 귀농 선배들이 많고 또 두 자녀의 또래 친구들이 많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을 선택했다. “농촌에 와서 보니까 정해진 일에 매이지 않아도 되고 일도 이것저것 많아요. 이것 하다가 하기 싫으면 저걸 하면 돼요. 농사일은 동시에 다 해야 되거든요. 논에 거름을 내야 되고 밭에 완두콩 북도 줘야 되지요. 농촌에 와서 제일 좋은 게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더라고요.”

그는 이번 취재를 어렵사리 수락했다. 워낙 인터뷰도 하지 않는 편인 데다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비교적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는 요즘도 아침 5시 30분부터 캄캄해지는 저녁 8시 반까지 일을 한다. 가장 바쁜 농번기라 그렇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귀농한 후배 한 명의 농부 입문을 도와주고 있어서 더욱 바쁘다.

경작 규모는 논 5천 평, 밭 2천5백 평. 벼농사를 기본으로 생강, 마늘, 감자, 무, 배추, 당근, 고구마, 참깨, 수수, 알타리, 양파 등 양념 작물을 함께 재배한다. 임대농으로 출발한 그의 귀농 이듬해 경작 규모가 논 2천4백 평, 밭 6백 평, 두 사람 소유의 밭이 4백 평이었으니 놀라운 도약이다. 지난해 농사로 얻은 수익은 약 2천만 원. 오미정 씨에게 “적자 아니냐”고 물으니 “먹는 것을 자급하고, 규모에 맞춰 줄여 살고 있으므로 적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농사가 해마다 되풀이되지만 변수가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어 땅에 거름이 많은지 적은지, 모를 심을 때도 30일 키운 것인지 40일 키운 것인지에 따라 달라요. 안 좋은 변수인 태풍도 한 번에 몰아서 오면 모든 게 바뀌어요. 변수들이 다 다르니 해마다 새롭고 재밌지요. 같은 농사를 짓고 같은 품목을 심는데도 잘되는 때도 있고, 못 되는 때도 있어요. 실험정신을 살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싶은 대로 맘껏 해볼 수 있으니 저에게는 딱 맞습니다.”이들의 땅 7천5백 평은 온전한 땀의 결실이다. 초기2~3년간은 50여종의 곡물을 심어 농사의 기본과 특성을 익혔다.

그러나 1998년, 소득 작목으로 일군 생강 농사가 풍년이 되어 값이 폭락하는 일이 생겼다. 두 사람은 2톤에 달하는 생강을 장마다 돌아다니며 팔았다. 남편은 확성기로 팔고, 아내는 차에서 팔았다. 때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작업하는 때도 있었다. 고된 노동으로 부인 오미정 씨의 손가락 인대를 수술하는 일도 있었다. 열심히 농사짓는 모습을 어여삐 여긴 동네 노부부가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경작하는 땅도 소개해주었다고 하니, 그 자세와 품새가 어땠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초기에는 땀 흘려 일할 때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도시에서 살 때와는 달리 20~30회씩 헹궈야 하는 빨래도 힘들어했어요. 이렇게 육체노동을 버거워했는데 3~4년 차의 어느 날 땀 흘리며 일하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그 순간이 지나니 힘들어 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4 여러 농기구들. 5 밭에서 바로 뽑은 당근. 6 밭에서 풀을 뽑는 부부.

오미정 씨는 첫해 농사를 지으며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고 사람은 그저 적절히 돕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물 거두는 것이 갓난아이 키우는 것과 같아서 사랑을 주고 보호해주어야 하더라고요. 농사일을 하며 기쁜 것은 식구들의 음식을 직접 길러서 먹는다는 것과 저희 작물을 사간 분들께서 맛있게 먹었다는 연락을 주실 때예요.”두 사람은 농산물을 수확하면 70%는 풀무생협에 납품하고 30%는 자체적으로 판매한다. 내 남편과 내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정성스레 키운 채소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는 셈. 게다가 포장할 때에는 ‘맛있게 드시라’는 마음까지 담는다니, 이보다 더 귀한 야채가 어디 있을까 싶어진다.

이환의 씨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생태환경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이 집에는 독특한 물건들이 많다. 이환의 씨 부부가 최대한 두 사람의 손을 이용해 지은 집의 지붕에는 태양광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판이 올려져 있다. 태양광에너지를 사용하면 한 달 전기료가 5천 원 미만으로 나온다고 한다. 2백 원이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집도 장작을 때서 난방을 하니 기름이 들지 않는다. 유기농에 좋은 질 좋은 거름을 사용하기 위해 바이오 가스 시스템을 선진적으로 도입해 이용해오고 있고, 오리농법 벼농사의 동료(?)인 오리에게는 유기농 사료를 먹인다. 우리나라 음독자의 70~80%인 2천6백32명이 사용하는 농약 ‘그라목손’의 퇴치를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생명은 자연이 부여한 나름의 수명인데, 인간이 이것을 줄여 놓았어요. 생명을 다시 늘려 쓰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농사란 별의 노래(기울기)에 맞춰 하는 일이라고 한다. 자연의 변화를 살피고 작품 상태를 살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야 최고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농사를 지으면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 순환하니까요. 농사일은 순리에 따라 살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몸이 자연 변화에 맞춰 움직이니, 사람답게 살기에 가장 적당한 일 아닐까요?”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새삼스러워진다.

신선하고 단단한 야채를 먹고 싶다면이환의·오미정 부부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선현들의 지혜가 담긴 자연스러운 농법을 되살려 짓는 유기농법을 통하면 작물의 풍미가 살아 있고 조직이 단단해서 오래 보관해도 잘 썩지 않는다.(화학비료를 쓴 농산물은 세포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금방 썩는다.) 이환의·오미정 부부가 재배한 감자, 당근, 마늘은 이맘때 수확한다. 감자는 10kg에 1만 원, 당근과 양파는 kg당 1천1백 원이다. 택배 운송비용은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 문의 041-634-4694


김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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