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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청년, 배우 신영균 씨를 만나다 화려한 꽃에서 굳건한 나무로
시대를 풍미한 명배우, 성공한 사업가, 전직 국회의원, 전직 치과의사는 신영균 씨를 설명하는 모든 것일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언젠가 스펜서 트레이시의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를 한 편 찍고 싶은 정열의 배우다. 그리고 나무를 사랑하는 80세의 푸릇한 청년이다.


1 고덕동의 작은 동산 안에 들어선 30평 남짓한 그의 집. 건축물보다는 그가 가꾼 나무들이 더 근사한 집이다.
2 장렬한 카리스마와 근육은 줄었지만 여전히 푸른 나무 같은 배우 신영균. 이 서재에서 밖을 내다볼 때 그의 표정은 가장 푸르르다.

미당 선생은 나이 80이 넘으면 일상이 시가 되도록 써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썼다. ‘아내 손톱/말쑥히 깎어주고/난초/물 주고 나서 // 무심코 눈 주어 보는 초가을날의/감 익는 햇살이여.’ (서정주 ‘도로아미타불의 내 햇살’ 중) 일상이 다 시가 될 것 같은 이 집 풍경 앞에서 이 시가 떠올랐다. 올해 여든 살이 된 명배우는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모종을 골라내고 있었다. 잘 손질된 민예품처럼 고운 아내는 찬 모과차를 내왔다. “나무들이 비 온 다음 날을 제일 좋아해요. 배불러하는 게 보여요. 이슬비가 내릴 땐 일부러 동산을 한 바퀴 돌아요. 나무들이 좋아죽겠어 하는 거 보려고.” 이 집을 감싼 동산에는 대추나무, 감나무, 소나무, 마로니에, 느티나무, 몇백 년 된 오리나무…가 빼곡하다. 1989년에 이사 와 19년 동안 가꾼 동산(동산이라고 하기엔 나무의 수가 푸지고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우니, 그냥 산이라 하고 싶다)이다. 어느 한구석, 그의 손길이 스치지 않은 데가 없다. 언제쯤 묘목을 옮겨줘야 하고, 언제쯤 산목散木해야 하는지 정원사보다 더 잘 안다. “오늘 아침에 병든 소나무를 잘라냈는데, 마음이 안 좋아요. 그 녀석 그렇게 가는 거야.” 그는 세상에 씨를 뿌리고 간다는 생각으로 올봄에도 몇만 그루의 나무를 산목했다. 고덕동 산자락 위 그 집엔 ‘왕년의 명배우’ 대신 ‘나무 심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1 1928년생이니 올해로 딱 여든 살이 된 신영균 씨는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젊다. 말이 없지만 그 안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이 젊음을 가꾼 비결이다. 또 하나, 그의 성품을 그대로 닮은 나무 곁에 살아서다. 
2 ‘세월이 흘러가네 흰머리가 늘어가네/모두 다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김광석의 노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3  1남 1녀를 둔 신영균, 김선희 씨 부부는 자식을 둘만 둔 것이 좀 아쉽단다. 아들 둘, 딸 둘이면 딱 좋겠다고 한다. 그 1남 1녀가 가정을 이루어 노부부의 주말을 빛나게 하는 낙이 되었다. 
4  정원수 사이사이로 나무처럼 자리 잡은 윤영자의 조각 작품. 바로 옆의 가족 사진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배우 신영균은 영화에서 유독 나무와 인연이 많았다. 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두 가지 배역 중 하나가 나무처럼 우뚝한, 나뭇짐 진 머슴 역할이다. 데뷔작 <과부>, 그리고 <갯마을> <무영탑> <봄봄> 등에서 그는 자연 그 자체의 힘을 지닌 사나이로 등장했다. 눈 밝은 감독들은 인간 신영균이 가진 순박하고 자연과 닮은 이미지를 배우 신영균과 오버랩시켰다. 1960년대, 당대 최고의 작가 장덕조 씨는 그를 ‘야성의 정’이라는 수식으로 간추렸다.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인상적인, 명동 어느 바에서 어깨로 도어를 밀고 나온다면 깡패처럼 보일 것이오, 합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괭이를 든다면 농사꾼일 것이고 미남은 아니지만 쾌남이다.(1962년 잡지 <여원>)” 그랬다. 당대를 풍미했던 배우 신영균은 영화 속에서 한결같이 자연의 힘을 가진 머슴이거나 장쾌하고도 한 많은 임금(<연산군> <태조 이성계>), 아니면 의리로 똘똘 뭉친 군인이었다(<5인의 해병> <빨간 마후라> <남과 북> 등). 어떤 역할이든 그에게 닿으면 나무처럼 우뚝하고 충직한 이미지로 변했다. 그건 그가 가진 성품 때문이었다. 당시(1960~1970년대)의 인터뷰 기사들은 그를 두고 ‘말이 없고 겸손하며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그의 여행의 나침반은 역시 영화였다. 서울대 치대라는 으쓱한 레테르도, 잘나가는 <동남치과>도 접고 밥벌이도 안 되는 영화에 투신했던 남자가 그다. “반대 많이 했죠. 그래서 처음엔 낮에는 병원 일 보고 저녁에만 배우 하기로 약속했어요. 이 양반이 나온 연극을 보고 조긍하 감독님이 <과부>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는데, 이 양반이 대본만 가져오면 그걸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려요. 그때는 후시녹음할 시절이었는데도 대본을 통째로 달달 외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야 감정이 산다고. 그러니 그걸 어떻게 말려요.” 배우 신영균은 1960년부터 1978년까지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마부> <상록수>처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버쩍버쩍 마르는 작품들이었다. 그는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 같은 거장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자 배우기도했다. “열세 편에 겹치기 출연한 적도 있어요. 그땐 그게 특별한 게 아니었어요. 나 잠잘 시간 만들어주려고 수십 권의 대본을 아내가 먼저 읽고 귀띔해주곤 했어요.” <빨간 마후라>를 찍을 땐 사수를 데려다가 머리 뒤에서 진짜 총을 쏴서 유리가 뚫리는 장면을 찍어야 했고, <군번 없는 용사> 땐 석유난로가 실린 군용지프를 타고 절벽을 굴렀다. <5인의 해병> 땐 추격 신을 실감나게 찍으려고 실제 총을 발 밑에 쏘다 파편이 돌에 맞아 몸으로 튀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에 몰두하던 그가 1979년 영화 현장을 떠났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약이 많아졌어요.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안 나오던 시절이었죠. 좋은 역할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었어요. 지금도 은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작품이 나오면 언제든 찍을 거예요. 미국 갔더니 탤런트 김세윤 씨가 드라마 좋은 거 하자고 하대. LA에 사는 대가족 이야기래요. 드라마든 영화든 좋은 작품이면 하고 싶어요. 배우는 그냥 배우지, 드라마 배우 따로 있고 영화배우 따로 있나?” 모든 인생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에게만은 영화는 세상의 이상이자 이치다. 이제 그의 눈빛에 기절하는 계집애들은 없지만 여전히 그에게 영화는 열정적인 헌신, 삶을 관통하는 신념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대단히 성공한 인생이라 말한다. “영화 찍을 때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돼 사업을 시작했어요. 계약금 못 받는 일도 수두룩한 데다 실탄 쏘다 죽으면 누가 가족을 먹여 살려요. 당시 출연료가 70만 원이었을 땐데 5년 동안 돈을 모아서 금호극장을 샀어요. 배우들이 많이 하는 영화 제작보다는 극장 사업이 여러 모로 안전하더라구요. 금호극장이 잘돼서 그다음엔 명보제과 건물을 인수했어요. 담보가 많이 걸려 있어서 집 한 채 값으로 살 수 있었거든요. 명보제과도 꽤 잘돼서 명보극장까지 인수하게 된 거죠.” 또 누군가는 그를 두고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라 말한다. “1967년에 제주도에서 <마적>을 찍다 그곳에 반하게 됐어요.

그림처럼 경치가 아름다운데도 땅값이 한 평에 3백원이라니, 나중에 나이 먹으면 작은 호텔이라도 짓고 살아야겠다 싶어서 땅을 샀죠. 그 땅값이 올라서 돈을 번 셈이죠.” 그는 그 땅에 호텔을 짓지 않았다. 대신 영화인으로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사재를 털어 ‘신영영화박물관’을 지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요. 배우로 잘나갈 때 다른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제작에 나서는 대신 극장이나 제과점 하면서 사업을 배웠죠. 그게 맞는 길이다 싶으면 한눈팔지 않았어요. 남보다 좀 많은 걸 누리게 된 이유라면 그거예요. 처음부터 사업가만 했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죠. 그래도 인간 신영균으로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배우로 뛸 때였어요. 난 축복받았어요. 우리 어머니가 교회 권사님인데 날 위해 기도 많이 해주셨어요. 다 어머니 기도 덕분이에요.”

당대의 미남 배우였지만 그는 스캔들 한 번 없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정은 열심히 지켜야 해요. 영화배우니까 더 그래야 해요. 크리스천이니까 더 그래야 해요.” 이 집에 들르게 된다면 꼭 구경해야 할 것이 앨범이다. “촬영하러 신영균 씨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분이 자랑삼아 보여주던 앨범을 한참 들여다보고 온 적이 있다. 결혼기념일에 찍은 사진 모음이었는데 수십 년이 한 권에 담겨 있었다. 두 부부로 시작했다가 아이가 하나 둘 늘어가고…, 그러다 어느덧 아버지와 아들의 키가 같아지는 과정 속에 한 가족의 화목한 역사가 엿보였다. 톱스타로서, 아버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MC 이홍렬 씨의 기억처럼, 햇빛 좋은 서재 한쪽에는 결혼기념일 앨범이, 그 화목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작년 연말 신영균 씨 부부는 금혼식을 근사하게 치렀다. 잔치를 여는 대신 그 돈을 복지재단에 기부했다. 영화배우로 50년 동안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리 위에 구름을 얹고 사는 동안 배우 신영균 씨도 어느새 여든 살이 되었다. 아로나민 광고에서 ‘체력은 국력!’을 외치던 그 사나이가, <연산군>에서 비통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그 배우가, <열녀문>에서 고봉밥을 단숨에 먹어치우던 그 배우가. 그 헐거워진 얼굴이 잠시 쓸쓸해 보인다. 늙어갈수록 지구에서 격리되지 않으려 점점 더 집착하고 쌓아두게 된다는데, 나무와 함께 살아서인지 그는 집착하는 노인 같지 않다. 80세 청년 신영균 씨는 스펜서 트레이시의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를 한 편 찍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그가 사랑하는 제주에서 찍는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80세 청년은 동산에 나무 심으러 가면서 책 한 권을 쥐여주었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한순간,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물의 유한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뿐인 인생인 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헤르만 헤세 <정원 일의 즐거움> 중)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