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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른 절단 장애인 정산민 씨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네 살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진 정상민 씨가 4천7백m 높이의 히말라야 칸진리 봉 정상에 올랐다. 히말라야에 오르며 진리를 만나게 되었다는 정상민 씨. 그가 넘어선 것은 히말라야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던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정상민 씨의 구술을 글로 정리한다.

1 칸진리 봉을 향해 오르는 등반 대원들. 중간에 머문 마을에서 말을 빌려 고산증으로 힘든 사람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이용했다.
2 함께 오르는 등반에서는 누구나 친구가 된다.

비가 내린 후 어둠이 짙어진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인다. 지금껏 땅만 보고 살았던 내가 이제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름 전 히말라야에 다녀온 후로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설산雪山으로 에워싸인 히말라야 칸진리 봉 정상의 장관이 눈앞에 떠오른다. 병풍처럼 늘어선 거대한 빙하,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눈보라와 산 아래 계곡, 그 위로 펼쳐진 맑고 푸른 하늘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히말라야, 내가 정말 그곳에 갔다 온 것일까? 아직도 꿈만 같다.

마음에 파문이 일다
4월 22일 아침에 카트만두 시내에서 출발해 하루 종일 에어컨도 없는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계곡 도로를 달린 후 샤브르베시 마을(해발 1천4백60m)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부터 길고 긴 산행이 시작된 지 나흘째였다. 정상인도 걷기 어려운 거리를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씩 걸었다. 의족이 닿는 무릎 부위는 첫날부터 살이 파여 피투성이가 됐다. 해발 3천m가 넘으면서부터는 말로만 듣던 고산증이 찾아왔다. 구토를 하고 코피를 쏟고 설사에 시달리는 등 대원들의 증상도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나는 그저 머리만 깨질듯이 아팠다.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걸어서 3일째, 랑탕 마을(해발 3천2백40m)에서 출발해 마지막 로지(산장)인 칸진곰파(3천8백40m)에 이르는 길을 걷던 때였다. 제일 뒤처져 가던 나에게 대원들은 마을에서 공수해 온 말을 타고 가라고 권유했다. 너무 힘들어 말에 올라탔지만 결국 얼마 못 가서 다시 말에서 내리고 말았다. 80kg이 넘는 거구인지라 말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이렇게 말에 길들여지면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덜컥 겁도 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서 혼자 천천히 걸었다. 문득 주위를 보니 시야에 아무도 없었다. 흩날리는 눈발 아래 원정대가 지나간 발자국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홀로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와 함께 많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 34년 동안 나 정상민은 뭘 하고 살았나?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당신 탓인 양 늘 미안해하며 헌신적이었던 어머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준 어머니에게 나는 ‘왜 두 발 달린 내 사진이 한 장도 없느냐’며 ‘나쁜 엄마’라고 몰아세운 적도 있었다. 아내 상금이의 얼굴도 떠오른다. 정상인으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에게 시집온 천사 같은 여자. 나의 장애를 포용하고 나의 실수까지도 덮어준 나의 구세주. 결혼식을 올리던 그날, 작년 이맘때 평생 맘고생 안 시키고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던 나의 다짐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뭔가? 배 속에 있는 우리 아기 산이(태명). 그렇지, 산이 때문에 왔지. 산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어야 하는데….’ 마음에서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 순간 나는 ‘지금 이 시간만큼은 기억을 하자’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히말라야가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칸진곰파 로지에 도착하자 대원들이 나와서 반겨주었다. 눈 쌓인 로지의 설경은 그림엽서에서 막 튀어나온 듯 아름다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대원들 몰래 눈물을 훔쳤다.

1 산에서의 정상민 씨.
2 두 다리가 불편한 진병휘 씨. 그는 “정상에 닿는 마지막 날엔 반드시 내 힘으로 걸어 오르겠다”던 꿈을 성취했다.

굉장히 먼 거리, 정상 40m
산행 마지막 날 칸진리 봉(해발 4천7백m)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지나치게 가팔랐다. 나는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한 장애인. 게다가 고소공포증까지 있다. 마치 마지막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난 기분이었다. ‘갈 수 있을까?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는 평지였다.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아니야, 난 갈 수 있어. 가야만 해 상민아!’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앞만 보고 올라갔다. 눈앞의 정상은 거의 낭떠러지처럼 보이고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숨이 컥컥 막혔다. 성한 왼쪽 다리 힘까지 풀린 상태.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나는 등산용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장갑을 낀 채 땅을 짚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옆에 가던 대원이 ‘이제 40m밖에 안 남았다’며 ‘다 왔으니 얼른 가자’고 재촉한다. 지칠 대로 지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순간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정상인에게는 가까운 거리일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굉장히 먼 거리지. 나에게는!

드디어 냉정하게만 보이던 칸진리 봉이 죽을 듯 살 듯 기어 올라가는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정상이다! 마지막 남은 초인적인 힘으로 벌떡 일어선 나를 대원 중의 한 명인 ‘사랑의 밥차’ 채성태 사장이 달려와 부둥켜안았다. 그는 연신 “상민아, 잘했다. 잘했어!” 하고 외치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먼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있는 동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제야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서둘러 오른쪽 다리의 의족을 풀었다. 대원들 모두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이 의족은 지금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우리의 2세 산이에게 보여주고 훗날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다.

3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잃은 절단 장애인과 혼혈인 14명을 포함해 37명이 이번 등정에 참여했다.

4월 26일 오후 1시 10분. 히말라야 랑탕 칸진리 봉에는 이렇게 나를 포함해 ‘희망원정대’ 34명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원래 대원 수는 명이었지만 아쉽게도 세 명이 고산증 때문에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희망원정대는 사고로 팔 또는 다리를 잃은 절단 장애인과 혼혈인 그리고 멘토로 이루어진 히말라야 원정대. 정상에 오르기까지 대원들 모두가 힘들었지만 특히 장애인 대원들에게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듯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도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병휘가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은 평지에서도 10분 이상 걷기가 힘들다. “칸진리 봉 정상에 닿는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내 힘으로 걸어서 오르겠다”고 다짐하던 병휘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왼쪽 다리가 없는 진희 누나도, 오른쪽 발이 없는 지연이도 모두 ‘어떻게 온 히말라야인데. 꼭 오르고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정상을 밟았다.

누군가를 부둥켜안고 ‘사랑한다’고, ‘장하다’고 말해보기는 내 생애에 처음이었다. 대원들 모두 마지막 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지만 사실 나는 산행 내내 혼자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산행 둘째 날은 너무 힘들어서 울었고, 셋째 날은 히말라야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내면과의 조우를 맛본 기쁨에 눈물이 났다.

가을에 태어날 아이에게
사실 처음 히말라야에 간다고 했을 때 아내는 반대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면 언젠가 아버지인 내가 한쪽 다리가 없는 것을 인지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때 아이에게 ‘봐라, 아버지가 비록 의족을 했지만 이렇게 히말라야 산 정상에도 갔다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아내를 설득했다. 나는 ‘서울의지’라는 의수족 보조기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예전에 의족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만나면 먼저 “괜찮아요, 제가 걷게 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그러곤 뒤에 ‘자기 의지가 좀 필요하다’고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히말라야에 다녀온 뒤부터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 마음 독하게 잡수셔야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본인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히말라야는 나에게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장애와 비장애는 조금 더 어렵고 수월하고의 차이일 뿐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

9월이면 나는 드디어 아빠가 된다. 지금 아내의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산이’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산아, 아빠야. 9월 10일은 네가 이 세상에 나와서 아빠와 엄마를 만나기로 예정된 날이란다. 하루하루 가슴이 뛰는구나. 산이 네 덕분에 아빠는 히말라야에 도전했고 정상까지 무사히 올라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아빠는 이번 산행에서 인생의 숙제를 풀고 왔단다. 사실 그동안 아빠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거든. 또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불만도 많았어. 하지만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품에서 울고 웃으며 아빠는 깨달았단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감사하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너의 아빠가 되어 나는 너무 행복하구나. 산아 사랑한다.”

* 희망원정대는 장애인과 혼혈인 등 편견과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의 약자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용기와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조직된 히말라야 원정대다. 연예인 봉사 단체인 사랑의 밥차(사장 채성태, www.foodcar.co.kr)와 한국절단장애인협회(회장 김진희. www.uk-ortho.co.kr)가 주최하고 현대백화점 사회복지재단과 현대홈쇼핑, 코오롱스포츠에서 경비와 장비를 지원했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