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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보리앤그레이 식물이 그리고 시간이 답하다
오랜 친구가 각자의 길을 걷다 다시 만났다. 패션 디자이너 임수정, 건축 디자이너 왕혜원이 뜻을 모아 만든 브랜드 아이보리앤그레이. 처음엔 새하얗다 한들 시간이 흐르면 변하게 마련인 것처럼, 시간을 축적한 그들의 작업은 누렇거나(아이보리) 흐리다(그레이).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유칼립투스, 장미 꽃잎 등을 사용해 패브릭에 색을 입힌 임수정 작가의 작업. 물에 번진 듯, 안개가 자욱이 낀 듯한 천 위의 흐린 풍경이 아름답다.

둘도 없는 친구이자 파트너인 왕혜원 작가(왼쪽)와 임수정 작가. 서로 커다란 영감과 작은 다툼을 주고받으며 아이보리앤그레이를 이끌고 있다.
청담동 골목의 어느 주택. 제멋대로 자란 건 아니지만, 어여쁘게 관리한 것도 아닌 정원이 반겨준다. 내부 중앙에는 마치 식물학자의 실험실처럼 갖가지 식물이 병에 담겨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겹겹의 패브릭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임수정, 건축 디자인을 전공한 왕혜원 두 사람이 함께 운영하는 ‘아이보리앤그레이Ivory and Gray’의 작업실이다. 이 둘은 대학교 동창 사이. “1994년 당시에는 이화여대에 장식미술학과가 있었어요. 그 안에 패션 디자인과 인테리어 디자인이 있었고요. 전공은 다르지만 그때부터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오랜 인연을 이어왔지요.”

15년간 패션 기업 한섬의 디자이너로 일하던 임수정 대표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왕혜원 대표와 막연히 무언가 함께 작업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술 마시면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이렇게 상표등록만 해놓은 게 열 개가 넘더라고요.” 농담처럼 던진 말끝에 세상에 나온 아이보리앤 그레이라는 이름은 두 사람에게 많은 영감을 준 영화 <인생 후르츠>에서 단서를 얻었다. “건축가인 90세 할아버지와 아내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예요. 할아버지가 아이보리와 그레이로 옷을 차려입은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근사해서 이름으로 짓게 되었죠.” 왕혜원 대표의 말에 임수정 대표가 덧붙였다. “또 우리 작업이 결코 화이트가 될 수 없는 것이더라고요. 시간을 통과하거나 축적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요.”


임수정 작가는 빵을 반죽하고 굽는 일이 재료를 발효시키고 전처리하는 과정과 비슷하다며 제빵을 즐겨 한다.

내추럴 와인을 좋아하는 왕혜원 작가는 맛있게 마시고 난 와인병도 작업의 소재로 삼는다.

산책하며 주운 나뭇가지와 그릇, 담금청이 놓인 탁자. 아무렇게나 있는 듯한 일상의 장면도 조화롭다.
좋은 기운이 만드는 제스처
아이보리앤그레이(@ivoryandgray_)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두 사람을 이렇게 소개한다. “leave’s drawing by Soojeong Leem, becoming pieces by Hyewon Wang”. 패션업계에 오래 종사하며 소재와 염색에 줄곧 관심이 있던 임수정 대표는 식물을 이용해 자연 소재를 염색하는 작업을 한다. 식물에 함유된 타닌 성분이 자연 소재와 만나면 식물의 색소가 입혀진다. “식물은 발효하거나 건조한 것, 또는 생잎을 쓰기도 해요. 제가 물과 열을 어떻게 조절하는지에 따라 색감이 달라져요.” 염색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바로 소재를 준비하는 일이다. “면, 리넨 같은 식물성 소재나 울, 실크 등 동물성 소재를 모두 사용해요. 소재를 고르면 우유에 담갔다가 빠는 작업을 7~8회 정도 반복합니다. 우유를 비롯해 콩즙, 조갯가루, 식초, 소금 등 여러 가지 자연 재료를 찾아서 실험해보지요.”

그는 말하자면 작업에 필요한 모든 원료를 자연에서 구한다. “화학약품을 사용하면 식물의 모양을 그대로 선명하게 뽑아낼 수 있지만, 저는 번지거나 흐린 것이 더 아름답더 군요.” 식물 개수와 레이아웃부터 발효, 열처리, 건조 시간 등을 정확하게 계획한 후 실행에 옮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도한 대로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저와 식물의 의도가 반반씩 완성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작업을 하지만, 결국 색을 그리는 건 바로 식물이거든요. 제 작업을 ‘leave’s drawing’이라고 부르는 이유예요.”

왕혜원 작가는 한지에 파이버 페이스트를 바르는 과정이 전을 부치는 것 같아 재밌다고 한다.

손에 자주 닿고 쓰는 그릇들. 열을 맞추진 않았지만, 나름의 질서대로 놓인 모습이 안정감을 준다.

다가오는 전시 준비가 한창인 작업실.
건축가로서 물성에 탐구심이 강한 왕혜원 대표는 건축 재료의 본질에서 영감을 얻는다. 우드 클레이와 제소를 사용해 만든 오브제, 한지에 파이버 페이스트를 발라 거친 질감을 만들어내는 등 재료 사이의 예기치 못한 만남을 즐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becoming pieces’는 무슨 뜻일까? “예술가는 자기만의 시간성을 지니는데, 내면의 추상적 개념과 어떤 시점에서 만나는 순간이 있죠.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단지 그 상태가 보인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두 사람의 작업 방식과 경향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하나로 모인다. “저희는 이를 ‘제스처’라고 표현해요. 좋은 기운이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가 다시 좋은 기운을 전해주리라 믿지요.” 두 사람의 기분 좋은 제스처는 남겨진 자리를 채우고, 다시 흘러간다.

<Loney Summer House>

기간 7월 31일~8월 21일(예약제)
장소 서울시 용산구 한남대로 20길 21-14 산수화티하우스
문의 02-749-3138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