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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호연 용쓰지 말고 살자니까요
웃는 꽃이, 웃는 별이 줄지어 선 채 우쭐우쭐 춤춘다. 고단한 하루를 사느라 거칠어진 마음을 참 많이 위로해주는 그림이다. 어쩌면 그는 마음속 소음을 견디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김호연 작가는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섬유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회화, 조각, 판화, 태피스트리, 도자기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작하는 ‘종합 작가’로, 36회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저서로 <이카트>를 출간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환장하도록 어여쁜 꽃 몇 송이, 피었다. 환한 꽃대를 달고 폭발하듯 새끼 치는 생명의 욕망, 바로 살아 있음의 욕망, 살고 싶은 욕망. 그 하염없는 욕망을 보는 이의 마음에도 질러놓고야 만다. 화가 김호연의 그림 ‘웃음꽃’이다. 시리즈로 묶이는 이 그림엔 꽃대에 꽃 대신 별이 피는 것도 있다. 꽃의 입 밖으로 초신성이 폭발하는 듯한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식물이라기보다 하늘에 인간의 뜻을 전하는 석상 같다. 이 그림, 볼수록 간간하여라!

‘색채주의’라 불릴 정도로 색채를 뿜어내는 작품으로 유명했는데, 갑자기 그림에서 색이 사라졌다.
올 3월부터 색이 옅은 그림을 그렸다. ‘청화백자 같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한데 예전에 색이 강한 그림을 그릴 때도 작업의 시작은 흰색 모델링 페이스트를 캔버스에 꽃 형태로 두껍게 입히는 것이었다. 허연 밑바탕을 보며 연신 “좋다, 좋다” 했다. 언젠가는 백색 그림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짐작도 했다. 20대, 미술을 시작할 때는 나도 기하학적 추상을 했다. 30대 초반에는 푸른색도 많이 썼다. 되돌아가는 것이라고도, 바뀌어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웃음꽃’, acrylic on canvas, 80.3×116.7cm, 2021
색이 사라지고, 질감이 생겨났다. 아니, 숨어 있던 질감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업 과정을 들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점도가 높은 모델링 페이스트로 꽃 형태를 두껍게 입히고, 굳기 전에 연필, 송곳, 못 따위를 써서 에칭 기법으로 긁어낸다. 그다음 채색하고 사포질한다. 스푸마토 기법(다빈치가 개발한 기법으로, 톤 조절을 통해 경계선을 없애는 방법)으로 갈아내고 문지른다. 이 과정을 연달아 반복한다. 색이 강한 그림도, 색이 옅은 그림도 작업 과정은 똑같다. 청화백자를 닮은 모노톤 그림에선 색에 치여 살던 질감이 한껏 도드라지는 것 같다. 지금은 모노톤으로 그리지만, 앞으로는 살색 그림도 분홍빛 그림도 그릴 생각이다.

보고 있으면 눈이 혀가 되는 듯하다. 그의 꽃 그림은 슥 문대고, 자분자분 비벼대고 싶어진다. 그림의 감촉이 눈에 전달되는 순간, 말초 감각에 변화가 생기면서 마음에까지 피드백이 생겨난다. 만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듯, 눈으로 비벼대야만 드러나는 그의 촉각적 그림.

‘웃음꽃’, acrylic on canvas, 72.7×60.6cm, 2019
어느 시점부터 그림 속에서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의 탄생, 은하, 초신성의 폭발 같은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빅뱅 이론이 참 흥미롭다. 한 점이 씨앗 같은 것 아닌가. 그 씨앗은 어디서 왔을까? 그런 상상을 많이 한다. 내 그림 속에서 별도 꽃처럼 환히 웃는다. 꽃 속에 최고의 비례미, 면 분할이 존재하는 것처럼 별도 그렇다. 자연은 질서와 평화의 법칙을 가장 잘 아는 스승이다.

색이 강하든, 연하든 화가 김호연의 작품은 “쉽고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그림”이다.
대학 공부를 두 번 했는데, 처음에 서울교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8년 동안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보고, 함축적이고 단순하게 그려낼 줄 안다. 전달력이 강하고 의인화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원근법이란 게 딱히 없고, 질감은 두꺼우면서 거친데, 그게 또 조화롭다. 명암으로 주·조연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런 게 내 그림 속에 스며들었다. 나도, 보는 이도 그림 앞에서 고뇌하고 심각해지는 건 싫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도 충분히 철학이 될 수 있다. “용쓰지 않으면 더 좋은 인생”이지 않은가. 골프도, 축구도, 바둑도 모두 힘 빼고 했더니 남보다 빼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다. 붓질도 용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 “행복한 그림을 그리면 행복해진다”라고 주문외듯 하며 그린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꽃은 웃음 짓고, 물고기는 방방 뛴다. 작품 제목도 죄다 ‘웃음꽃’ ‘행복한 정원’ ‘자연+꿈+영원성’ 이렇다.

‘행복한 대나무’, acrylic on canvas, 60.6×72.7cm, 2015
교수라는 직職, 화가라는 업業을 가지고 30년 동안 지내왔다. 계속 그릴 수 있게 한 힘이 뭔가?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해왔다. “지속 가능한 예술을 하라.” 예술이든 직업이든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 몰입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내겐 그림이다. 늘 돌아갈 수 있는 지점, 방패막이다. 물감을 덧칠하고 긁고 갈아내는 사유의 과정은 내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준다. 학교 연구실에서, 미대 학장실에서 매일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6개월 뒤면 정년퇴직인데, 그때 내가 돌아가 몰입할 상대도 그림일 것이다. 사실 계속 그릴 뿐이다. 저 끝에 있는 건데 내가 어떻게 계획하겠나.

물리학에서 보면 사물은 모두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그진동이 춤이다. 세상 만물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춤인 것이다. 8월호 표지 작품 ‘웃음꽃’을 다시 한번 무연하게 들여다보라. 후두둑 북의 울림 같은 우주의 춤에 보는 이의 마음도 진동한다. 본래 민화에서 비롯했다는 그의 그림은 고대 신화나 설화의 한 대목 같기도, 하늘에 제의의 뜻을 전한 원시 벽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푸른 대기를 뚫고 꽃이 태어나고 별이 사라진다. 용쓰는 대신 건들대는 우주의 춤, 조화롭고 조화롭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김정한 | 취재 협조 최정아갤러리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