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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이정미 봄날의 도자를 좋아하세요?
불이 수놓은 도자기에서 움트는 봄기운을 읽는다. 고온의 열을 견뎌낸 도자는 혹한을 겪고 소생하는 새순과도 같으니. 경기도 이천도자예술마을에 자리한 이정미 작가의 작업실은 내리쬐는 봄볕, 가마에 땐 불로 눈이 부시다.

홍익대학교 도예과와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한 이정미 작가.지난 2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그의 작품들이 이천 작업실 곳곳에 자리 잡았다. 항상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넓은 작업실 공간을 마련했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알에이케이 건축사사무소 이호락 소장이 설계했다.
일부러 외우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뇌는 문장이 있는 것처럼,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머리에 각인되는 사물이 있다. 도예가 이정미의 도자가 그러했다. 청명한 푸른색을 띤 고아한 그릇. 비워도 채워도 그만하게 맑아질 것 같았다. 그를 만난 날도 작품의 첫인상처럼 말간 봄이었다. 이정미 작가가 20년간 머물던 안성 작업실을 뒤로하고 새로 잡은 터는 경기도 이천도자예술마을이다. 단지 초입에 우두커니 선 검은색 벽돌 건물. 도자처럼 소성 과정을 거친 단단한 벽돌은 그 어떤 과장도, 과시도 없다.

콘크리트 벽으로 장식 없이 마감한 내부. 드문드문 놓은 작품의 색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나무 평상 위에는 색색의 그릇에 호박이며 가지 등 채소와 과일을 말리고 있다.

이정미 작가는 직장인이 출퇴근하듯 규칙적으로 작업에 임한다. ‘사과 합’ 시리즈를 만드는 과정으로 조형물 형태를 사과 모양으로 가다듬고 있다.
우물 정으로 집을 짓다
이정미 작가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는 1년쯤 됐다. “한옥이던 안성 작업실은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손봐야 할 곳이 점점 늘어났어요. 덱이 삐거덕거리고 급기야 창고에 물까지 샜지요. 조금씩 수리하면서 어떻게든 버텨봤지만 이제는 정말 이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우연히 이 부지를 알게 되면서 작업실의 밑자리를 그려나갔다. 설계는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알에이케이 건축사사무소 이호락 소장에게 맡겼다. 이정미 작가는 그의 작품 ‘우물 정井’에서 형상화한 건물 구조를 떠올렸다. 직육면체 안에 우물처럼 원형이 파인 형태. ‘우물 정’의 사각형에서 본뜬 네모난 중정을 중심으로 전시장, 가마, 작업장이 ㄷ자 형태로 펼쳐진다. 주방과 다이닝룸이 자리한 홀은 폴딩 도어를 열면 앞마당과 이어진다. 마당에는 기개 있게 뻗은 소나무 네 그루와 그의 스툴이 바위처럼 듬성듬성 박혀 있다. 전시 공간이 전시장에 국한되지 않고 중정까지 확장된다.

모든 집 짓기가 그렇듯 이곳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건축가와 의견 차이도 있었다. 처음에 이호락 소장은 창이 서향이니 ㄷ자 구조를 거꾸로 뒤집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정미 작가는 옆 건물을 벽체 삼아 ㅁ자 구조로 밀폐되기를 원했다. “시골(안성)에서 너무 오랫동안 지냈기에 왔다 갔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작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외부와 차단하는 장치가 필요했던 거지요.” 이천도자예술마을은 원칙적으로 담을 쌓거나 대문을 설치하는 것을 제한하는데, 그는 대문과 담도 작품으로 승화하겠다는 뜻을 밝혀 허가를 받아냈다. “문도 작품의 일환으로 해석한 거죠. 대문에 여섯 폭 병풍처럼 산을 그려 넣겠다고 했어요. 이곳이 설봉산으로 둘러싸여 있거든요.” 덕분에 밖에서는 유리로 마감한 전시장 외에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폐쇄적 구조를 택했지만, 중정을 품고 있어 결코 답답하지 않다. 동이 트면 마당에 나가 몇 바퀴씩 거닐어본다. 이른 아침의 싱그러운 공기를 심호흡하듯 들이마시고, 이름 모를 들꽃과 잡초들을 들여다본다.

“일부러 누군가 화분에 옮겨 심어도 그렇게 필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자라요. 가끔 잡초를 뽑아서 화병에 꽂아놓기도 하고요.” 심지어 잡초 뽑기를 금지한 구역도 있다. “보랏빛 꽃과 풀잎이 마치 난처럼 피어난 잡초가 있어요. 이 구역은 남편에게도 잡초를 뽑지 말라고 했지요.” 비가 오고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지는 계절의 변화를 매일매일 마주한다. 빛이 들어오고 저무는 시간과 계절의 리듬에 맞춰 오늘도 그는 작업장으로 향한다.

매트한 회색 노출 콘크리트 벽과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벽에 걸린 작품이 임팩트 있는 신을 만든다. 작품은 회화가 취미인 그가 직접 그린 것이다.

이정미 작가는 취재팀을 위해 손수 요리를 준비했다. 토마토의 붉은색이 싱그럽다.

오묘한 광택을 지닌 그의 도자 그릇에 소담스레 담은 이정미 작가표 토마토 수프. 수준급의 요리 실력이 취재진을 감탄케 했다.
봄이 오고 나는 작아진다
2014년 <백자 옻칠을 입다>, 2017년 4월 <봄, 달, 새> 등 유독 봄에 전시를 열었기 때문일까. 물오른 달빛을 표현한 청색 도자, 새와 바람을 표현한 오브제 등 생동감이 깃든 그의 작품을 보면 왠지 모르게 봄이 떠오른다. 그에게 봄이라는 계절은 어떤 의미일까? “봄이 되면 생명이 새롭게 탄생하잖아요. 반면에 사람은 나이 듦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자연을 보면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도 해요. 자연이 주는 거대한 생명력에 비해 스스로가 너무 작아지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이 감정을 극복하려고 작업하는 것 같아요.” 봄에 동력을 얻어 작업하는 그는 의외로 실패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대표적 예가 <봄, 달, 새> 전시에서 첫선을 보인 레이스 접시다. 테두리의 섬세한 요철이 레이스를 연상시킨다. “우물 조형 작업의 끝부분을 그릇에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했어요. 얇은 그릇에는 붙인다고 해서 그 느낌을 살릴 수가 없었죠. 그러다 어느 날 굽을 깎다가 깨졌는데, 순간 이렇게 깨진 느낌으로 하면 되겠구나 싶었죠.” 실패는 곧 또 다른 창조의 영감이 된다. 여러 개의 유니트를 쌓아 사람을 형상화한 ‘군상’ 작업이 한창일 때였다. 가마 문을 열었는데 작품 무게로 인해 가마 열판 아래쪽이 깨져 있었다. 도자는 기울어 서로 붙어버린 상태. “아마 학생때였다면 막 울었을 거예요. 이제는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다 보니까 오히려 아, 새로운 게 나올 수 있겠구나 생각해요.(웃음)” 결국 이 작품은 약간 기우뚱한 사람 형상으로 완성되었다. “금이 조금 갔지만 괜찮아요. 나중에 이 안에 전구를 넣어 조명등으로 쓰면 좋겠어요.” 이제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기꺼이 즐기고 발전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

3층 규모로 지은 건물의 3층은 주거 공간으로 계획했다. 정면에 구자현 작가 작품을 비롯해 이정미 작가가 빚은 달항아리와 청명한 푸른색 도자가 놓인 실내. 예상대로 깨끗하고 단아한 멋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백자부터 옅은 민트색, 하늘색, 청색, 보라색, 강렬한 붉은색에 이르기까지 오묘한 그러데이션이 멋스러운 이정미 작가의 그릇. 유약도 원료를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물감만큼이나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다.
도자에 꽃이 피다
이정미 작가의 도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꽃처럼, 서리처럼 생긴 결정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결정유는 소성과 냉각 과정을 거치며 유약 표면이 유리질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인데, 유약 원료와 불의 화학작용이 만들어내는 매우 우연적 아름다움이다. “도자에 결정을 피우기란 쉽지않은데, 안성에 있는 기름 가마에서는 내·외부 온도 차이가 심해서 결정이 잘 피었어요.” 소지와 유약, 불의 온도를 바꿔가며 수없이 실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문양이다. 같은 유약도 가마 불을 어떻게 때느냐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진다. 1300℃의 고온에서 구운 그릇은 표면이 자개 질감이 난다. 이렇게 하려면 재료 자체가 비싼 데다 가스비는 두세 배가 들고, 불을 두 번씩 때야 하니 소비자에게는 도무지 판매할 수가 없다. “가마 온도를 낮춰서 결정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이정미 작가는 당연하게도 그릇만 만들지 않는다. 그의 전시 80%는 조형 작업이다. “대학교 때는 거의 조형 작업만 했어요. 오히려 그릇은 졸업 이후에 시작했지요.” 그래서일까. 정사각형, 원형 등 단순한 도형, 기하학적 선이 만난 그의 그릇에는 구조적 조형미가 돋보인다. “그릇도 작은 조형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두 작업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둘 다 할 수 있으니까 할 뿐이지요.” 작품 ‘군상’은 하나의 사람 형상을 이루지만, 각 피스가 따로따로 해체된다. 머리, 몸의 상체와 하체 부분을 분리하면 각각 화병이나 그릇으로 쓸 수 있는 것. 그에게 그릇은 곧 조형의 요소요, 조형은 해체하면 다시 그릇이 된다.

10인 이상이 앉을 수 있는 긴 다이닝 테이블과 주방이 있는 홀. 이정미 작가는 이곳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삼시 세끼를 차려 먹는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

‘우물 정’ 작품의 형태를 형상화한 중정과 검은 벽돌로 쌓은 외관. 중간 홀의 폴딩 도어를 열면 중정에서 뒷마당까지 시선이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세 개의 피스로 구성한 ‘군상’ 작품과 스툴. 강렬한 색의 대비가 눈을 즐겁게 만든다. 이정미 작가는 도자에 옻칠을 입히는 기법으로 표면의 질감을 다른 물성으로 표현하기를 즐긴다.
작업에 경계를 두지 않는 그의 남다른 유연성과 포용력은 재료와 색감에까지 이른다. 백자는 물론 코발트블루, 붉은색, 민트색 등 다양한 색을 실험한다. “유약도 물감으로 색을 내는 것만큼 다양한 컬러가 나와요. 철·망간·코발트 등 어떤 원료를 어느 정도 분량으로 쓰느냐에 따라 검은색,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등 다채로운 색이 가능하지요.” 그는 스스로를 백자, 분청 등 색과 재료의 카테고리에 가두지 않는다. “사람이 매일 흰옷만 입는다면 얼마나 지겹겠어요!”

오랫동안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 스스로가 즐거운 작업을 하고 싶다. “젊을 때는 복잡하고 디테일한 작업도 곧잘 했는데, 나이가 드니 눈이 단순한 걸 원하더라고요. 작품도 점차 간소해지는 것 같아요. 이제 눈도 침침하고요.(웃음)” 작품도 생명처럼 자연스럽게 변해간다. “사람, 사물, 자연,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잖아요. 다만 좋게 변하느냐, 나쁘게 변하느냐 두갈래로 나뉘지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 그는 잡념을 가지치기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지켜낸다.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 같아요. 커피 원두도 너무 타지 않을 정도로 정성스레 볶아야 맛있잖아요. 도자기도 애정을 갖고 쉼없이 만져줘야 수평을 유지하고 제 모양을 찾는 것처럼 말이에요.” 작업이 곧 삶이요, 종교라고 말하는 그는 굳이 일과 일상을 구분 짓지 않는다. 도자를 빚는 그 정성스러운 마음 그대로 잡초에게 눈길을 주고, 성실히 원두를 볶고, 한 끼를 성심으로 차려 먹는다. 도예陶藝에 도道가 스미는 순간이다.


작업실 탐방
청신한 색감과 에너지를 도자에 접목하는 이정미 도예가의 작업실에 초대합니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공간과 작업에 대해 소개하며, 간단한 도예 체험까지 하는 드문 기회입니다. 티타임도 함께 마련합니다. 

일시 4월 23일 (금) 오후 2시 장소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참가비 1만 5천 원(정기 구독자 1만 원)
인원 8~10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 이유를 적어 신청하세요.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