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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33년 만에 복원한 국내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
경복궁에 처음으로 전등이 켜진 1887년, 조선에 또 하나의 불이 밝았다. 여성은 이름도, 치료받을 권리도 없던 시대에 여성을 위한 병원이 세워진 것이다.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세상은 여성의 마음을 치유했고, 그 마음들이 세상을 점점 바꿔나갔다. 정동길 돌담 표석에 잠들어 있던 보구녀관의 이야기가 1백33년 만에 깨어났다.

보구녀관은 132m² 크기의 한옥으로, 목동 이대서울병원 앞뜰에 복원했다.

보구녀관에서는 많은 여성 의사가 여성과 어린이의 진료 및 교육에 힘썼다.
여성이 여성을 구하다
창문에는 한지 대신 유리를 넣었고, 흰색 커튼을 달았다. 대청마루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진료실이 나온다. 왼쪽의 큼지막한 방은 대기실, 오른쪽 방은 약국으로 쓰였다. 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방은 수술실로 사용했고, 온돌로 된 다섯 개 병실에서는 30명의 여인이 머물 수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이 국고로 환수한 역적 홍영식의 집을 그대로 사용한 것과 대조적으로, 보구녀관은 현대의 병원 시스템과 놀랍도록 흡사한 실용적 구조다. 3대 병원장이던 로제타 홀의 생전 일기를 바탕으로 꼼꼼한 고증을 거쳐서일까? 2019년 이대서울병원 설립과 함께 개관한 보구녀관에 들어서면 1887년으로 회귀한 듯 당시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불과 1백여 년 전의 조선은 전통과 근대, 개화와 쇄국, 동양과 서양이 충돌하던 격동의 시대였어요. 1885년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이던 윌리엄 스크랜턴 선생 가족이 제물포를 통해 목숨 걸고 조선 땅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오자마자 집을 병원으로 개조해 최초의 민간 병원인 ‘시병원’을 만든 거죠.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거나 남성과 함께 치료받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어요. 여성은 병에 걸리면 그냥 죽거나 병원 근처에서 쓰러져 죽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윌리엄 스크랜턴 선생의 어머니이자 이화학당을 건립한 메리 스크랜턴 부인은 여성만을 위한 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시병원의 맨 앞쪽 기와집 한 채를 여성 병원으로 만들었고, 여성해외선교회에 여의사를 수차례 요청한 끝에 메타 하워드가 조선으로 파견돼옵니다.”

이화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이자, 복원 사업을 이끈 유경하 이화의료원장이 들려주는 보구녀관의 탄생 배경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다. 보구녀관을 찾아오는 여성은 연간 3천 명에 달했는데, 형편이 어려운 여성들을 무료로 진료하기도 했고, 달걀이며 농작물을 병원비 대신 받기도 했던 곳. 조선의 여성들에게 보구녀관은 가부장제가 만연한 시대에 자신을 찾고 세상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과거 대기실로 사용하던 곳은 지금 다목적실로 사용한다.

‘여성을 널리 보호하고 구한다’는 의미로 고종 황제가 병원 이름을 하사했다.

벽에 걸린 인물 사진은 보구녀관과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부인.

약을 조제하던 약국 전경.


보구녀관은 여러 병원장의 일기와 기록 등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보구녀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를 꿈꾸다
김점동(박에스더)의 아버지는 선교사의 집사였다. 그는 똑똑한 셋째 딸을 ‘사람대접’해주는 이화학당에 보냈다. 보구녀관에서 통역을 담당하던 김점동은 언청이라 불리던 여성들이 수술 후 새 삶을 얻는 것을 보고 혼신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양반집 노비이던 복업이(이그레이스)는 다리에 골염이 생겨 걷지 못하게 되자 주인집에서 쫓겨났다. 보구녀관에서 수술을 받아 다시 걷게 된 그는 간호원양성학교에 입학해 조선의 첫 간호사가 되었다.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다가 코와 손가락을 잘리고 쫓겨난 김씨 부인(김마르타)도 보구녀관에서 건강을 되찾은 후 간호사의 길을 택했다.

아들을 낳아주고 살림을 한다는 두 가지 쓸모를 제외하면 여성은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시절이었다. 쫓겨난 노비, 어느 관리의 첩, 가난한 집안의 딸이던 그들은 보구녀관을 통해 주체적 삶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그 열정은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여성을 널리 보호하고 구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하사한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였다.

보구녀관의 역사를 전하는 유경하 이화의료원장.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다
“서양의학의 도입과 동시에 여성 병원이 세워진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라고 유경하 이화의료원장은 전한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머나먼 이국땅인 조선에 와서 용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기적이다. “보구녀관을 통해 새로운 역사도 복원되고 있어요. 윌리엄 스크랜턴 선생이 시병원을 세운 1885년이 이화의료원의 시작임을 알게 됐어요. 1980년, 보구녀관의 3대 관장이던 로제타 홀 의료 선교사가 이화학당 학생들에게 강의한 생리학 교과서를 통해 이화여자대학교의 근간이 의학 교육이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소외된 사람의 친구였고, 고통받는 사람의 치유자였던 보구녀관의 정신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계승되길 바랍니다.”

매년 연말이면 선보이는 크리스마스실seal에도 보구녀관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은 몸을 살피지 않는 인술을 펼치다 결핵에 걸려 34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김점동의 스승이던 로제타 셔우드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이모처럼 따르던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결핵 퇴치에 평생을 헌신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1932년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도입한 이도 그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는 보구녀관의 기적이다.
주소 서울시 강서구 공항대로 260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4시

글 김경민│사진 이우경 기자│문의 02-6465-2210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