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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대성·정미연 부부 산수山水에 깃든 생
나무 곁에서 나무처럼 살아간다. 나무가 내준 길을 걷고, 나무와 더불어 숨 쉬고, 늘 나무를 몸에 품은 채 먹을 갈고 붓을 쥔다. 경주 삼릉 곁, 한국화가 남편과 서양화가 아내가 함께 사는 집은 구석구석 짙은 나무 향으로 그득하다. 천년 고도의 가장 깊고 아득한 소나무 숲이 이들의 삶을 계절처럼 관통한다.

지금 박대성 화백의 작업실에는 늦가을 볕에 물든 벽오동나무가 잎사귀를 파르르 떨고 있다. 손바닥만 한 잎사귀가 전부 떨어져 내리기 전, 이 땅에 겨울이 깊어지기 전, 그림은 2천 호짜리 대작으로 완성되어 경주엑스포 솔거미술관에 전시될 것이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 배동 안자락에 울창한 솔숲이 깃들여 있다. 수백 살은 족히 넘은 소나무가 구불구불 다가섰다 멀어지며 서로 몸을 기댄 태고의 숲에는 햇살 한 줌 수월히 내리꽂히지 않는다. 견고한 가지며 날카로운 잎이 볕을 쪼개고 튕겨내 사방으로 흩뿌린다. 고도古都의 굴곡진 역사도, 모진 세월의 풍파도 빛처럼 바람처럼 그 안에 공명하다 사라진다. 마치 호위 무사라도 된 양 단호한 자태로 신라 왕릉을 감싸고 솟은 소나무 군락. 사진가 배병우가 그 소나무를 찍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래 사시사철 사진작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곳 삼릉 숲 귀퉁이가 바로 소산 박대성 화백과 아내 정미연 화백의 거처다.

겸재 정선, 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에 이어 한국 실경 산수화의 맥을 지켜온 거장 박대성 화백이 고향도 아닌 경주땅에 한 그루 소나무처럼 뿌리내린 지도 어느새 20년이 넘었다. ㄱ자 형태로 어깨를 맞댄 그의 집과 작업실은 저마다 남산을 바라보며 서 있고, 야트막한 정원 담벼락 너머로 청청한 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런 데가 없습니다. 내가 전국 곳곳이며 다른 나라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솔숲이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데가 없어요. 여기서 남산 정상까지가 전부 소나무예요.” 그가 남산 자락에 들어앉은 것도, 집을 짓고 허물고 또 지으며 20년 넘게 살아온 것도 다이 소나무 때문. 70대 산수화가의 삶에는 그 땅의 산수가 깊이 스며 있었다. 제대로 집 구경도 하기 전, 삼릉 숲을 지나 경애왕릉까지 그의 산책길에 동행했다. 오후 볕이 기어이 가지 틈을 파고들다 바스러지는 적요한 소나무 숲의 정취. 경주의 노화백이 객에게 건넨 첫인사였다.

화가 부부는 매일 삼릉 솔숲을 함께 거닌다.

야트막한 담으로 둘러싸인 앞마당에선 소리 없이 지나는 계절을 매 순간 눈에 담을 수 있다. 오른쪽에 지금 박 화백이 그리는 벽오동나무가 서 있다.

박 화백의 서재 창가 테이블. 아침마다 그가 서예를 즐기는 자리다.

정 화백에 따르면 모자는 박 화백의 의관을 ‘마감’하는 존재다.
두 화가의 두 공간
화가 부부가 사는 집은 생활공간과 작업 공간이 엄격히 분리돼 있었다. 앞마당에 살림집이 붙어 있고, 2층짜리 작업실 뒤로 뒷마당 겸 정원이 이어지는 구조다. 내부는 더 간결하다. 살림집엔 부부의 침실 두 개, 작업실 건물엔 부부의 화실 두 개가 전부다. 공간이 단순하면 삶도 단순해지는 법. 부부는 각자 침실에서 일어나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삼릉 숲을 한 바퀴 거닐며 묵주기도를 바친 뒤, 다시 각자의 화실로 흩어진다. 남은 하루의 대부분을 화실에서 보낸다. 한국화가 남편은 이 땅의 역사와 산수를 그리고, 서양화가 아내는 가톨릭 성화 작업에 매진한다. “서울에선 집을 너무 크게 짓고 살았어요. 평창동 집 건평이 4백 평이었으니까. 거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젠 정말 조그만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요. 화실 때문에 또 넓어지긴 했지만 사실 생활공간은 딱 요만하면 충분해요.”

정 화백의 말처럼 실제 방 두 개에 부엌 공간만 자리한 살림집은 단출했다. 최근 따로 화실을 마련하기 전까지 정 화백이 작업 공간으로 쓰던 넓은 방이 현재 남편의 침실 겸 서재, 부부 침실로 쓰던 작은 방이 현재 아내의 침실이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한 공간에는 호화로운 세간살이며 과한 장식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앞마당을 향해 난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내의 새 화실에 공들인 덕분에 박 화백이 얻은 자리는 바로 이 창가 테이블. 매일 아침 이곳에 앉아 서예를 즐기다 보면 멀찍이 남산 자락 끝이 문득문득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다. 계절이 삼릉 솔숲을 지날 때마다 수련이 자라는 연못이며 문가를 지키고 선 벽오동나무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여기가 명당자리예요.” 박 화백의 시선을 따라 창 너머를 보니 누렇게 빛바랜 벽오동 잎사귀가 바람에 후들거렸다. 이 땅의 가을이 끝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늦가을 벽오동의 운치는 그의 작업실 공간에도 그득했다.

남산 정상과 삼릉 솔숲을 조망할 수 있는 정원. 박 화백이 공들여 모은 신라 시대 유물에 정 화백이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각한 작품, 성모상을 더해 최근 재단장했다. 중심부의 소나무는 본래 이 땅에 자라던 것이다.

얼마 전 작업실 창고를 개조해 새로 마련한 정 화백의 화실. 우측으로 난 테라스가 정원과 이어진다.
1층 바닥을 뒤덮은 거대한 종이 위로 박 화백이 한창 작업중인 벽오동나무 그림이 잎사귀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곧 솔거미술관에 새로 걸 2천 호짜리 신작의 일부였다. “오늘 아침에 바람이 유독 심하게 불더니 잎이 잔뜩 떨어지더라고. 다 지기 전에 얼른 그림을 끝내야겠다 싶었지요.” 사방에 널린 먹과 붓. 깊은 묵향이 내내 코끝을 맴돌았다. 소파 옆 널찍한 창문 너머로는 최근 새 단장을 마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박 화백이 모은 신라 시대 유물, 정 화백이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각한 작품과 성모상이 둥글게 펼쳐졌다. 본래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자라온 소나무와 박 화백이 가져다 심은 소나무도 벗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건물 2층은 얼마 전 새로 마련한 정 화백의 화실. 본래 창고로 쓰던 공간인데, 지붕 한쪽을 들어 올리고 정원으로 테라스를 내 규모를 넓혔다. 역시나 큰 유리창을 통해 정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모상이 마주 보였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 공원을 위한 작품을 만들면서 영적 체험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나도 집에 성모님을 모시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딱 모시고 나니까 여기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면 성모님과 나 사이에 너무 많은 대화가 오가는 거예요. 아이고 나 큰일 났네 싶었어요. 여기선 그림도 그리고 분주하게 계속 뭘 해야 하는데, 마냥 이 앞에 머무는 것 만으로 너무 좋으니까. 그래도 참 축복이죠? 혼자 누리기엔 좀 과한 것 같아요.”

이 축복 같은 공간에서 정 화백은 지금 벽돌 위 예수의 일대기를 새겨 넣는 작업에 한창이다. 대략 스무 개 벽돌을 완성하면 그걸로 담 전체를 재구성할 계획이다. 족히 몇 년은 염두에 둔 일종의 집 프로젝트인 셈이다. “나는 어떤 일이 주어지면 열정이 쏟아져서 밤낮 가리지 않고 막 달리는 체질이라. 브레이크 장치가 없거든요. 다행히 우리 선생님이 그런 걸 철저하게 잘하는 분이고, 내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산 거예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만약 진즉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내 멋대로 살았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란 생각을 하니까.”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는 “이런 얘기는 같이 있을 땐 못 한다”며 소녀처럼 깔깔 웃었다.

박 화백의 서재며 작업실에는 늘 묵향이 짙게 감돈다. 화가로서 그의 생은 늘 이 묵향과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엑스포 솔거미술관에 전시된 박대성 화백의 ‘삼릉비경’. 가로 8m, 세로 4m에 달하는 이 대작은 소나무가 자라는 그의 정원과 그 너머 솔숲을 그린 작품이다.
집이란 마음이 거하는 곳
사실 이 부부가 처음부터 이 집에서 함께 산 건 아니었다. 박 화백이 고래등 같은 평창동 대저택을 두고 홀로 경주에 내려온 것은 1995년의 일. 틈만 나면 히말라야로 날아가 몇 달씩 원시의 산수 비경을 좇다가, 또 뉴욕에 작업실을 얻어 1년간 현대미술의 정체를 탐구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경주는 고도잖아요. 유적도 많고, 그렇게 춥지도 덥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창작의 도시라는 거예요. 과거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 유적이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에 와서 완성했다고. 그래서 여기가 창작의 도시라, 그게 나한테 들어맞았던 거지.” 경주 땅을 몇 년쯤 헤집다 지금의 터에 자리 잡고 나니 우선 건강이 좋아졌다. 당시 협심증이 심각해 혼자서는 스무 걸음도 못 걷던 그의 몸이 석 달 만에 거의 완치됐을 정도다. “여기 이렇게 고요한 데 뚝 앉아 있으니까 기가 막힌 거라. 이게 사람 사는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실제로 땅이 나쁘면 공기가 나쁘고, 공기가 나쁘면 전부 다 나빠지는 거예요. 그걸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 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청년처럼 작업하고 있는 게 다 장소 덕이에요. 이 환경이 창창하게 나를 받쳐주는 거지, 내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나는 이 환경을 믿고 까부는 거고.”

아내 역시 같은 걸 느낀다. “처음 떨어져 살 때 선생님이 서울에만 오면 이틀을 안 주무시고 내려가는 거예요. 손주들이 아무리 귀여워도 5분, 10분 보고 나면 어느새 보따리를 싸려고 난리셨으니까. 처음엔 좀 얄밉더라고. 근데 내가 경주에 와 살아보니까 알겠어. 여기서 나도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정말 이 땅이 주는 힘이 대단한 것 같아요.” 박 화백이 본래 살던 집을 허물고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은 것은 10여 년 전, 아내가 경주에 내려와 함께 살면서부터다. 물론 공간 설계는 늘 그렇듯 직접 했다. 어김없이 우선순위는 소나무. 삼릉 솔숲의 정취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집이면 충분했다. “선생님은 오로지 저 소나무에 반한 거예요. 지금 솔거미술관에 가면 가로 8m쯤 되는 대작이 있거든. ‘삼릉비경’이란 그 유명한 그림이 바로 이 장면을 그린 거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박 화백이 한마디 보탠다. “여기 이상 아름다운 정원이 또 어디에 있어.” 결국 집의 내력은 소나무에서 시작해 소나무로 끝난다. 소나무 때문에 집을 지었고, 소나무로 인해 그의 인생 걸작들이 나왔다.

6ㆍ25전쟁에 휘말려 부모와 한쪽 팔을 잃은 시골 소년,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청년 화가는 어느새 백발 성성한 한국화의 거장이 됐다. 지난 10월엔 실경 산수를 독자적 화풍으로 이룩하며 한국화의 현대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옥관 문화훈장까지 수훈했다. “솔직한 얘기로, 나는 그걸 받기 전과 후가 다를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 데 연연해서 살아온게 아니기 때문에. 물론 대단한 상이지. 나도 안다고. 그렇지만 실은 관 뚜껑을 덮어야 그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역사가 소중한 거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는지도 몰라.” 올해 박 화백의 나이 일흔여섯. 이 나이까지 줄곧 그림을 그려온 건 운명이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 털어놨다. 좋은 환경과 좋은 인연, 모든 것이 받쳐준 덕이라 했다. “인제 나도 떠날 때가 그리 머지않았다고 보거든. 그럼 그 순간까지라도 열심히 하고 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내 나름대로의 욕망이에요.” 이 1천 년 묵은 역사의 땅에서 그가 준비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1천 년 후의 역사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부부와 함께 2015년 문을 연 경주엑스포 솔거미술관으로 향했다. 박 화백이 자신의 작품 8백여 점을 기증해 건립의 기초를 마련한 미술관. 그는 이곳도 자신의 집이라 강조했다. 자신의 정수가 담긴, 몸과 같은 곳이라고. “우리가 나라고 하는 걸 착각하고 있어요. 몸뚱어리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내가 뭐야? 마음이지.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지만, 우리는 분명 인지하고 있잖아요. 그게 영혼이라, 그 혼령이 바로 우리예요.” 솔거미술관 전시장에 걸린 ‘삼릉비경’ 앞에 서서, 나는 다시금 그의 정원과 아득한 소나무 숲을 떠올렸다. 노화백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듯 진정한 자신이란 육신이 아닌 마음. 그러니 그의 혼이 거한 곳은 모두 그의 집일 터이다. 그의 소나무, 그의 불국사, 그의 예술혼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 어쩌면 이곳 경주 땅이 모두 그의 집과 다름없으리라.

글 류현경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