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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강요배 심연으로 향하는 풍경
화가의 그림은 자신의 고향 땅과 닮아 있었다. 제주의 들판과 바다, 어스름한 하늘과 초목이 모진 바람을 품었다. 한바탕 춤사위처럼 흩어지고 뒤섞여 빛으로, 소리로, 냄새로 환원했다. 일흔을 목전에 둔 화가의 삶 또한 그 풍경과 같았다. 불혹을 넘겨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수십 해에 걸쳐 제주의 자연을 몸 안으로 들였다. 바람이 후려치듯 붓질을 하고, 바람이 지난 자리를 글로 옮겼다. 올가을 그가 내놓은 예술 산문은 그 아득한 시간의 기록이다. 제주 서부 해안가 안쪽, 가을볕에 젖은 팽나무 가지 아래서 바람을 맞고 선 화가와 만났다.


늦가을의 제주 중산간 오름. 불쑥불쑥한 능선 너머 해가 뚝 떨어지면 어둑한 하늘 아래 간장처럼 새까만 흙빛이 번진다. 군데군데 치솟은 잔디와 벗겨진 흙무더기 사이, 비탈길 안자락에 자줏빛 꽃향유 무더기가 그득하다. 매서운 바람이 황야를 한바탕 할퀴고 지날 때마다 연보랏빛 섬잔디와 새하얀 물매화가 파도처럼 철썩거린다. 시커먼 땅과 시커먼 바람, 그 난폭한 세계에서 위태롭지만 황홀하게 서서히 제 존재를 드러내는 심원한 빛깔들. 이 풍경이 바로 노야老野, 늙은 들판을 뜻하는 강요배 화백의 자호自號이다. 수년 전, 그의 그림과 처음 맞닥뜨린 순간을 기억한다. 번쩍거리는 밤하늘과 격랑의 바다, 구름을 찢고 스미는 늦가을의 석양. 그의 화폭에 담긴 제주는 무던히도 거칠었다. 소슬한 적요를 지나 금세 후려치고 휘몰아쳤다. 매 순간 뜨거운 노화백의 풍경 앞에서, 어리고 무지한 감상자는 쉽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그가 펴낸 산문집을 읽으며 그 오래된 심상의 정체를 깨달았다. 캔버스 위에서 절로 소용돌이치던 것. 자꾸만 나를, 우리를 뒤흔들던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제주의 바람이었다.


“가슴 한복판에 변치 않는 그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똬리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방황해 온 궤적의 흔적이 바로 내 그림들이다.”


노란 가을볕이 빼곡하게 들어찬 귀덕화사 안마당. 그의 정주처는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여 있다. 정면에 보이는 작업실은 7년 전 새로 지은 것이다.

“어디든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나에게 중요한 곳이거든. 그러니 땅 한 뙈기라도 정들여 아끼며 살아야 해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애지중지 가꾸면서. 그게 자기를 아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섬에서 자란 나는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화가는 지난여름, 생애 첫 산문집 출간에 앞서 이렇게 썼다. “지금의 나는 젊은 나들을 긍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실제로 20대부터 60대까지 45년간 한 해에 한두 편씩 쓴 글을 모으고 추려 그림과 함께 엮어낸 <풍경의 깊이>는 그의 말대로 ‘한 화가의 인생에서 펼쳐진 생각의 여로’였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다시 제주로 귀향해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까지 굴곡진 삶, 예술적 사유를 응축한 말과 글 모음. 그 한 권의 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제주를 찾았다. 섬 서북쪽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도 관광지도 아닌 움푹한 벽지僻地 안쪽에 화가의 작업실 ‘귀덕 화사歸德畵舍’가 깃들여 있었다. 거칠거칠한 아름드리나무와 온갖 풀꽃이 만발한 마당 위로 건물 두 채가 노란 오후 볕에 화사하게 빛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공들이고 마음들여 오래도록 가꾼 풍경이었다.


“섬에서 자란 나는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유년기 내 육신과 뇌리의 세포에 각인된 그 매운바람의 맛이 강한 인력이 되어 기어이 나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화가의 나이는 마흔한 살. 다만 그 때부터 이 터에 자리 잡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10년이나 섬을 떠돌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땅을 살 돈도 없고, 집을 지을 돈도 없어서”. 20여 년의 타향살이로 몸도 마음도 지치고 시달린 뒤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서울 생활을 실패라 회고했다. “그때가 20~30대였는데, 20대 때는 대학 다니고 군대 갔다 오느라 정신없고, 30대 때는 생활 기초를 만드느라 정신없었어요.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았지요. 1980년대에 서울은 죄 공사판이고 데모판이었으니까. 힘들고, 살맛도 없고, 술이나 먹다가 위궤양으로 수술하고. 독재 말기가 내 청년기와 겹쳐졌으니 사는 게 피곤했지요.” 고단하던 서울살이. 삶을 지탱할 직장이 필요해 교단에 서고, 출판 미술계에도 몸담았다. 민중운동 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의 창립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1980년대 말, 그의 화가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 시작됐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식 깊이 드리우고 산다는 검은 장막, 제주 4·3 사건에 관한 그림이었다.


“예술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를 알려면 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게 나에게는 고향의 역사였다.”


강요배 화백의 예술은 삶과 사유에서 비롯한다. 그는 붓질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다듬기를 반복한다. 그에겐 모든 공간이 작업실이나 다름없다.


‘마파람 Ⅰ’, 1992. 돌베개 제공.

그에게 4·3 사건은 계속 미뤄둔, 그러나 언젠가는 꼭 풀어야 하는 숙제 같았다. 제주도민 3만 명의 생을 앗아간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그 가혹한 고향 땅의 역사가 화가의 의식 너머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 “오히려 심신이 미약해지니 해야겠다 싶은 거예요. 오래 못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그렇게 되기 전에 어쨌든 한 번은 들여다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사실 그동안은 겁먹고 못한 것이거든요.” 그가 죽음을 앞둔 심정으로 절박하게 찾고 듣고 그려낸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은 대중과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 4·3 사건의 실체를 알리고, 역사 속에 소생시킨 기념비적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화가는 오히려 몸을 낮췄다. 자신의 일천한 인생 경험, 짧은 호흡으로는 단지 그 표면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앞으로 더 좋은 작가, 심연에 있는 걸 찾아내 건져 올리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나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년간 그린 연작으로 전시를 연 1992년, 그는 제주로 돌아왔다.

층고가 높은 창고 형태의 작업실 안.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제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조개껍데기며 돌, 제주의 흙으로 구워낸 옹기, 접시 등이 화가의 집과 작업실, 마당 곳곳에 숨어 있다.

풍경의 추상抽象
제주 땅에 머리를 누이니 몸은 절로 좋아졌다. 마땅한 거처없이 이곳저곳 떠돌았지만 마음만은 늘 편안했다. ‘호박꽃’ ‘마파람’, 그가 “좋은 그림”이라 회고한 몇몇 작품이 그때 탄생했다. 그리고 50대 초반, 드디어 섬 발치에 정주처定住處를 잡았다. 조금씩 돈을 모아 땅을 사고, 또 조금씩 돈을 모아 집과 작업실을 지었다. 비탈진 공터에 나무도 심고 꽃도 심고, 철마다 풀을 베며 구석구석 손길을 더했다. 자연스레 자연을 관찰하며 몸으로 익혔다. 팽나무가 어떻게 가지를 뻗치는지, 분꽃이 어느 때 망울을 여는지, 파도는 어떻게 치고 제주의 자연은 어떻게 순환하는지. “육화肉畵라는 말이 있잖아요. 밖의 환경이나 분위기 같은 여러 가지가 몸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이 되는 거지요. 나는 예술가들이 생각만 할 게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한다고 봐요. 결코 육화를 소홀히 하면 안 돼요. 많이 다니고 같이 공명하고 춤추며 바람도 맞고 그래야 화면이 달라지거든.”

강요배 화백은 마치 소가 되새김질하듯 ‘재료들이 자신 안에 들어와 5년도 되고 10년도 되고 그렇게 한참 지나서 적당할 때’에 이르러서야 그림을 그린다. 켜켜이 숙성시킨 재료가 본래 형태를 뭉그러뜨린 채 냄새가 되고 질감이 되고 소리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풍경이, 감각이 점점 추상에 가까워지는 이유다. “이제 웬만한 이미지는 거의 내 속에 들어와 있다고 봐요. 그걸 나타내는 방법도 많이 알고요. 그래서 지금은 정조情調랄까, 그런 게 중요해요. 음악적 조調, 그걸 먼저 잡아야 해요. 그럼 소재는 내가 속에 있는 걸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으니까. 바다도 될 수 있고 나무도 될 수 있고 구름도 될 수도 있지요.”

새로 건물을 지을 때까지 작업실로 쓰던 넓은 공간에는 화가의 삶과 미학을 보여주는 온갖 잡동사니가 그득하다.

잔뜩 손때 묻은 붓들. 화가의 붓놀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가지런히 쌓아 올린 신문과 책장 가득한 책들은 그에게 세상일을 알려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그에게 풍경이란 정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 움직이는 것이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면 풍경이 하나로 뭉쳐 같이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담아야 시간이 각인되고, 그림이 음악적으로 변한다. “그걸 더 밀어붙이고 싶어요. 춤사위 비슷한 것만 남도록. 그렇게 되면 ‘이건 무엇이지?’ ‘어떻게 생겼지?’ 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더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겠지요.” 구상하고 다듬고 또 구상하고 다듬고, 그러고 나면 정작 캔버스를 맞대는 시간은 짧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다. 화면에 점 하나씩 찍으며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단번에, 빠르게, 그 기운을 담아내야 한다. 붓도 쓰지만 빗자루나 칡뿌리, 구긴 종이 뭉치로도 그린다. “그런 게 내 체질에 맞아요. 가끔 붓은 너무 얌전한 것 같아요. 너무 겸손하고, 너무 맥이 빠져요. 난 붓도 이쁘게 쓰는 게 아니라 난폭하게 쓰거든. 그 속도감이 좋고, 또 자국이 차분하게 남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아요.”

어쩌면 그건 제주의 자연이 야생적이기 때문, 그런 제주의 자연을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육화했기 때문이다. “뭍에 있으면 자꾸 제주로 오고 싶어요. 특히 바람. 바람이 없는데 가면 숨 막힐 것 같아요. 쏘가리는 물살 센 여울에만 살잖아요. 밍밍하게 고인 물엔 못 가지요. 나도 그래요. 안락한 것도 싫고, 약간 쌉쌀하고 쌀쌀한 곳, 막 흐르는 데서 살고 싶어요. 그런 데가 제주이거든요.” 나는 화가가 그린 겨울 팽나무를 떠올렸다. 제주의 바람 속에서 자라는 팽나무. 시련을 딛고 시련과 일체가 되어온 검은 고목. 그가 반쯤은 이 섬의 팽나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요배 화백의 삶과 예술을 응축한 산문집 <풍경의 깊이>.

삶을 위한 예술, 비움으로 가는 삶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는 “그림을 중심에 두고 살지는 않았다”고 회고한다. “세월이 흘러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으나” 삶의 목표 역시 화가는 아니었다고. 대신 그가 중심에 두고 살아온 건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을 잘 세워야 해요. 자꾸 허물어지니까요. 그림 그리는 건 내가 계속 나 스스로를 세워온 과정이에요. 아마 그림을 안 그렸으면 많이 허물어졌을 거예요. 모멸감, 열등감, 열패감, 이런 여러 가지가 쌓여서. 그러니까 사실 나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예술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예술. 평생 2천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온 화가에게 과연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닌’ 삶이란 무엇일까?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충분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첫째로 자기 존중이 필요해요. 그럼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 우주를 견딜 수 있어요. 거기에 좋은 벗이나 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으면 더 완벽해지겠지요. 사실 내가 살고, 내가 죽는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디든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나에게 중요한 곳이거든. 그러니 땅 한 뙈기라도 정들여 아끼며 살아야 해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애지중지 가꾸면서. 그게 자기를 아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화가는 자신이 아직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털어놨다. 더 자유롭게, 형태를 더 흐트러뜨려야 한다고도 했다. 미완의 화가, 미완의 인간. 그가 생각하는 ‘완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이러했다. 부드럽고 넓고 따스해지는 것, 비워내는 것, 신체도 마음도 모두 이런 덕목에 서서히 접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디 사람이란 채우고 싶어 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텅 빈 땅을, 텅 빈 방을, 텅 빈 마음을 견디지못해 자꾸만 손을 뻗는 존재이지 않은가. 화가가 빈 술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나는 우리가 이런 술잔처럼 만들어져 있다고 봐요. 이렇게 막걸리를 꽉 채워놓은 술잔. 여기서 중요한 건 지금 막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심오한 곳, 가장 깊은 곳이에요. 근데 우리는 자기가 술잔이면서도 술잔인지 몰라요. 대부분 이 막걸리 표면이 나라고 생각해요. 화를 잘 내거나 자주 슬퍼지거나 하는 표면적 자아를 자기모습이라 믿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굉장히 깊 보편적인 지점이 있어요.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거기가 하늘(天)이에요. 우리가 끝내 도달할 곳이지요.” 그러니까 화가가 말하는 ‘미완의 나’는 ‘심연으로 향하고 있는 나’이다. 표면 쪽은 개인적이지만, 그 아래 깊은 곳은 보편적 세계다. 모두와 연결된 세계, 우주처럼 거대한 세계다.

화가의 우주는 이곳 제주 섬 귀퉁이의 팽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집 안 곳곳을 뚫어서 낸 큼지막한 창문 너머,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했다. 지구 남쪽에서 태풍에 실려 올라온 바람이 화가의 집 마당과 뒤편을 반시계 방향으로 휘돌았다. 점점 짧아지는 한낮의 화양연화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느새 처마 아래 나지막한 그늘이 생겼고, 창가에 고인 보랏빛 분꽃이 하나둘 망울을 열었다. 사위가 어둑해져야만 비로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분꽃, 빛이 약하고 바람이 난폭한 곳에서 더 선명해지는 색.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그와 같았다. 경계가 무너진 중간 영역, 늦가을의 어스름할 무렵. 그의 삶 역시 그런 조도로 채워져 있었다.


“바람은 영겁의 시간 속을 불어온다. 바람을 맞는 물과 돌과 땅거죽엔 시간이 각인된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방황과 시련, 물과 돌과 바람이 이끈 생. 그리하여 그는 노야, 제주의 늙은 들판이 되었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김상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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