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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작가 이진주 감각하는 시선
평온한 삶의 수면에 느닷없이 돌처럼 날아드는 기억. 파이고 갈라지는 물길을 따라 강렬한 파동을 일으키는 세계. 이진주 작가의 시선은 그 파동의 모서리를 예민하게 뒤따른다. 수면 아래 분연하는 진실이 얼마나 불편한 것이든 집요하게 관찰하고 감각해 아주 비범한 풍경으로 우리 앞에 마주 세운다.

이진주 작가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두산갤러리 뉴욕,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모스크바 트라이엄프 갤러리 등 국내외 갤러리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진행했습니다. 삶과 현실을 집요하게 관찰해,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낯설고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무의식을 유영하는 캔버스 위, 온갖 심상한 사물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가위와 연필, 마스킹테이프와 망치, 돌과 나뭇가지…. 위태롭게 서 있거나 서로 몸을 기댄 사물들 사이엔 어떤 맥락도, 의도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정체 모를 손과 손이 그 사이를 휘젓고, 침묵하는 거대한 여백이 그 너머에 몸을 웅크릴 뿐. 그것은 기억이다. 아무 때나 기척도 없이 나타나 제멋대로 뒤섞이고 팽창하며 깊은 시간의 장막을 드리우는 기억. 이진주 작가의 캔버스는 그 기억을 꺼내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날카롭게 감각한 뒤 회화적으로 표현해낸 결과물이다. “제가 지니고 있는 트라우마에 가까운 부정적 기억으로부터 출발한 작업이에요. 원치 않는데 일상 속에 아무런 맥락 없이 툭툭 들어오기도 하고, 끔찍한 꿈을 꾸거나 이상한 상상을 하게 하는 기억말이에요. 처음엔 무척 불편하고 괴로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궁금해지더라고요. 이게 뭐지? 왜 그렇지? 의도하지 않았는데 왜 계속 나타나는 거지? 이것저것 찾아보며 공부도 했지만,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연구는 이미지로 그 순간 순간을 포착해 심리적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었죠.”

실제로 그의 그림은 지극히 일상적 사물의 기묘한 나열에서 비롯한다. 연필, 화초, 가위, 돌 등 어느 하나 정체 모를 형상이 없건만, 쉬이 그 맥락을 읽어낼 수 없는 건 그가 마치 기억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사물 하나하나를 새롭게 마주하기 때문.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 느닷없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 그는 돌연 자신을 사로잡는 사물 앞에 매번 아주 생경한 시선으로 다가선다. “항상 다니던 집 앞 골목이나 만날 손에 쥐던 물건처럼 너무나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이 갑자기 특별하거나, 비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럴 때 저는 그 장면을 포착해요. 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사진이나 드로잉·오브제로 남긴 뒤 또다시 바라보고 생각하죠. 그러고는 굉장히 디테일한 그림으로 묘사하는데, 그게 제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인 것 같아요. 연필 하나라도 극도로 치밀하게, 오랜 시간 공들여 관찰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어떤 새로운 국면이 있거든요. 그런 느낌과 시선을 익숙한 대상에서 재발견해 작품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때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이 동양화의 철학인 전신사조傳神寫照. ‘초상화를 그릴 때 터럭한 올마저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인물의 형상은 물론 그 정신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이토록 치열하게 ‘시간을 담아’ 그려낸 그림이 보는 이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길 바란다. 그가 보여주고 싶던 시간을 직접 경험하며, 대상 너머로 떠오르는 감정이나 감각, 기억과 상상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길 바란다. 그것은 그가 작가로서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사각死角(The Unperceived)’, Korean color and acrylic on linen, 122×488cm, 122× 488cm, 122×244cm, 122×220cm, 2020 ⓒ 2020 Jinju Lee
사각死角,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이진주 작가의 초기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집중했다면, 불혹을 막 넘긴 지금 그가 바라보는 건 기억에 담긴 세계,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그것이 동시대 우리 사회와 맺어온 관계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기억과 경험이 나만의 특수하고 주관적인 무언가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제가 존재해온 시대와 공간의 여러 상황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생각하고 또 상상해왔다는 거죠.” 개인과 사회가 이항 대립적 존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속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 그것은 그의 캔버스를 개인에서 사회로, 과거에서 동시대로 끊임없이 확장시켜나갔다. “우리가 만나는 이 세계에 대해 좀 더 소통하며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눈앞에 산재한 사회적 이슈를 특유의 정교한 시선으로 포착해왔다. 환경과 종교, 공동체 의식 등 결코 가볍지 않은 화두가 하나 둘 그의 심리적 풍경 안에 담겼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그의 캔버스에 가장 많이 등장한 요소 중 하나는 식물. 대부분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잘려나간 나무의 일부다. “초봄이면 가지치기를 당한 가로수를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잖아요. 갑자기 그 모습이 비범하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도시에서 겨울을 보내며 나무 표피는 굉장히 검고 거칠어졌는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잘라낸 단면의 속살은 아주 여리고 맑고 매끈했죠. 그 시각적 대비가 너무 강렬해 눈에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사실 그가 나뭇가지를 보는 시선은 돼지나 닭을 보는 시선과도 흡사하다. 인간이 개입해 바꿔놓은 환경, 자연, 그리고 세계에 관한 시선이다. 그는 지구상에 남은 가축 종과 개체 수만 살펴도 이 세계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으로 편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잔인무도한 가축 사육 시스템부터 야생동물의 멸종 위기까지, 그의 시선은 동시대 인간의 온갖 불편한 진실을 하나하나 훑어 내린다. “우리 주변에는 불가해한 일이 너무나도 많잖아요. 그런 일과 마주했을 때 적어도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으면 해요. 뭔가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죠.” 이달 <행복> 표지작인 ‘Withstand’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만하다. 잘린 나뭇가지와 가위, 컴퍼스, 돌 등 온갖 사물이 위태롭게 직립해 있는 이 작품은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개인전 출품작이다.

‘사각死角(The Unperceived)’의 일부분. ⓒ 2020 Jinju Lee

그의 작업실 책장에는 무수한 책과 도록, 자료가 빼곡히 꽂혀 있다. 그는 이곳에 앉아 불현듯 일상에 침투하는 기억과 그 너머의 세계에 관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Withstand’도 그렇고, 제 작품 속 사물이 종종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자세로 위치하잖아요. 전 그것이 ‘초현실’이라기보다는 다소 주관적이고 심리적이긴 해도 발끝은 현실의 이 땅에 닿아 있는 풍경 같아요. 발뒤꿈치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무게감과 위태로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현재 이진주 작가가 가장 집중하는 화두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표작인 ‘사각死角(The Unperceived)’은 벽에 거는 대신 ‘공간에 놓은’ 회화 작품. 긴 캔버스 두 개를 A자 형태로 세운 뒤 그 안쪽에 또 다른 그림을 숨겨둔 구조다.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항상 왜곡과 결핍이 존재하잖아요. 같은 시공간에 있더라도 공간을 바라보거나 기억하는 방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요. 그런 ‘불완전한 보기’에 대한 시각적 구조를 제시하고 싶었어요. 결핍이 부정적 의미로 느껴질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이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앞으로도 비슷한 맥락의 작업을 이어가되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제시할 것인가에 관해 꾸준히 연구하고 실험할 계획이다. 그가 무의식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사물과 풍경, 지극히 의식적으로 맞닥뜨린 우리 사회의 여러 화두는 이 예민한 회화 작가의 캔버스에 점점 더 다양하고 도발적인 방식으로 녹아들 터이다. 그것이 때로는 불편한 진실이라도, 그래서 자꾸만 외면하고 싶더라도, 그의 말처럼 ‘시선을 거두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되짚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사각死角(The Unperceived)>
기간 2021년 2월 14일(일)까지
장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83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매주 월요일 휴무)
문의 02-736-5700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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