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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순례기 서원에서 길을 찾다
경북 안동과 경주에 위치한 서원 세 곳을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배용 이사장과 독일인 프리랜서 기자 안톤 숄츠가 함께 거닐었다. 6월의 훗훗한 빛깔 아래 자연을 느끼며 교육과 정신문화의 가치를 되짚은 이틀간의 동행.

초여름 신록으로 감싸인 병산서원의 입교당 툇마루에 이배용 이사장과 안톤 숄츠 기자가 나란히 앉았다.
안동에 도착한 건 뒷덜미까지 볕이 올라선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병풍처럼 도시를 감싼 산등성이마다 창취한 신록이 굽이굽이 시야를 메웠다. 바싹 마른 아침 햇살이 사방에서 후드득 부서져 내렸다.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시내에서 산골짝으로, 낙동강 줄기를 끼고 울퉁불퉁한 흙길을 내달려 도착한 이곳은 병산서원. 조선의 명名재상이던 서애 류성룡을 배향(학덕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한 서원이다.

초여름 볕을 따라 경북 안동과 경주로 서원을 찾아 나선 길, 그 시작점에는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배용 이사장이 있었다. 지난해 7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아홉 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데는 전 이화여대 총장이자 국가브랜드위원장을 맡기도 한 그의 공이 컸다. 2011년부터 무려 10년 가까이 직접 발로 뛰며 서원을 정비하고, 명분과 보편적 가치를 보완해 인류 유산으로 키운 인물이다. 그리고 오늘, 그가 안동에서 만나기로 한 이는 독일 출신 프리랜서 기자 안톤 숄츠. 대략 20년 전 한국 문화와 선불교에 빠져 한국행을 택했다는 그는 “함께 서원 구경을 해보지 않겠냐”는 <행복>의 제안에 흔쾌히 광주에서 안동까지 먼 길을 달려와주었다. 오전 11시, 서원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 탁 트인 만대루晩對樓 누마루에 올랐다. 건물을 휘감고 흐르는 낙동강 줄기 너머 병산이 형형한 푸른빛으로 객들을 맞았다. 이배용 이사장과 안톤 숄츠 기자가 병산 앞에 마주 앉았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자연의 순리를 배우는 삶
이배용 참 아름답지요. 여기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유식遊息 공간이에요. 학생들이 공부하다 쉬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즐기기도 하는 곳인데,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히지요. 강학 공간인 입교당立敎堂 마루에서 병산을 바라봐도 무척 수려하지만, 만대루가 들어섬으로써 시야를 한 번 걸러주는 거예요. 우리 문화는 뭐든 그렇게 금방 막 다가서는 게 아니라 하나씩 걸러서 들어가는 문화이니까요. 그 안엔 경건함과 겸손함이 있고요.

안톤 숄츠 담양 소쇄원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소쇄원도 건물과 자연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정말 아름답네요. 사실 사찰엔 많이 가봤는데, 서원이란 장소는 제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이배용 서원은 쉽게 말하자면 16~17세기의 사립학교예요.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1천 년을 이어온 불교가 물러가고, 성리학을 국시로 한 도덕 국가가 세워졌지요. 특히 4대 임금인 세종 때 여러 가지 민족문화를 육성했는데, 우선 백성이 깨어나야 한다 해서 한 읍에 하나씩 향교를 세웠어요. 다만 물자나 서책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향교가 아주 형식화되어버렸죠. 결국 향촌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교육기관을 세우기 시작해요. 공자를 제향하는 게 아니라 각 지역의 선현을 제사 지내면서 그 뜻을 계승하기 위한 교육을 펼치고자 한 거지요. 서애 류성룡 선생의 뜻과 학문을 계승한 이곳 병산서원처럼요.

안톤 숄츠 여기 앉아 있으니 어느 정도 상상이 돼요. 옛날엔 사람들이 여기서 교육도 받고, 시도 쓰고 그랬겠죠. 게다가 대들보나 서까래를 보면 자연스러운 원래 나무 모양을 살렸네요. 이런 게참 좋아요. 저는 최근 시사 프로그램에 많이 나가는데,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면 항상 나오는 게 교육과 사람이에요. 특히 젊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많이 깨졌다고 생각하거든요. 대부분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까. 아파트 문화는 편리하지만 사람들 마음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없어지게 해요. 최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울한 문화가 커진 것도 제 생각엔 첫 번째 이유가 교육제도, 두 번째는 자연과 관계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이배용 근본적으로 그렇지요.

안톤 숄츠 그래서 이런 장소에 오면 자연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음속에 평화가 생겨요. 이런 보물 같은 장소가 아직 한국에 남아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에요.

이배용 중국 학자들도 이곳에 오면 중국의 서원과 규모나 환경이 완전히 다르니까 또 다른 특별한 감동을 느껴요. 하늘과 땅, 사람이 이루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가 있으니까요. 여기 앉아서 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 속에 순리가 있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결국 가을이 오고. 인간도 마찬가지잖아요. 그 순리를 어그러뜨리며 뭔가 붙잡으려고 집착하는 게 문제지요. 욕심을 버리고 순리를 따르는 데서 공부가 시작되는 거예요.

안톤 숄츠 사실 유교나 성리학을 가르친 나라는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까지 현대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어요. 그래서 확실히 이런 교육 문화가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죠. 다만 지금은 조금 왜곡됐다고 생각해요.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욕심을 버리는 마음이나 배려하는 마음, 이런 건 지금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잖아요. 무조건 1등 해라, 포기하지 말고 다 가져라…. 지금 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고 배려하는 마음, 포기하는 마음도 다 잊어버렸어요. 그사이 한국은 부자 나라가 됐지만,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니까요. 개인의 행복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 별로 행복하지 않아요. 근데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교육때문에 생겼고, 결국 교육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배용 맞습니다. 제가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한 것도 유네스코라는 물리적 성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교육 문제점에 관한 대안을 서원 교육에서 한번 찾아보고자 한 거예요.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어요. 특히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데 도취되어 이런 정신문화의 중요성과 가치를 많이 폄하하거나 잊어버렸지요. 우리의 정신문화 복원 운동이 지금 너무나 절실해요.

입교당 툇마루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한참이나 계속되던 대화는 존덕사尊德祠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끊겼다. 서애 선생과 그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 유림들의 안내를 받으며, 어느새 두 손을 경건히 모은 객들의 묵례가 이어졌다. 새소리와 솔밭을 휘젓는 바람 소리가 긴 침묵을 관통했다.

이배용 병산서원은 아름다운 건축으로도 유명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정신은 서애 선생에게서 찾아야 해요. 주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한 다른 배향 인물들과 달리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난국을 타계하고, 이순신·권율 등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는 혜안을 지닌 분이에요. 선조가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목숨을 건 직언도 아끼지 않으셨고, <징비록>을 써 과거의 잘못을 훗날의 경계로 게 하셨어요. 그런 충효 정신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이에요. 그러니 단순히 건축의 아름다움만 감상할 게 아니라 건축 안에 깃든 정신을 살펴야 해요. 왜 강학 공간의 벽을 막아놓았는지, 왜 안마당에 매화를 심었는지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안톤 숄츠 그러고 보니 서애 선생님의 스승인 퇴계 선생님도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긴 겨울을 뚫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 매화는 강인한 기개를 상징한다. 얼어붙은 땅속에 뿌리 내리고, 혹렬한 한기 속에서도 줄기와 잎을 틔워낸다. 옛 선비들이 매화를 사랑한 이유는 너무나 타당하다. 실제로 병산서원 곳곳에는 매화 외에도 묵묵히 세월을 삼켜온 고목들이 저마다 고고한 자태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를테면 존덕사 앞을 지키는 건 1614년 수암 선생이 심었다는 배롱나무. 곧 여름이 무르익으면 이 두툼한 가지 끝마다 붉은 꽃잎이 한껏 망울을 터뜨릴 터이다. 이배용 이사장은 “병산서원을 지켜주는 나무 같다”며 오래도록 나무둥치를 쓸어내렸다.

퇴계 이황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도산서원의 향사례享祀禮는 지난 4백여 년간 안동 유림들에 의해 굳건하게 이어져왔다. 매년 춘추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이면 제관들이 도산서원 상덕사로 향한다. 사진 제공 (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도산서원陶山書院
서원 교육에 내일의 답이 있다
늦은 점심 식사 후 하회마을 섶다리 주변을 산책하다 이내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차로 열심히 달리니 한 시간가량 걸리는 길이었다.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서원 앞으로 안동댐 상류의 물줄기가 하늘과 맞닿아 있다. 푸른 하늘과 푸른 호수. 모두가 입을 모았듯, 맑고 짙고 빛이 찬연한 날이었다. 안동호 한복판엔 둥근 축대가 섬처럼 솟아 있었다. 송림에 감싸인 고즈넉한 축대 위 공간은 시사단試士壇. 1792년 조선 각지의 유생 7천 명이 과거를 보기 위해 몰려든 장소다. 정조 때 신설한 ‘도산별과’가 조선시대에 한양 아닌 곳에서 치른 유일한 과거 시험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대 도산서원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정문을 지나 오른쪽 모서리를 파고들면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했다는 도산서당이 검박한 자태로 시선을 끈다. 퇴계 선생은 말년에 낙향한 뒤 서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매진했는데, 그의 사후 제자들이 선생을 모시는 사당을 지으며 지금의 도산서원을 완성했다. 살마루가 시원한 서당 툇마루에 앉자마자 이배용 이사장이 1천 원짜리 옛날 지폐를 꺼냈다. 2007년까지 쓰던 구 화폐에는 퇴계 선생과 도산서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배용 이분이 퇴계 선생이에요. 잘 보세요. 이분은 칠십 평생 동안 관직을 1백40차례 제수除授(왕이 벼슬을 내리는 일)받았는데, 그중 3분의 2는 안 나갔어요. 그저 교육을 통해 선한 사람 만드는 데 전념하겠다 하셨지요. 그런데 교육받는 도중 학생들이 졸릴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잠을 깨우는 방법이 화폐에 그려진 투호(화살처럼 생긴 막대기를 항아리에 던져 넣는 놀이)예요. 1m쯤 떨어진 곳에서 막대기를 정확히 던져 넣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 저절로 졸음이 달아나는 거지요. 화폐 뒷면에 보이는 공간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도산서원이고요.

안톤 숄츠 저한테 좀 신기한 게, 지금 한국 지폐를 보면 네 명이 나오잖아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 그리고 신사임당. 근데 남자 셋 중 둘은 성리학자이고, 여자도 이이의 어머니이니까 결국 세 명이 성리학과 관계있는 사람이죠. 사실 한국이란 나라에 성리학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좀 더 다양한 종교, 다양한 문화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배용 우리가 조선왕조 5백 년간 고수해온 성리학의 근본 가치는 교육이에요. 불교는 종교잖아요. 그러니까 이 교육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거예요. 화폐를 만들 땐 나름대로 다양한 여론을 수용하며 인물을 설정하는데, 1970년대 당시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잊힌 우리나라 전통 교육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육의 사표師表가 되는 두 인물을 뽑은 거지요. 신사임당도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조선시대에 예술로, 교육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인물이고요.

안톤 숄츠 사실 여자의 역할도 그렇고 옛날부터 해온 규칙, 관습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부분은 시대에 맞게 바꿔야한다고 생각해요. 4백 년, 5백 년 전에는 새로운 가르침이었고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5백 년 전과는 다른 시간이니까요. 사회에 맞는 시스템, 시대에 맞는 여자의 역할, 이런 것을 살리는 교육제도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이배용 서원 교육에 그 답이 있어요. 여긴 입시 준비하는 학원이 아니에요. 우선 인성을 기르고 사람다운 마음가짐을 배운 뒤 시험도 보게 되면 보는 건데, 우리 교육이 요즘 출세 위주, 권력 지향적으로 바뀐 거예요. 퇴계 선생만 봐도 정말 시대의 산소 같은 목소리를 낸 분이에요. 도덕적 나라를 만들려고 그렇게 공부를 시켰는데도 왜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반성했는데, 이분의 답은 심성론에 있었어요. 인간의 마음에는 본디 착함이 있으니 그 근본을 끌어내면 갈등이 해소되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킨 분이지요. 퇴계 선생이나 율곡 선생이 조선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했기 때문에 이렇게 성리학 유산이 교육 유산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거였고요.

퇴계 선생의 손길이 가득한 도산서당에서 나와 서원 현판이 걸린 전교당典敎堂 툇마루로 올랐다. 한낮의 열기에 달아오른 안마당과 달리 툇마루 위엔 서늘하고 한갓진 풍취가 흘렀다. 활짝 열어젖힌 뒷문 너머로 대숲이 파닥거렸고, 현판 위 정갈한 글씨 넉 자가 오후 햇빛에 반짝였다. 조선의 명필로 꼽히는 한석봉(석봉 한호)의 글씨였다.

안톤 숄츠 여기에 학생들이 오면 보통 얼마나 오래 공부했나요?

이배용 그건 좀 다양해요. 몇 년씩 머무른 사람도 있고, 짧게 왔다 갔다 한 사람도 있고. 서원 교육은 학년제가 아니거든요.

안톤 숄츠 저는 예전에 몇 년 동안 사찰에서 수행을 했어요. 새벽 3시에 일어나 수행하다 다시 한 시간 정도 자고 또 일어나 수행하고. 당연히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마음을 맑게 만들기 위해선 이런 불편한 상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숭산 스님 제자인데, 스님이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찰에서의 생활은 감자 씻는 것과 비슷하다고. 처음에는 감자가 더러워요. 근데 통에 다 넣고 서로서로 계속 밀면 점점 깨끗해지죠.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몇 개월이든 1년이든 이런 경험을 한번 해봤으면 해요. 그럼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는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쁜 짓을 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런 일이 가끔 쉽고 편하니까.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게 어려워요, 사실.

이배용 그래요, 그게 가장 어려워요. 퇴계 선생이 강조한 것도 불쌍한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부끄러운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배려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다음 가장 중요한 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에요. 이게 결국 교육의 기본이지요. 이런 정신을 도외시하는 지금의 풍조가 근본을 자꾸만 잊어버리게 해요. 내가 서원이나 사찰을 강조해온 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그 정신적 근원을 통해 내일의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의미예요.

그 밤, 우리는 도산서원 가까이에 있는 선비문화수련원에 여장을 풀었다. 퇴계 선생의 종택과 선생이 자주 거닐었다는 낙동강변 예던길을 지척에 둔 곳. 간간이 직원들만 오가는 산기슭의 한옥형 숙소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담박했다. 오후 7시. 서울에서라면 일과도 채 끝나지 않을 초저녁이건만 이미 해가 떨어진 산속은 사방이 깜깜했고, 이부자리를 꺼내 곱게 펼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이 흘렀다.

옥산서원 초입의 무변루에서 바라본 구인당. 저 뒤에 내삼문이 있고, 그 뒤로는 사당인 체인묘가 자리한다.

회재 이언적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들어서기 전, 정중히 의복을 갖춰 입은 이배용 이사장과 안톤 숄츠.

안톤 숄츠가 독일어, 영어, 한글, 한자까지 총 네 개의 언어로 채운 옥산서원 심원록.
옥산서원玉山書院
끝도 시작도,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세계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이제 경주로 향할 시간. 이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옥산서원으로 가기 위해서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 호수로 내리꽂는 유리 조각 같은 햇살이 어제보다 더 뜨거운 하루를 예고했다. 아직 농익지 않은 여름은 한결 저돌적이었다. 옥산서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경. 신라의 천년 고도이자 불교 문화의 본산인 이곳 경주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성리학 유산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는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그는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학문 수양에 매진했는데, 이후 그의 학문이 제자인 퇴계 선생에게 이어져 영남학파의 뼈대를 이뤘다. 지금도 서원 앞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자계천이 흐르고, 회재 선생이 이름 붙인 바위 세심대洗心臺에 퇴계 선생의 글씨가 남아 있다.

강학당인 구인당求仁堂으로 향하자, 유림들이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독일인 기자를 환영하며 심원록(방명록) 작성을 권했다. 조선 최고 명필들의 팽팽한 기 싸움 현장(대청에 걸린 ‘구인당’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 처마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에서 독일어와 영어, 한글, 한자까지 망설임 없이 적어내린 안톤 숄츠의 붓글씨가 심원록 마지막 페이지를 채웠다.

이배용 이곳 제향 인물인 회재 이언적 선생은 아주 대단한 분이세요. 16세기에 그 시대의 중심을 잡은 인물이거든요. 이분은 우주 원리를 말씀하셨어요. 끝도 시작도, 넘침도 모자람도 없고, 딱 있을 것만 있는 것, 그게 우주라는 거예요.

안톤 숄츠 선불교와 무척 비슷한 생각 같은데요?

이배용 다 통하니까요. 최치원 선생도 유불선儒佛仙(유교·불교·선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 다 통한다고 말하셨지요.

안톤 숄츠 여기 소나무 냄새가 나요. 물소리와 새소리도 크게 들리고. 정말 마음이 편안해져요. 이런 곳에선 더 필요한 게 없잖아요. 멋진 핸드백이나 이런저런 비싼 아이템이 아무 쓸모도 없죠.

이배용 그런 걸 많이들 느끼고 체험해야 하는데…. 나도 그걸 꿈꾸며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든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안톤 숄츠 정말 오늘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날인데, 여긴 왜 사람이 없을까요?

이배용 사람들이 우리 문화에 참 인색하지요. 근데 오고 나면 또 달라져요. 나하고 공부한 사람들을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안톤 숄츠 그러니까 선생님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하잖아요. 좋은 선생님이 있어야 좋은 제자가 생기는 거예요.

이배용 회재 선생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강직했어요. 중종이 잘못하면 계속 상소문을 올렸죠. 임금의 마음이 발라야 백성도 마음이 바르다며 상소로 열 가지 도리를 말씀하셨어요. 집안 단속 잘하고, 세자 교육 잘 시키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인사人事를 제대로 하고, 천심을 헤아리고, 백성을 교육시켜 인성을 바로잡고,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사치와 욕심을 경계하고, 안보를 탄탄히 하며 세금을 공정하게 매기고, 돌아가는 기미를 잘 살필 것. 그중 열 번째가 가장 중요해요. 위태롭지 않을 때가 더 위태롭다는 거지요. 그 안에 늘 위태로운 징조가 있으니까요.

안톤 숄츠 역시 모든 지도자는 롤 모델 같은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근데 너무 많은 정치가가 욕심 많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어요. 이 시대엔 재벌도 어느 정도 지도자 역할이 있는데, 계속 힘과 돈을 모을 생각만 하는 경우도 많고요. 원래 성리학에서 말하던 이런 롤 모델이 어디 있을까 자주 생각해요.

이배용 그러니까 역사를 돌아보거나 이런 곳에 올 때마다 항상 지나치고 무리하면 화를 자초한다는 걸 느끼게 되잖아요. 우리가 역사를 통해 경계해야 할 미래이지요.

사당과 장서각을 지나 유물관 깊숙이 들어서자 서원의 위상을 가늠케 하는 온갖 유물이 쏟아졌다. 정조가 하사한 글부터 류성룡·권율 등의 방문 기록이 담긴 심원록 1백40여 권, 한석봉과 김정희의 현판 글씨 원본과 만인소萬人疏(조선시대에 1만 명의 선비가 목숨 걸고 왕에게 청원한 상소문)까지 무려 6천3백여 점을 보관한 옥산서원 유물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국보 제322-1호인 아홉 권짜리 <삼국사기> 완질본. 선조 6년인 1573년 경주에서 찍어 옥산서원으로 보낸 목판본이다.

안톤 숄츠 안타까운 건, 날씨 좋은 주말에 여기를 찾아온다고 해도 이 장소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어떤 의미와 가르침이 있는지, 사람들 대부분이 몰라요. 이런 설명을 못 들으면 그냥 잠깐 구경하다 사진 한 장 찍고 가버리는 거예요. 이건 너무 아쉬워요. 지금 건물 자체는 선생님 덕분에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이곳의 콘텐츠도 교육 프로그램이나 워크숍으로 만들었으면 해요. 그냥 구경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배용 그러니까요. 알아야 보석으로 보이지, 모르면 다 지나가버리니까. 근데 사람들은 성미가 급해요. 하나하나 관조하고 음미하면서 사상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퍼 올릴 샘물이 뭔가를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데, 그냥 겉핥기 식인 경우가 많지요.

안톤 숄츠 오늘 경주에 오면서도 생각했는데, 옛날엔 내비게이션 없이도 길을 잘 찾았잖아요. 그리고 옛날 사람들은 별이나 나무를 보면 어디가 북쪽인지 이런 거 다 알고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내비게이션만 믿으니까 점점 바보가 되는 거예요. 사실 가장 중요한 내비게이션은 마음속에 있어요. 우리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 내비게이션이 없어지면 안 돼요.

경주를 떠나기 전, 회재 선생이 낙향해 잠시 거처한 독락당獨樂堂에 들렀다. 운치 있는 돌담 사이사이 한옥과 자연의 조화가 빼어난 이곳은 과연 자연과 벗하며 학문 수양에 전념하고자 한 선비의 은둔처로 모자람이 없었다. 토담 살창 너머 유유히 흐르는 자계천과 절벽 끝에 걸터앉은 정자, 모든 풍광에 깃든 풍류와 운치가 여정의 남은 피로를 씻어냈다. 이배용 이사장과 안톤 숄츠가 후일을 기약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이틀간 두 사람과 함께 거닌 이곳은 마음의 방향이 흔들림 없이 견고한 이들의 세계. 끝도 시작도,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세계. 그 오래된 미래 속에 우리가 찾던 길이 있었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이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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