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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노은님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
하나둘 찍은 점이 세포가 분열하듯 형태를 갖추다 물고기가 되고, 육지를 걷고 하늘을 나는 새가 되었다. 노은님 작가가 회고하는 자신의 그림이 발전한 과정은 마치 생명의 진화를 축약한 것 같다. 단순한 선과 점으로 완성한 그의 그림이 원초적 생명력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이유일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 화실의 노은님 작가 뒤로 함부르크 쿤스트하우스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에 함께 참가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사진이 보인다. 함부르크는 그가 독일 생활을 시작하고, 작가로 거듭난 제 2의 고향 같은 도시다. 그는 이곳과 미헬슈타트의 고성을 오가며 살고 작업한다.
10년도 더 전에 갤러리에서 본 노은님 작가의 그림 한 점이 기억에 아직 생생하다. 물가에 선 새 한 마리가 자기 다리 사이를 지나는 물고기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목은 ‘부자 새’. 아무렇게나 그은 듯한 선 몇 개와 두 단어로 어찌 그리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되새길수록 놀라웠다. 8월 18일까지 성북동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한남에서 열린 <힘과 詩>는 노은님 작가의 1980~1990년대 작품과 2019년 신작을 망라하는 대규모 전시였다. 입과 코는 없어도 동그란 눈은 꼭 그려 넣은 이상한 동물 그림으로 세상만사를 표현하는 노은님 작가의 거침없는 선과 활달한 색채가 신작에선 더욱 자유로워 보였다. 노은님 작가는 간호사 일을 하러 스물셋 나이에 떠난 독일에 지금도 산다. “동화 속 옛 마을처럼 공주도 백작도 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숲속의 작은 도시” 미헬슈타트의 고성古城에 서 살며 작업하는 노은님 작가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예술과 만난 순간을 기억하나요?
독일 건너간 이듬해였나? 스위스 취리히 미술관에서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그림을 보고 뭔가 가슴이 울컥했어요. 현대미술에 대해 알기는커녕 그림도 잘 그리지 않을 때였어요. 그런데 보는 순간 마음이 찡하기에 나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작품 아래 쓰여 있는 이름을 종이에 적어 와서는 어느 나라의 어떤 화가인지 찾아보았지요. 현대미술이 이런 건가? 생각했어요.

한국에선 미술을 전혀 몰랐나요?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독일 오기 전에 어머니 얼굴 보고 싶을까 봐 초상화 그리는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너무 비싸서 내가 그리려고 물감을 샀는데 몇 번 해보다 포기했어요. 물감이 아까워 독일 오는 길에 챙겨 왔는데, 다른 할 일도 없어서 눈에 보이는 걸 하나둘 그렸습니다.

‘ 봄의 시작’, acrylic on canvas, 20×20cm, 2019
자연은 보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여준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한 장 두 장 쌓여갔다. 독감 때문에 결근한 그를 문병 온 간호장이 우연히 침대 밑에 구겨 넣은 그림을 발견하고, 남 보여줄 그림이 아니라는 그의 만류에도 병원 회의실에 그림을 전시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그림을 팔았고,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에게 배운 한스 티먼의 눈에 띄어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서 그림을 배웠다.

미술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어찌 입학은 했지만 처음엔 무척 힘들었어요. 학생이라지만 작가로 활동하다가 학교에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에 비하면 나는 그림을 배운적도 없으니 늘 부끄러웠지요. 익숙해질 때까지 아무거나 그려봤어요. 그때부터 종이에 점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둘 점을 찍고 선을 그었더니 세포분열하는 것처럼 형태가 만들어지고, 뭔지는 모르지만 원초적 동물의 형태가 되기 시작했어요. 물이 없으면 말라 죽을 테니 물속에 그리고, 차츰 물고기처럼 되었다가 육지로 가고,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

마치 생물 진화의 역사를 축약해놓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점 하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거예요.

작품 속 동물은 코, 입은 없어도 동그란 눈은 꼭 있습니다.
그렇게 그려놓은 동물을 나중에 모아서 죽 보니까 죄다 눈이 없었어요. 물고기도, 새도 다 눈이 없는 거예요. ‘아이쿠, 내가 눈이 멀었나. 다 장님을 만들어놨네’ 하고는 그 다음부터 눈을 꼭 빼놓지 않고 그렸지요.(웃음)

무얼 보고 그릴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한스 티먼 교수님과 함께 나를 가르친 카이 수덱 교수님에게 “자연은 보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여준다”는 걸 배웠어요. 역마살이 꼈는지 그동안 세상을 너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지구를 몇 바퀴는 돈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형태를 지닌 온갖 걸 다 봤어요. 그런 게 그림이 되어 나오는 거겠지요. 무슨 동물을 그린 거냐고 많이들 묻는데,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어느 봄날’, mixed media on canvas, 161×225cm, 2019
어디서 어떻게 봐도 되는 그림
“그냥 그렇게 나온,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으로 노은님 작가는 승승장구했다. 독일은 물론 미국과 벨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의 주요 갤러리와 비엔날레, 도큐멘타등에 초청받았고, 1990년부터는 20년간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생전에 그를 무척 아끼던 백남준 선생의 소개로 1986년 원화랑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미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라서 당시 특별한 소감은 없었다고. 노은님 작가는 오는 11월, 중세부터 현재까지 미헬슈타트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 네 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영구전시관을 연다는 소식을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투로 전했다.

작품을 본 사람들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어느 화랑에서 전시가 열린 날, 노인네 한 분이 한참 그림을 보고 나서 “손을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더군요. 손을 내미니 어떻게 이렇게 작은 손에서 이런 그림이 나오느냐고 말한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 작은 손으로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리나요?
예전엔 막막하고 무섭기도 했는데, 이제는 붓을 쥐고 앉아있으면 손이 종이 위에서 술술 움직여요. 그만큼 많이 봤으니까, 멋대로 나오는 거죠.

‘큰 머리 동물’, 테라코타, 2005. 8월 18일까지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한남에서 열린 <힘과 詩> 전시에서 노은님 작가는 그림과 더불어 온갖 동물을 손으로 빚은 테라코타 조각 30여 점을 선보였다.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노은님 작가의 신발. 그는 옷이나 신발에 점을 찍고 선을 그려 변신시킨다. "조금만 고치면 재미있게 변하는 물건이 늘 주변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새 인간’ 퍼포먼스(1984). 회화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작업으로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표현했다. 노은님 작가는 두 개의 존재를 하나로 결합하는 자웅동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확장한다.
표지작 ‘나무가 된 사슴’도 그렇게 그린 건가요?
하다 보면 그냥 손이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생각 없이 그려요. 그러니 그림 그릴 때 늘 즐거워요. 뭘 하겠다고 작정하고 하면 그림이 안 되죠. 손 가는 대로 두고 보다가 부침개 뒤집듯, 아래위를 돌려가며 어디서 봐도 그림이 되게 그립니다. 내 그림은 뒤집어 걸어 놔도 괜찮아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행복? 글쎄…, 행복은 인간을 유혹하는 수식어일 뿐이에요. 신은 인간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기에 희망과 잠을 주었다고 합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이 행복을 사냥꾼처럼 찾아다니는 게 아닐까요?

예술가로서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것이 있나요?
아직도 못 해본 작업을 계속 하고 싶어요. 그리고 내게 더 많은 힘이 있다면 온 세상을 안아주고 싶고, 더 긴 발이 있다면 이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습니다.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화가 노은님은 파독 간호사로 한국을 떠난 후 그린 그림이 한스 티먼 교수의 눈에 띄어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전시와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에 참가하고, 1990년부터 2010년까지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와 미헬슈타트의 고성을 오가며 작업하는 노은님 작가는 오는 11월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영구전시관을 개관할 예정입니다.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제공 가나아트센터, 노은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