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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천년의 질문> 펴낸 작가 조정래 "인생은 노력하는 방황이요, 과정의 철학이오."
구덩이에 갇힌 것처럼 가위눌리는 시대를 살다 보니 어느샌가 정치 혐오증에 빠진 우리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가’ 조정래가 새 소설집 <천년의 질문>을 내민다. “오늘, 당신에게 대한민국이란 무엇입니까?” 무장 무장 통장 잔고 채워가느라, ‘영어만 잘해라, 수학만 잘해라’ 아이들 부추기느라 분주한 우린 무어라 답할 것인가?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그 시대상을 밝히는 책, 언론 보도, 그 일을 겪은 이의 인터뷰를 수집한다. <천년의 질문>을 위해 검토한 자료와 메모 수첩. 

그는 육필로 쓰는 몇 안 남은 작가다. 


‘나의 삶, 나의 행복’ 글을 기고한 <행복> 1988년 4월호, <태백산맥>을 끝낸 후 인터뷰한 <행복> 1990년 3월호.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있은 이후 수천 년에 걸쳐서 되풀이되어온 질문. 그 탐험의 길을 나서야 하는 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사람은 왜 누군가 껴안아주어야 할까? 스스로 외로움을 다 껴안기에 인간은 팔이 짧다. 마음속의 결핍을 다 껴안기엔 누구나 두 개의 팔뿐이다. NL계(민족해방계)든 PD계(민중민주계)든 한쪽 대열에 편입하는 것을 의무로 알던 누군가의 1980년대에도, ‘문민정부’ 출범 후 독재 타도 대신 등록금 투쟁을 부르짖으며 콜라텍을 드나들던 누군가의 1990년대에도, 카뮈의 <이방인>보다는 김치 먹는 개 앞에서 존재의 부조리를 더 절감하던 누군가의 2000년대에도… 어느 시절이든 <태백산맥>은 청춘들의 가슴팍을 비집고 찾아왔다. 이념이라는 금기 지대를 파고들며 해방 정국의 민족사를 그려낸 이 소설 앞에서 청춘들은 기묘하게도 마지막엔 누군가가 껴안아주는 듯한 온기를 느꼈다. 염상진, 김범우, 정하섭, 하대치, 염상구, 소화… 이들이 몸으로 발설하는 이야기 앞에서 우린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을 했고, 또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인간애라는 감정이 없다면 사람은 좀 따끈한 진흙 반죽에 불과하다고 연신 주억거렸다.

“내가 초등학생 때 코흘리개들 앞에서 빨치산 가담자를 처형하던 시절인데 말이오. 설날 인사하러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속삭대요. ‘누구 아버지가 빨치산이라 해도 그 누구 차별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천대하지 마라.’ 이 한마디가 40년 후 나로 하여금 <태백산맥>을 쓰게 만든 거요. 시간이 흘러 1980년대가 되었어도 반공주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자나 빨치산을 악마라고 가르치던 것을, 나는 그들도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인간 선언’을 한 거요. 또 전쟁 통에 인민군만 나쁜 짓 저지른 게 아니라 우리 경찰이나 국군, 미군도 잘못한 일이 있다, 그걸 솔직하게 쓰자는 것이 내 입장이오.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내 영혼을 통해 <태백산맥>을 거쳐,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치고 의식을 바꾸게 만들지 않았나 말이오.”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 소리가 멀리 스쳐 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끝

원고지 1만 6천5백 매 분량, 열 권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은 집필 6년 만인 1989년, 이 문장으로 끝맺었다. 소설을 탈고한 날 소설가 조정래의 아내 김초혜 시인은 1백 8송이의 핏빛 장미꽃을 사 들고 왔다. 이후 <태백산맥>을 읽지 않고는 청춘 축에 끼기 어렵다는 확신이 들불처럼 번졌다. 반공 이데올로기·분단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면서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태백산맥>의 시각은 소설이면서도 역사서 역할을, 그것도 ‘술술 잘 읽히는’ 역사서 역할을 했다. 이 책은 1997년에 1백 쇄, 2009년에 2백 쇄를 돌파했다. 이념이나 체제에 대한 인식이 대학생에게조차 희박해진 21세기 들어서도 <태백산맥>은 필독서로 군림했고, 열 권 합쳐 8백50만 부 이상 팔리는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그가 한국 근현대사를 소설 속에 지뢰처럼 매설한 <아리랑> <한강>, 우리 현대사를 바탕으로 미래를 조망한 <정글만리> <풀꽃도 꽃이다> 역시 수많은 청춘의 책장 속에 장기 투숙했다.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다!
민주화 정부 3대가 무능함을 저지른 14년 동안, ‘기업국가’를 꿈꾸던 건설 대통령과 독재자의 딸이 군림한 8년 동안 우리 청춘들은 정치와 척지게 되었다. 등록금 대출, 취업 전쟁, 집값 엑소더스 앞에서 우리 생은 그저 먼지처럼 풀썩거렸다. 열심히 살았지만 더 질 나쁜 채무자가 되었고, 직장에서 버림받기 위해 직장을 사랑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안간힘이 덕지덕지 묻은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2019년 6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듯하던 우리에게 77세의 작가는 <천년의 질문>이라는 물음을 던졌다.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있은 이후 수천 년에 걸쳐서 되풀이되어온 질문. 그 탐험의 길을 나서야 하는 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국가라니…. 이 얼마나 막막하고 황망한 화두인가. 투표하는 순간에만 우릴 주인이라 할 뿐, 투표가 끝나자마자 한갓 노예로 전락시키는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이냐니….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 “이게 나라냐”며 비탄하던 우리 국민에게 대체 국가가 무엇이냐니…. 그는 원고지 3천6백12매 속에 융단폭격처럼 질문과 해답을 던졌다.

“1976년 즈음, 월남전 특수로 기업들이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었어요. 당시 경제학자들, 빨리 의식을 깨친 작가들이 ‘분배’를 이야기했어요. 그때 국무총리가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축적의 시기다’라고 했고요. 국민은 언젠가 분배의 시기가 오기를 침묵 속에 기다렸어요. 이제 1인당 국민총소득 3만 달러 시대, 30대 기업의 사내 보유금이 9백조 원(국회 공개 자료) 넘는 시대가 됐으나 우린 어떻냐고요? 30대 기업의 비정규직 비율은 평균 42%, 최고 높은 기업은 57%. 이게 말이 됩니까? 선진국은 비정규직 1~2%, 있어봤자 인턴 사원인데. 국가가 대기업을 끝없이 보호해줬는데 대기업은 이윤을 다 지들이 먹고, 끝없이 비자금 모으고. 검찰은 정치인과 결탁해 기업 수사 안 해 버리고. 이 나라가,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우리 손자가 사는 세상은 이래선 안 되겠다, 그래서 이 소설 썼어요.” 온갖 협잡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 나라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는 1990년대 학원 자주화를 위해 투쟁한 적 있는, 현재 열혈 기자 장우진이다(올바른 인간의 길을 찾는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태백산맥> 김범우의 현신과도 같다). 장우진과 함께 투쟁했으나 지금은 국회의원의 칼럼 대필까지 하는 시간 강사 고석민, 국회의원 윤현기, 그룹의 비자금 서류를 챙겨 달아난 평민 출신 재벌가 사위 김태범…. 이들을 중심으로 재벌의 비자금, 정경 유착, 입법·사법·행정·언론의 부패 사슬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펼쳐진다. 그 안에는 재벌 딸의 욕설과 폭행, 퇴직 공무원의 유관 기관 재취업, 전관 예우 등 현실 속 비리가 실물 그대로 출몰한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찔해진다. 정치를, 국가를 말하기에 내겐, 당신에겐 주름치마처럼 접어둔 삶의 난제가 얼마나 많으냐 말이다. 그러나 노작가는 엄정하게 꾸짖는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부패 지수는 세계 1백80여 개국 중 58위, OECD 32개국 중 29위라 합니다. 경제 규모는 11위, 수출은 세계 7위라는데요. 이 꼴이 된 것은 다섯 개의 권력 집단이 부화뇌동한 것이 반, 감독을 소홀히 하고 방치한 국민, 바로 당신과 나의 어리석음이 반이라고요.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면서, 국가가 일을 태만히 하는지 감시 감독하지 않으니 국가가 우릴 노예로 부리게 된 거라고요. 이제라도 우리를 기만하는 자들에 대해 분노와 증오를 가져야 해요. 어떻게? 프랑스는 인구 9천만에 1백만 개의 비영리 민간단체가 있어요. 한 사람당 몇 개씩 시민 단체를 지원하는 겁니다. 스웨덴은 23만 2천여 개, 핀란드는 14만 4천여 개이고요. 한국은? 지속적 활동이 이뤄지는 건 몇십 개에 불과해요. 그렇다면 우리도 북유럽 국가처럼 천만 평화상비군을 갖자, 매달 시민 단체에 1천 원씩 내는 천만 명을 모으자, 그 돈을 지원받는 단체의 활동가가 활발히 움직이면서 일 안 하는 권력 기관을 감시하고, 그게 적발되면 국민이 탄핵·파면하고, 편법이나 불법 자행하는 기업은 불매운동하고, 그렇게 피 흘리지 않는 혁명을 이뤄보자, 이 말을 하는 소설이에요. 거미줄도 1천 개가 모이면 호랑이를 묶어요. <태백산맥>이 원고지 1만 6천5백 매인데, 그걸 쌓으면 사람 키를 넘고 대포로도 못 뚫어요. 종이 한 장이 그럴진대 국민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소홀히 하지 말라, 국민 한 명 한 명은 국가고 천하天下다, 그런데 국민이 그 존엄을 스스로 왜 버리는가, 뭉쳐라, 북유럽처럼 법을 지키고 살아도 함께 잘 사는 사회,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로 좀 만들어보자, 작가가 지금 국민에게 소설로 속삭거리는 거예요.” 그 말을 마쳤을 때 그의 눈빛이 출렁했다. 그 눈빛을 보자 내 가슴도 따라 출렁했다. 

만해 한용운의 제자이자, 식민지 시기 비밀결사 조직의 일원이었고, 해방 당시 선암사 부주지이던 아버지 철운 스님 (식민지 종교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시범적 대처승이었다가 해방 후 환속했다)이 절 앞에 써놓았다는 강령만 봐도 조정래의 의식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절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모든 사답은 소작인에게 무상분배해야 한다’ ‘승려는 자질 향상을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1974년, 그가 등단 4년 만에 첫 작품집 <황토>를 내면서 작가의 말에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내가 해독할 수 있는 역사, 내가 처한 사회와 상황, 그리고 그 속의 삶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2008년 태백산맥 문학관 세울 때 벽면에 육필로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고 새겨 넣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문학관이 단번에 읽힌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포기입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면서, 국가가 일을 태만히 하는지 감시 감독하지 않으니, 국가가 우릴 노예로 부리게 된 거라고요.”


황홀한 글감옥
제 몸을 울려 누군가를 일깨우는 죽비처럼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해 누군가를 일깨워왔다. <한강>을 쓸 땐 왼쪽 탈장이 됐고, 이번 책을 쓰면서는 오른쪽 탈장이 됐다. 한번 앉으면 뛰쳐나갈 수도 없는 형틀 같은 책상에서 하루 열세 시간씩, 모나미 네임펜으로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썼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그 원고지는 정확히 2등분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렇게 작가 인생 내내 그는 ‘황홀한 글감옥’이라 부르는 형틀에서 ‘몸의 피가 말라가고 하얗게 표백되는 기분’으로 썼다. 그에게 다른 열락이란 없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취미도 없다. 아내인 김초혜 시인은 그를 두고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작가일 거예요. 무미 무취하기로 말이에요”라고 한다.

이대로 죽지 싶은 고통 속에서도 ‘내가 알고 있는 걸 올바로 쓰면 진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쓴다. 그가 소설을 역사의 기록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함은 이미 유명하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은 거의 실존 인물이며 소화의 집, 외서댁이 몸을 던진 저수지처럼 장소도 모두 실존한다. “1차는 책을 중심으로 한 자료, 2차는 시대를 대변한 신문 보도 자료, 3차는 실제 그 일을 겪은 사람의 증언. 그래서 책 한 권을 쓰려면 메모 수첩 1백여 권이 생겨요.” <천년의 질문> 때도 그만큼의 메모 수첩이 생겨났다.

글 앞에서 결벽증에 가까운 그 곁을 김초혜 시인이 지켰다. <태백산맥>을 쓰며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위해 위협을 느낄 때도 “작가가 쓰고 싶은 것을 못 쓰면 작가라고 할 수 있겠느냐. 염려 말고 쓰고 싶은 거 다 써라. 문제가 생겨도 내가 애 하나 데리고 견딜 수 있다”고 말하던 아내가. 그는 아내의 신뢰에 대한 답으로 “언젠가 자연적 이별을 할 때 그때 잘해줄걸, 하는 회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란 약속을 평생 동안 성실히 지켜왔다. 그가 <행복이 가득한 집> 1988년 4월호에 쓴 ‘나의 삶, 나의 행복’이란 칼럼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마음먹는 대로 글이 쓰여지는 것이 다. (중략) 남겨진 삶을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생은 노력하는 방황이고, 과정의 철학이라고 했다. 내 인생은 내가 쓴 소설의 한 자 한 자에 스며 있고, 그 모아짐이 내 인생의 결과가 될 것이다. 그 확인 이상의 행복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30년이 지난 오늘, 그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다시 물으니 “지금도 그래요. 변함이 없어요”라 답한다. “글 쓰다 엎드려 죽길 바라오. 생애 마지막 작품이 대표작이길 바라오”란 말도 덧붙였다.

위선과 속물기로 뭉친 대한민국 중년인 나는, 중산층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나는 <천년의 질문>을 읽는 내내 누군가 나를 은밀히 엿본 것 같아 찜찜했다. “당신에게 대한민국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내가 그나마 찾은 답지는 이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한 치의 빈틈없이 껴안아줄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고, 그걸 내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궁내동의 산 아래로 바람이 솨아아 불어댔다.

‘지금 스무 살인 손자 세대만큼은 우리가 겪은 모순과 갈등과 문제점을 겪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가 <천년의 질문>을 쓰게 된 시작점이라고 그는 말한다. ‘모든 권력자는 국민 앞에 겸손하라’ ‘모든 국민은 국가에 국가의 의무를 요구하라’. 그가 이 소설에 담은 시대 정신이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