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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궂은 비바람이 막아설지라도 나는 도예가 이세용이다
마치 인간의 태생처럼 하얗고 순수한 도자기를 캔버스 삼아 찬란한 나날의 절정으로 치솟는 듯한 푸른빛 그림을 그리는 도예가. 1년이 넘게 지독한 병마와 싸워 이겨냈고, 작업실로 돌아온 날. 위태롭던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예술을 향한 열망으로 다시 붓을 쥔 도예가 이세용의 작업실을 찾았다.

하얀 도자기에 현대인의 단상을 그려 넣은 작품으로, 조은숙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에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껏 해온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작업실 2층의 갤러리. 병마를 이겨낸 이세용 작가가 오랜만에 작업실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지인의 애완견과 함께한 모습.
도예가 이세용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경희대학교 도예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다음 국립요업기술원의 책임연구원으로 13년간 일했다. 정확하고 과학적인 접근으로 흙과 유약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여기에 이세용 작가의 예술성이 빚어내는 도자 형태와 과연 회화 작가인지, 도예가인지 정체성이 헷갈릴 정도의 유려한 청화 그림이 더해지자 더없이 완벽하면서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했다. 작업 모티프는 무궁무진했다. 원칙적 자연주의자답게 꽃, 벌레, 동물 그리고 자동차, 가방을 멘 사람 등 도시 사물에도 작가 특유의 천진난만하고 해학적 시선이 머물렀다. 작업은 생활 자기에 그치지 않고 도판, 도조, 조형까지 이어졌다. 경희대학교와 국민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미국 마이애미, 밀라노, 홍콩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총 26회의 개인전도 열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오가며 이세용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유난한 작업은 나날이 켜켜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몸에서 이상한 증세가 느껴졌다. 1년 3개월 전의 일이다. 손가락과 발이 저려왔고 그저 나이가 들어 그러한 줄 알았다. 원래 디스크 증상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증세가 악화되어 부종양증후군이 나타났고, 말초신경에 장애가 생겼다. 그 원인을 찾으려 안 해본 검사가 없고 뇌혈관 조영술까지 했지만, 아무런 원인이 발견되지 않아 절망적이던 작년 말, 소세포폐암을 발견했다. CT 검사로도 발견하지 못할 만큼 작은 암세포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그때가 보다 자유롭고 왕성한 작업을 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완성한 직후였다. 청천벽력 같은 결과였다. 하지만 보통 3기가 되어야 발견된다는 소세포폐암을 초기에 발견했기에 열심히 치료하면 된다는 믿음과 아내의 헌신적 병간호를 받으며 방사선 치료를 했다. 건장한 도예가의 몸은 점점 말라갔고 체중이 25kg이나 빠졌다. 끈질긴 노력으로 암 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올해 5월, 재활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 뒤로 아픈 동안 약해진 호흡, 마비된 양팔과 손, 힘을 잃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할 만큼 열심히치료받고 운동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이세용 작가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작업실에 들어섰다.

경쾌한 색을 입고 작업실 입구에서 문지기 역활을 하는 이세용 작가의 인체상.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점토를 포개고 합쳐 완성한 작품이다. 손발이 작아서 아주 위태로운 모습으로 현대라는 시대가 지닌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이세용 작가가 그림을 그린 여러 개의 정사각형 캔버스와 도판으로 완성한 작품.


이세용 작가를 대표하는 청화백자 기법. 도자 위에 검은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불에 구우면 청려한 푸른색을 낸다.

꽃, 벌 레, 식물, 사람 얼굴 등 이세용 작가가 그린 그림으로 완성한 식기류.

안료를 만들고 도자를 빚어 굽는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경기도 여주 작업실.
오른손잡이에서 왼손잡이가 된 도예가
작업실로 들어선 이세용 작가는 숨도 고르지 않고 붓을 잡는다. 붓을 잡은 손은 평생을 써온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다. 말초신경 장애로 마비된 두 팔과 손 중 필사적인 재활 치료에 먼저 응답한 건 왼팔과 왼손이다. “참 래요. 저는 왼손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요. 왼손으로 생전 처음 그림을 그려봐요. 왼손이라도 자유로우면 좋으련만, 팔뚝 아래만 겨우 움직이고, 엄지손가락과 검지, 중지만 사용할 수 있으니 붓 잡는 것조차 버거워요. 또 마음대로 안 되니까 마구 약이 오르는 거예요. 그때 아내가 목멘 목소리로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요. 맞아요. 정말로 감사한 일이에요. 그런데도 날로 욕심이 차네요.” 체중이 25kg나 빠져 기운이 없을 법도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누그러 지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렸고 사람을 그렸다. 젊고 순수하던 화풍은 오히려 더 풍부하고 자유로워졌다. 작가의 눈은 영롱하게 빛났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내 마음대로 안 돼도 즐거워요. 평생을 해온 일인데 이걸 놓는다고 생각하면 억울해요. 길게 살아야 해요.” 그리고 12월 6일부터 조은숙 갤러리에서 전시 를 연다. 완치하더라도 전과 같지 않을 그간의 작업을 풀어내려 한다.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작업실. 이곳에서 제2의 작업 인생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제는 버겁지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 이마저도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가 더욱 찬란한 이유
전시를 앞둔 작품에는 형태의 한계를 넘어선 식기와 스툴, 신체상이 있다. 금속과 도자, 분청과 백자 등 다양한 소재를 융합한 작품도 있고, 캔버스의 일부에 도자를 덧댄 것도 있다. 그림 속 사물의 일부를 도자기로 만들어 부착하는 작업인데, 옷도 있고 핸드백도 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어머니의 핸드백은 요술 상자와 같았어요. 사탕이나 과자, 장난감, 구급 약 등 제가 필요한 건 무엇이든 있었지요. 집도 들어 있을 것 같고, 권총이나 자동차 심지어 벌레같이 무서운 것, 모란꽃이나 사과같이 아름다운 것이 모두 공존할 것 같다는 상상을 했어요. 저에게 여자의 핸드백 속은 하나의 작은 자연이었어요.” 당분간 왼손으로 도판에 그림 그리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예전부터 꿈꾸던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 “빨리 나아서 아이와 성인 남자를 위한 소변기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안료에 관한 책도 쓰고 싶고요. 2년은 꼬박 걸려야 겨우 알 수 있는 도자 안료에 관한 책인데, 정확하고 상세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도예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으로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고 몸이 불편하던 앙리 마티스가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종이를 오리는 작업을 하며 이전의 회화 작품보다 더 유명한 ‘푸른 누드’ 같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아픔은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강렬한 열정, 더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이세용 작가의 현재이며 미래다.


<Art Life> 전에 가고 싶다면
기간 2018년 12월 6일~2019년 1월 12일
주소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80길 37 조은숙 갤러리
문의 02-541-8484

글 이경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