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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부고 행복을 짓고 떠난 사람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떠나간 철학자는 이렇게 썼지만, 남은 사람의 마음은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새로운 사유와 창조적 기여로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시인 허수경(향년 54세)
지난여름, 허수경 시인이 15년 전 낸 산문집이 이름을 바꾸어 다시 나왔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다소 뜬금없다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다 정갈하면서도 가슴에 사무치는 문장에 책을 잠시 덮었다 펴서 읽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고고학을 연구하며 독일 뮌스터에 살던 그가 오랜 투병 끝에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산문집 재출간은 시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밤에 강가에 나가면 강에서는 빛이 난다.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비늘빛이다. 나는 어릴 때 별들은 물속에 살다가 하늘로 가는가, 하고 물었다.” 시인지 산문인지 모를 짧고 아름다운 글을 읽으며 먼 곳에서 마지막으로 이 책을 다시 모국의 독자에게 읽히고 싶어 한 시인의 마음을 가만 짐작해본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향년 82세)
프랑스 파리에서 모델이 저고리 없는 색색의 치마 드레스를 입고 캣워크에 서자 한국에선 전통과 다르다고 비난했지만, 유럽 언론은 가장 모던하고 가장 한국적인 ‘바람의 옷’이 왔다고 격찬했다. 한국 디자이너로서 최초로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가 폐렴으로 별세했다. 그는 외국에서 ‘기모노 코레(한국의 기모노)’라 불리던 우리 옷 표기를 한복Hanbok으로 바로잡으며 한복 현대화, 세계화의 포문을 열었다. 예술가보다는 한복 디자이너로 불리길 원한 고인은 생전 <행복>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구 선생님은 전통을 알수록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행복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문화 요소를 잘 간직할 때 비로소 세계인이 우리에게 호감을 느끼니까요. 이것이 문화의 힘입니다.”


작가 김서령(향년 62세)
경쾌한 스타카토 말투와 따스한 눈웃음이 지금도 선하다. <여자전-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를 쓴 김서령 작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의 이야기 듣는 걸 즐겨 급기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그는 <행복>에 황창연 신부, 김병기 화백, 농암 이현보 선생 종택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감 넘치는 문장으로 풀어냈다. 지난 9월엔 전시 <김서령의 다정하고 고요한 물건들의 목록 물목지전物目誌展>을 열어 아끼던 물건을 지인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이렇게 썼다. “나 없는 빈집에 물건들만 덜렁 남은 것은 싫었다. 탐내는 친구들에게 내 손으로 나누고 싶었다. 아주 즐겁게 매우 행복하게.”


불문학자, 문학평론가 황현산(향년 73세)
책 읽는 사람들의 밤에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있었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그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사유했고, 단정한 미문에 명징한 통찰을 담았다. 2015년 담도암 판정을 받은 후 번역을 시작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와 두 번째 산문집 <사소한 부탁>이 유작으로 남았다.


철학자 김진영(향년 66세)
미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철학 아카데미 대표였던 김진영의 제자이던 작가 은유는 생전의 선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진영의 말은 문장으로 된 악보다. 육화된 교양, 깊은 직관, 풍성한 감성이 조화를 이룬 말들은 피아노 타음처럼 온몸을 두드렸고 정신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시민적 비판 정신의 부재가 이 시대의 모든 부당한 권력을 횡행케 하는 근본적 원인이라고 믿은 철학자 김진영은 대학과 여러 인문학 기관에서 철학과 미학을 강의하고,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기고했다.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은 그는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산문집 <아침의 피아노>에 실릴 글을 썼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

글 정규영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