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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뉴펀들랜드섬 천 년 전 바이킹을 쫓는 모험
캐나다의 ‘깡촌’ 뉴펀들랜드섬, 여름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곳에 ‘오리선생’ 한호림이 다녀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악천후를 뚫고 잡초조차 자라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1천 년 전 바이킹의 흔적을 찾아 떠난, 황당하지만 유쾌하고도 숙연한 모험 여행을!

1천 년 전 북미를 처음 발견한 바이킹의 땅, 랑즈 오 메도즈의 황량한 풍경.

눈보라가 몰아치던 캐나다 횡단 1번 도로.

뉴펀들랜드섬 북동쪽으로 향하는 바이킹 트레일 표지판. 이번 여행에선 매일 8~10시간을 운전해 무려 7350km를 달렸다.

도로변에서 멀거니 바라보던 무스 암컷. 현존하는 사슴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무겁다. 다른 사슴류와 달리 무리를 지어 생활하지 않는다.
“뿌우~왁!”
곤히 자고 있는 선객船客을 깨우는 스피커 소리 한 번 요란했다.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뭐라고 한참 떠들더니 뚝 끊긴다. 아침 6시, 입항 한 시간 전이란다. 캐나다 동쪽 대서양에 면한 주州인 노바스코샤의 노스시드니North Sydney의 페리 터미널에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거쳐 대서양의 큰 섬, 뉴펀들랜드Newfoundland로 건너가는 페리에 차를 싣고 캐빈에 든 것이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이래저래 새벽 1시가 넘어 잠든 선객들, 게다가 시간대가 바뀌어 시간이 30분 빨라졌으니 선객들은 채 다섯 시간도 못 잤다. 집단 수면 부족 상태의 선객들을 단번에, 아주 확실히 깨워놓으려고 그 스피커 소리는 그렇게 요란했나 보다.

선창 블라인드를 걷고 바깥 날씨부터 확인했다. ‘아니 뭐야, 이거?’ 컴컴한 회색 하늘에 더 컴컴한 회색 바다, 그 위를 온통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질 않나? 지금이 어느 때야? 낼모레가 6월 아냐? 마침 떠나기 전에 듣자니 한국은 완전 여름, 기온이 30℃까지 올라갔다고 하고, 내가 사는 토론토도 이상 기온이긴 했지만 29℃까지도 올라갔다는데, 이 뉴펀들랜드라는 섬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으니…. ‘어허? 오늘 700km 이상 운전해야 하는데….’ 살짝 엄습하는 긴장감 속에 드디어 멀리 다가오는 뉴펀들랜드의 바스크항(Port aux Basques), ‘어허, 이건 ‘완존’한 겨울 풍경이네….’

랑즈 오 메도즈의 바이킹 상륙 기념 조형물. 남자 다섯, 여자 한 명으로 구성되었다. 고대로부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던 당시 여행자들은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고려해 아내 또는 여자를 동반했다.

바닷가 개척자 공동묘지. 넋이라도 고향 쪽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던 걸까? 가난한 개척자들은 비석 세울 돈도 없어 큰 돌덩이 하나로 대신했다. 당시엔 돌덩이에 써 놓았을 이름도 지워진 지 오래다.
아니 뭐야 이거? 지금이 어느 땐데 눈보라야?
한 대씩 한 대씩, 앞차 꽁무니만 따라 줄줄이, 마치 토해지듯 페리 아가리(bow door)를 빠져나가는 승용차들, 땅만 디뎠다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눈보라 속으로 속속 사라진다. 이건 뭐, 내비게이션 찍을 것도 없다. 이 섬은 거의 모든 도로가 외통이다. 그냥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악천후에 시계視界는 바로 앞밖에 안 보이고 도로는 질퍽한 눈 반죽으로 뒤덮였는데, 화물 트럭들은 기세 좋게 고속으로 추월하면서 그 껄쭉하고 시커먼 눈 반죽을 우리 차 앞 유리에 냅다 뿌리면서 가버린다. 알고 보니 여기서는 소금에 모래까지 섞어서 뿌 린단다. 그럴 때면 아무리 와이퍼가 바쁘게 작동해도 길게는 2~3초까지도 앞이 잘 안 보인다. 순간 꽈악 잡게 되는 핸들.

크기가 우리 남한보다 약간 큰 뉴펀들랜드섬, 이 섬을 남한으로 쳤을 때 페리에서 내린 위치는 ‘목포’에 해당하는 곳. 그러고 도로가 외통이니 무조건 ‘대전’에 해당할 곳(Deer Lake)으로 올라간다. 그게 장장 북동쪽으로 300km인데 거기까지 가야 ‘서울’로 가든 ‘부산’으로 가든 갈 수 있다. 우리는 대전에서 서울 쪽으로 400km를 더 올라가 세인트앤서니St. Anthony까지 일단 가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런 도로가 있나? 명색이 캐나다 횡단 1번 도로(Trans Canada High-way1)인데 정말이지 내 나라 한국과 너무 대비된다. 그냥 끝없이 길만 이어져 있을 뿐 도로변에 자동차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라는 게 전무하네. 무슨 휴게소라도 있어야 아침 요기라도 할 거 아닌가? 이건 그야말로 ‘쉬야’ 할 데조차 없으니 말 다했다. 도로 표지판조차도 별로 없다. 그저 종종 무스moose 조심하라는 경고판이나 나올 뿐. 무스는 사슴과의 대형 동물로 넓적한 뿔이 일품인데 이렇게 덩치 큰 무스와 고속으로 달리던 승용차가 충돌하면 정말이지 사달이 난다. 특히 야간 주행에서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악천후를 뚫고 세 시간을 달려 드디어 ‘대전’을 통과, 북동쪽으로 가는 바이킹 트레일Viking Trail(430번 도로)로 들어섰다. 이제부터는 왼편으로 대서양을 끼고 400km를 올라가는 거다. 아니, 어쩌면 이리도 황량하고 척박한 풍경이냐! 해풍에 시달려 아예 반쯤 누워 있는 나무들, 농경지 하나 보이질 않는구나. 이 섬의 북쪽 끝을 한국의 ‘휴전선’이라 쳤을 때 바로 그 아래인 서울 가까이 올라가자 눈발이 차츰 잦아지면서 하늘의 회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저쪽으로는 푸른 하늘도 한 점 보이네.

운전 조건은 거의 최악이지만 도대체 우리 차 앞뒤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으니까 시속 120km로 계속 달린다. 경고판에 있는 대로 정말 도로변에 무스들이 나타난다. 길섶의 누런 풀뿌리들을 뜯어 먹다가 무표정하게, 그래도 경계는 하겠다는 눈빛으로 목을 쳐들고 우리를 바라본다. ‘저건 암컷 무스구나….’ 도망갈까 봐 서서히 차를 멈춘다. 우선 소리 안 나게 차창 유리만 내리고 사진을 찍는다. 건너편 무스들은 넉넉한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저 멀거니 우리를 바라본다. 카메라를 들고 찰칵! 찰칵! 찰칵! 이번엔 움직이는 무스를 찍어야지. 차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이 설정한 안전거리를 깨고 일부러 발을 쾅쾅 구르면서 다가가는 체를 한다. 무스들은 털레털레 뛰어 숲으로 달아난다. 그 모습을 연속 사진으로 찍는다. 성공! 그런데 왜 얘들은 하필이면 인간 구역인 도로변에 나오는 거야? 숲속에서나 있지. 아, 그건 제설용으로 도로에 뿌려대는 소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자기네 생리에 필요한 염분을 섭취하려고 나온다.

(사 먹을 시설이 없어서) 아침도 굶은 채로 눈보라 속을 뚫고 장장 700km를 운행해 뉴펀들랜드 거의 최북단 세인트앤서니로 오는 도중 날이 맑아졌다. 장거리고속 운행으로 우리가 눈보라를 앞질러온 걸까? 호텔에서 알아본 내일 날씨도 좋단다. ‘그래, 우린 여행운이 따르지… 암.’ 목적한 빙산 투어 회사와 예약도 쉽게 마쳤겠다, 호텔 내 바에서 자축하는 의미로 아내와 포도주도 한잔 걸치고 잤다. 그렇게 잘 자고 난 아침, 깨자마자 커튼을 젖히고 창밖부터 봤는데, ‘어…?’ 어제 그놈의 눈보라가 뒤따라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짙은 회색 하늘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네. 예약한, 빙산 보러 가는 보트 투어 회사에서 아침 8시 반에 확인 전화하라고 했는데…. 이건 전화하나 마나고…. 그러나 위험이고 뭐고 우리만이라도 태워준다면 강행할 생각으로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다. “Sorry!” 오늘은 배를 못 띄운단다. ‘허….’ 바로 요 시기가 뉴펀들랜드는 1만 년 전에 형성된, 북극권 그린란드에서 떠내려오는 빙산을 보는 최적기. 우리는 토론토를 떠나기 전, 전화로 빙산들이 뉴펀들랜드 북쪽에 나타났다는 걸 확인까지 했지 않나? 그래서 우리 깐에는 타이밍 맞추어 떠났던 것. 그런데 그 빙 산들을 못 보게 됐다고? 더군다나 다음 날 날씨도 장담 못 한다고? ‘어허?’ 그래? 하는 수 없지. 우리의 그 많은 자동차 여행 중 운이 잘 맞아 좋았던 때도 많았잖나.

큼직한 생선 토막이 가득한 바닷가재잡이 미끼 통을 보여주는 퇴직 교사 앨런 험버. 뒤쪽으로 우리 부부를 태워준 GMC 트럭이 보인다.

캐나다 대서양 지역의 전형적 목조 등대. 보기엔 예쁘지만 이곳에서 살 생각만으로도 외로워진다.

랑즈 오 메도즈의 무장한 바이킹 전사 동상. 가슴의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바이킹 상륙은 기독교가 북미에 상륙한 첫 사건이기도 하다.
1천여 년 전, 바이킹이 거주하던 곳
내가 여행 투자를 하며 이 황량한 큰 섬 북단까지 온 목적이 단지 빙산 보는 거 하나였겠나? 아니지, 사실은 더 큰 목적이 있지. 뭐냐? 내 관심사요, 나 홀로 연구 주제인 옛 항해사史의 흔적 밟기. 세계적으로 그런 중요한 지역이 여기, 이 뉴펀들랜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거고 그 땅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사진 찍고 싶어서다. 아메리카 대륙은 누가 발견했나? 콜럼버스! 언제? 1492년! 그래, 맞다. 그렇게들 알고 있다. 그런데 캐나다의 깡촌, 이 뉴펀들랜드에서도 진짜 깡촌인 이 섬 최북단 랑즈 오 메도즈L’Anse aux Meadows 해변이 그 옛날 콜럼버스보다 5백 년이나 앞서 대서양을 건너온 바이킹들이 거주하던 곳이라는 것. 1960년, 노르웨이 고고학자 부부가 그 유적을 처음 발굴했고 이후 캐나다연방공원관리국이 연구·조사를 하고 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바이킹들이 이름을 새겨놓지 않았을 뿐. 이 경이로운 해변! 대체 그들은 어떻게 대서양을 건넜을까? 내가 가서 본,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남쪽 해안의 뷔그되위Bygdøy 바이킹 박물관. 거기서 만난 범노선 바이킹의 롱십long ship은 크기로만 치면 참 별게 못 되었다. 길이 15~25m 정도, 폭 5m 안쪽. 이 정도의 배로 대서양을 건너? 물론 대권항로大圈航路로 보면 콜럼버스가 항해한 거리보다 절반 정도이긴 하다(지구본을 놓고 실로 재어보는 정도로도 금방 알 수 있다). 눈보라 속을 달려 드디어 북미를 처음 발견한 바이킹의 땅 랑즈오 메도즈를 밟았다. 아니? 북유럽 바이킹이 이런 척박한 땅에 정말이지 뭘 하러 왔나? 해변이고 어디고 아예 돌, 돌, 돌밭뿐이다. 작물은커녕 잡초도 자라기 힘들겠다. 그래서였을까? 사반세기 정도 거주하다가 슬며시 사라져버렸다. 후세 사람들 연구거리 만들어주려고 그랬는지 그나마 흔적들도 땅에 묻어놓고.

나는 그간의 여행 중 바이킹의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것에도 관심을 두어왔다. 그들의 건축양식을 러시아의 서쪽 내륙에서도 보았고, 동유럽과 발칸반도의 나라들에서도 보았다. 그런 바이킹들이 북미에 첫 발을 디딘 곳에 지금, 내가 와 있는 거다. ‘아, 저건 보나마나 바이킹 기념 조형물이겠구나.’ 멀리, 야산 봉우리에 세워져 있다. 거기서 바이킹들의 모습을 코르텐강 (COR-TEN steel)을 오려 실루엣으로 제작한 조형물을 만났다. 왜 하필이면 강철로? 음, 그건… 이 북미에 최초로 철기 문명을 가져온 족속이 바이킹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게 언제나 주마간산 격이지만 그런 틈에도 뉴펀들랜드 사람들의 여러 경우와 조우했다. 그 짧은 새에? 그렇다. 하도 황당한 곳에 왔으니까 그 희박한 주민들과 조우할 때마다 뭐라도 물어봤거든. 그런데 공통점 하나, ‘아니,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이럴 수 가 있을까?’ 이게 어디 친절 교육이니 인성 함양이니 하는 것으로 가능할까 말이지.

한 경우만 이야기해보자. 빙산 투어를 아쉽게 놓친 뒤, 바이킹 유적을 보러 다니다가 산등성에서 아주 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을 발견했겠다. 쌍안경으로 보아도 너무 멀었다. 최소한 거기 해변까지는 가서 봐야지…. 그래서 중간에 가로거치는 야산을 어떻게든 넘어 해변으로 가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 길을 찾다가 조그만 어촌에서 조우한 60대 후반 페인트공. 빙산을 볼 수 있는 해변으로 가는 길을 세밀히도 가르쳐주더니 나보고 “으떤 차로 갈 거요?” 하고 묻는다. “저기, 저거.” 내 차(승용차)를 가리켰더니 눈덮인 산길로 두 시간이나 걸리는데 에이, 그런 차로는 어림도 없단다. 그러더니 빈집 칠하던 일을 주섬주섬 대충 정리하데. 뭘 하나 했더니 자기 미니 트럭(GMC SIERRA)을 끌고 온다. “타쇼.” 북미에 살면서 서양인의 이런 친절 문화를 종종 경험했지만 이건 너무 다르다. 우리가 빙산을 꼭 보고 싶어 하니까 자기 차로, 처음 보는 우리 부부를 태우고 두 시간 걸릴 빙산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거 아닌가? 자기가 하던 작업도 접어두고. 차 안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 그는 앨런 험버Alan Humber라는 퇴직 교사. 이젠 학생들이 없어 학교도 문을 닫았단다. 참운전, 마냥도 간다. ‘덜컥, 덜커덩’ 온통 검은 석회석 돌밭인 해안을 끼고 돌더니 내가 넘으려던 야산으로 접어든다. 근데… 얼마 가기도 전에 눈 더미가 딱 길을 막아서네. 어디 뚫고 지나갈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 거다. ‘허….’ 빙산 보기는 또 물 건너갔다. 포기. 앨런은 어렵사리 차를 돌리더니 자기네 어촌, 선주민의 기념비적 집들, 부두의 헛간들, 바닷가재잡이 미끼며 도구들을 보여준다. 자기는 국가 공인 지역 관광 안내 일도 맡아한단다. 어찌나 세월아 네월아 계속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지 호의를 입고 있는 우리 쪽이 오히려 약간 초조할 지경이 됐다. 벌써 오후 2시, ‘이제부터 남쪽으로 또 450km를 가야 하는데….’ 그런데도 또 앨런은 우리보고 바닷가에 있는 자기 집에 가잔다. 그러고는 헛간에 꾸민 자기 공간을 보여주네. 거기, 은퇴한 마을 주민들과 한잔하며 대화하는 소박한 홈 바가 있었고 당구대가 있었다. 한쪽에는 재활용하려고 단정하게도 꾸려놓은, 그간 마신 빈 맥주 깡통 두 자루. 그이는 좀 덜 깨끗해 보이는 플라스틱 바스켓에 담긴 삶은 소라를 권한다. 그러고는 헤어질 때 한 자루 싸주기까지 했다. 이 섬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이런 식이었다.


바다 건너 고향, 바라보기라도 하려고
이 척박한 땅 뉴펀들랜드에서 먼저 와서 살다가 간 사람들의 흔적을 본다. 뉴펀들랜드섬이 포함된 캐나다 대서양 여러 주에서 보는 공동묘지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모두 바닷가에 묻힌 거다. 얼마 동안은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경험이 쌓이면서 답이 저절로 나오데. 특히 이번 여행에서 완전 결정적으로 나왔다. 그래, 한번 떠나온 후 다시는 못 돌아가는 고향이 그리웠던 것이다. 요새 비행기 타고 가는 이민과 달라 당시 이민은 한번 떠나면 거의 되돌아오지 못했다. 유럽에서 너무도 가난해서 빚 얻어 뱃삯 치르고 험한 바다, 목숨 걸고 온 터에 엄청난 뱃삯이며 대서양을 건너는 긴 항해 중에 폭풍과도 싸워야 했고,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툭하면 선내에 전염병이 돌아 항해 중에 죽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렇게 여기 와서 살다가 죽었고, 교회는 아예 묘지 터를 바닷가에 잡았다. 풍우에 닳은 한 묘비명을 읽어봤다. “In loving memory of Abel Beaufield, died April 23rd 1953, aged 79 years.” 아 참, 이번 여행은 황당하고 숙연했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저술가인 한호림은 1987년에 캐나다로 건너가 30년 넘게 살고 있다. 일찍이 펴낸 밀리언셀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를 시작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면 전 세계 어디든 직접 가서 카메라에 담고 조사하고 문헌을 찾아 연구한 후, 글을 쓰고 그림 그려 책으로 펴낸다. 요즘엔 ‘정말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이라는 주제로 이달로 꼭 7년째 연구·디자인·집필 중이다.



글과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한호림 | 담당 정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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