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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머무는 여행_ 부부의 도시 여행법 한 도시에서 여유롭게 머무는 여행법
<럭셔리> 편집장 김은령·더랩에이치 대표 김호 부부는 2~3년마다 한 번씩 바쁜 일정을 조정해 한 달가량 한 도시에 ‘머무는’ 여행을 한다. 업무와 관계에서 벗어나 둘만의 온전한 일상을 회복하는 부부의 여행. 여유롭고 즐거운 그들의 여행법을 소개한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휴양지 디나르Dinard. 해변을 따라 크고 작은 별장이 늘어서 있다.
왜 머무는 여행인가?
1백 살, 내년인 2019년 우리 두 사람의 나이를 합치면 이런 숫자가 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삶의 유통기한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이서 열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한 달 동안 2000km 이상 차를 운전해 돌아다니는 여행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매년 여행을 갈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맛있는 술과 음식을 실컷 먹고 잘 소화할 수 있는 나이는 언제까지일까? 아마도 60대 중반 정도가 아닐까 싶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먹고 마시고 걷고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은 날이 올 때 우리는 무엇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할까? 돈을 더 많이 모으지 못한 것보다는 더 많이 놀고 웃고 떠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놀이는 여행이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며 잘 놀기 위한 기회다. 물론 서울에서도 먹고 마시고 잠을 자지만, 여행 때만큼 즐겁지는 않다. 해야 할 일과 데드라인이 있고, 쉴 새 없이 전화와 문자가 울리며, 회의와 각종 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불안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맘대로 살 수 있는 시간, 알람이 필요 없는 매일을 선사해준다. 불완전한 일상을 온전하고 즐겁게 정상화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서유럽 4개국 일주’나 ‘8박 9일 미국 일주’처럼 숨 가쁜 관광은 우리에게 힘들다. 비행기 타고 가느라 하루, 돌아오느라 또 하루, 그사이 내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호텔에서 가방을 풀었다 쌌다 해야 한다면 서울에서보다 더 일찍 일어나 빡빡한 일정을 따라다니고 일행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 30분 단위로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면 그 여행은 휴식이 되기 어렵다. 그래도 유명 관광지는 가봐야 한다고? 평생 서울에 살아도 서울타워와 종묘, 국립박물관을 가보지 않을 수도 있다. 여행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원래 그 풍경에 포함된 사람인 듯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마구 흘려보내며 낯선 곳의 일부가 되는 경험. 한 도시에 자리를 잡고 오래 쉬는 ‘머무는 여행’은 여유롭고 자유롭다. 여행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실현해주는 방식인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막상 떠나려 하면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 엉뚱한 곳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식탁 옆에 작은 캔버스를 놓아두고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를 적어두었다. 모두 스물여덟 곳이다. 이 중에서 한 곳을 고른다. 한 번은 유럽이나 미국처럼 좀 멀리, 한 번은 비행시간 짧은 일본이나 아시아 작은 도시로 1년에 2주씩 두 번 해외여행을 간다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2013년 안식월을 맞아 스페인 남부와 포르투갈을 렌터카로 다니며 한 달간 여행했다. 그다음 안식월인 2015년에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에서, 올해는 런던에서 3주 가까이 보냈다. 연말이나 추석 등 연휴를 이용해 로마와 교토, 헬싱키 등에서 열흘 정도 지내는 여행도 했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은 두 가지다. “풍부하고 다양한 식문화가 있는 곳인가?” “보고 싶은 미술관이나 건축물이 있는가?” 먹고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니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 중 둘이 모두 가보았거나 한 사람만 가본 곳, 두 사람 다 안 가본 낯선 곳을 놓고 고르게 된다. 함께 가본 곳 중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는 빈과 리스본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가본 곳 중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은 워싱턴과 덴마크 오르후스가 있다. 따로따로 가봐서 언젠가 다시 함께 갈 도시에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있다. 아직 둘 다 못 가봤기에 꼭 가고 싶은 곳은 볼로냐와 뉴올리언스. 일본은 지역색도 다양하고 거리도 멀지 않아 47개 현을 모두 가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교토 같은 곳은 열 번 가까이 가보았지만 앞으로도 다시 가고 싶은 도시다.

가서 무얼 할까?
여행지에서는 최대한 게으른 일상을 보낸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느지막이 일어나 작은 카페에서 빵 한 조각 곁들여 차 한잔 마시며 오늘은 무얼 할지 상의한다. 걸어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는 버스나 택시 대신 걸어 다닌다. 매일 2만 보 정도는 기본, 많이 걷는 날은 3만 보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이렇게 몸으로 길과 건물을 익히면 그 도시와 빨리 친해질 수 있다. 서울에서는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데 그 죄책감도 잠시 덜어낼 수 있다. 미술관이나 서점 등 공통 관심사는 함께하지만, 각자 좋아하는 그릇 가게와 목공 도구점 등은 시간을 정해놓고 따로 돌아본 후 만난다.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집중되는 스케줄은 여행을 서운함과 불만으로 채울 수 있으니까. 우리가 일정에서 가장 공들이는 것은 “오늘 어디 가서 무얼 먹을까?”, 즉 식당 선택이다. 비싸고 맛있는 레스토랑이야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많다. 가격 적당하고 맛있고 분위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호텔 콘시어지의 추천을 받는다. 여기저기 돌아보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 저녁을 먹고 바에 들러 술 한잔 마신 후 돌아와서는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둘이 함께 운영하는 라이프스타일 블로그(her-report.com, facebook.com/herreport)에 감상을 정리한다. 5년 넘게 운영한 이 채널은 우리 두 사람에게 ‘먹고 마시며 배운 것들’(HER 리포트의 슬로건!)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특별한 기록이 되었다. 런던에서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를 관람하거나 로마에서 열리는 음악회처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일정을 미리 짜지 않는다. 계획을 하고 시간과 진행을 확인하는 일은 서울에서 싫도록 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여행은 운이 크게 작용한다. 몇백km를 달려갔는데 보고 싶던 건축물이 보수 중이어서 커다란 가림막만 보고 온 경우도 있고, 한참 전 예매한 비싼 공연이 가수 사정으로 취소되기도 하며, 친절을 가장한 사기꾼에게 속기도 했다. 한편, 지도에 가볼 만한 음식점을 일일이 표시해준 셰프를 만나거나, 마침 여행 기간 동안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가 열려 멋진 장면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불운과 행운은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별 상관이 없다. 낯선 곳이니 조금 더 분별력 있고 현명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초상화 21만 점을 소장한 런던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군수 공장에서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된 베이징 798 예술지구.

영국 전원 풍경의 멋을 그대로 살린 호텔 '더-피그'의 정원.

커다란 바위를 파내 그 안에 교회를 세운 헬싱키 록 처치.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
평소엔 어떻게 준비할까?
해외여행을 떠날 때에는 주말이나 연휴 포함해 10일에서 2주 정도를 목표로 삼는다. 여행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비용이다. 여행을 위한 통장을 따로 만들어 평상시에 돈을 모은다. 좋은 집이나 멋진 자동차, 자녀 교육 등 관심과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우선순위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늦게 결혼했고 아이도 없으니 우리 두 사람이 하고 싶은 일에 집 중하기 쉬운 상황이지만 비용은 역시 부담이 된다.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항공인데 시간 여유가 있다면 직항보다 경유편을 이용한다. 헬싱키를 경유해야 하는 핀에어나 홍콩을 경유하는 캐세이퍼시픽 등 외국 항공사를 이용하면 가격도 싸고 스톱오버 stop over 서비스를 통해 여행지를 추가할 수도 있다. 호텔은 일반적으로 booking.com이나 hotels.com 같은 예약 사이트를, 특색있는 부티크 호텔을 찾을 때에는 tablethotels.com을 이용한다. 물가 비싼 유럽이나 일본은 1박에 20만 원 정도를 기준으로 깨끗하고 교통 편리하며 안전하고 구경거리 많은 지역의 호텔을 선택한다. 한 도시에 길게 있을 경우 4박 정도를 기준으로 숙소를 두어 번 옮기며 머무는 지역을 바꿔본다. 한 달 동안 호텔에 머무는 것과 에어비앤비를 사용하는 비용은 차이가 제법 난다. 다양한 숙박 공유 서비스 덕에 긴 여행, 그곳의 생활에 스며들기가 쉬워졌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일본 여행길, 바에서 맥주를 마시다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부부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호주 출신 파일럿이라 10년 넘게 홍콩에서 살았다는 부부였다. “50대가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선배인 당신들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과묵한 남편보다 활달한 부인이 먼저 답하며 자신들은 60대라면서 40대면 아직 젊다고 눈을 찡긋했다. 60대를 넘어가면 어쩔 수 없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남편이 은퇴하면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 근처 호수에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란다. 곧 여행도 시시해지는 때가 올 터이니 40~50대에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여행이 시시해지는 시기가 온다는 말을 들으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했다. 사람들은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은퇴해서 여행 많이 다니자’고 생각하지만 나중이 되면 건강할지, 시간이 있을지, 돈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이 들어 여행이 힘들어지면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 도시에서 1년쯤 살아보거나 여러 도시에 머물며 여행한 것을 바탕 삼아 둘이서 책을 쓰면 어떨까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언젠가 아내가 회사에서 영화감독 장진 씨의 강연을 듣고 와서 장감독의 가훈을 전해준 적이 있다. 그 집의 가훈은 “방법이 없다”란다. 처음엔 빵 터졌지만, 곱씹어보니 그 안에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는 데 뭐 대단한 방법이 있겠는가, 부딪쳐보는 수밖에. 그날 우리 두 사람의 가훈은 무엇이 될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결론은 “함께, 잘 먹는 게 남는 거다”였다. 우리 두 사람의 인생 목표는 단순하다. 함께 밥 먹는 횟수와 함께 지내는 즐거운 시간을 늘리는 것. 이러한 목표 달성을 극대화해주는 것이 여행이다. 오늘도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아쉬워하고, 이번 연말에는 어디를 갈지 하루에도 몇 번씩 정했다 바꿨다 반복한다. 우리 두 사람의 나이를 합치면 1백50살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크게 성공한 사람’ 이 아니라 세상 곳곳의 낯선 도시에 머물며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신 기억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 되었다면, 충분히 만족스럽게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무는 여행, 이렇게!
1 휴대전화에는 로밍 메시지를 넣고 이메일에는 자동 응답 기능을 넣어 주위 사람에게 휴가 중임을 알린다. 사소하고 불필요한 방해만 받지 않아도 훨씬 더 쾌적한 여행이 된다.
2 여행 기간 동안 잠 잘 때는 아예 전화기를 꺼놓는다. 수신자의 상황을 봐주지 않는 070 서비스와 메신저 서비스의 공격만 잘 막아도 한밤중 깼다 다시 잠들지 못해 고생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3 마지막 장면이 전체의 인상을 좌우한다. ‘Peak-end Effect’라고 부르는데, 여행도 마찬가지. 끝이 좋으면 다 좋게 느껴지니 멋진 레스토랑에서 디너, 근사한 공연 등 인상적 일정은 뒤쪽에 배치한다.
4 호텔 콘시어지에 “이 도시(호텔)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사소하지만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떻게 질문하는가에 따라 얻는 답도 다르다. “추천해줄 만한 레스토랑이 어디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관광객이 자주 가는 곳을 알려주겠지만 “가족이나 친구 생일에 자주 가는 레스토랑이 어디인가?”로 질문을 바꾸면 현지인이 찾는 명소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5 불평할 일이 생기면 목소리 높여 화부터 낼 것이 아니라, 먼저 ‘의미 있는’ 증거를 모은다. 호텔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선 호텔 웹사이트에서 고객 헌장을 찾아 관련 문구를 확인하고 이 내용을 인용해 제기한다면 불평과 불만이 훨씬 무게 있게 들릴 것이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물론 매니저를 찾아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다.
6 짐 꾸리기에 꼭 필요한 것은 여권과 약간의 현금, 신용카드, 휴대폰(충전기와 보조 배터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없어도 엄청나게 불편하지 않고 급하면 현지에서 구할 수도 있다. 여행 가방이 가벼우면 발길도 가벼워진다.



<럭셔리> 편집장 겸 디자인하우스 편집주간 김은령은 <행복이가득한집> 편집장을 지냈으며, 지은 책으로 <바보들은 항상 여자 탓만 한다> <비즈니스 라이팅> <럭셔리 이즈> 등이 있고, <침묵의 봄>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존 로빈스의 인생 혁명> 등 2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리더십/조직커뮤니케이션 코칭 회사 더랩에이치 대표인 김호는 ‘우드크래프트 에이치’라는 목공 작업실도 운영한다. 세계 최대 PR 컨설팅사인 에델만의 한국법인 대표를 지냈으며, <나는 이제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 <쿨하게 생존하라> 등의 책을 냈고, SBS 라디오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에서 책을 소개하며, 동아일보 ‘직장인을 위한 김호의 생존 전략’ 칼럼을 쓰고 있다. 부부는 ‘먹고 마시며 배운 것들’을 주제로 두 사람 이름의 이니셜을 딴 라이프스타일 블로그 ‘HER 리포트(her-report.com)’를 운영한다.

글과 사진 김은령·김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