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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故 황창배 한국화에 불어넣은 청신한 숨결
소정素丁 황창배는 서양화 재료와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한 실험적이고 분방한 작품으로 전통에 갇혀 사그라지던 한국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2001년 세상을 떠난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 전시 <황창배, 유쾌한 창작의 장막>이 열린 소마미술관에서 작가의 아내 이재온 스페이스 창배 관장을 만났다.

사진 속 황창배 작가는 여전히 젊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조금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갑자기 떠난 뒤 작품 관리가 어려웠지…." 이재온 스페이스 창배 관장은 자기 작업엔 철저했지만, 가족과 남들에게는 늘 다감하고 너그러웠던 황창배 작가의 생전 모습을 추억했다.
소정 황창배 작가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월전 장우성에게 동양화를, 철농 이기우에게 전각과 서예를 사사하고, 1978년 한국화 최초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경희대와 이화여대, 동덕여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동산방 화랑, 밀라노 카를로 그로쎄티 화랑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1년 담도암으로 작고한 그는 한국화의 경계를 확장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무제’, 화선지에 수묵 채색, 121.5×139cm, 1985
“집사람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언제든지 그만두세요. 어떻게든 못 꾸려나가겠어요?’”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3월 9일부터 5월 20일까지 열린 작가 재조명 전시 <황창배, 유쾌한 창작의 장막>은 지난 2001년 작고한 한국 화가 故 황창배의 작품 1백41점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다. 작가의 생애와 주요 사건에 따라 여섯 개로 나눈 전시 공간 한쪽 벽에 앞서 인용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짧게 자른 흰머리가 경쾌한 황창배 작가의 부인 이재온씨는 작가를 기리는 공간 ‘스페이스 창배’의 관장으로 동료와 후배 미술 관계자들이 모여 발족한 황창배 기념사업회와 함께 유작을 관리한다. “제가 먼저 그만두라고 했어요. 학교생활을 무척 힘들어했거든요. 어떻게 사냐고 묻기에 어떻게해서든 먹고살 수 있다고 큰소리쳤죠.(웃음)” 든든한 아내의 지원으로 황창배 작가는 신분과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 대학교수 직책을 미련 없이 그만두고 충북 괴산 작업실에서 그림에 몰두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1990년대 화단에 ‘황창배 신드롬’을 일으켰다.

‘무제’, 장지에 혼합 재료, 265×150cm, 2000

한국화의 경계를 확장하다
화가 황창배(1947~2001). 서울 토박이로 경복고와 서울대 회화과,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서른 살이던 1977년 국전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받았고, 이듬해 한국화가로서 는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 작가로 올라섰다. 30대 중반에 일찌감치 교수로 부임해 경희대와 동덕여대, 이화여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명강의로 이름을 날렸고, 1987년엔 선미술상 수상과 그에 따른 개인전으로 일약 한국화를 대표하는 스타작가가 되었다. 1990년엔 도쿄아트페어에서 토털미술상을 받으 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그린 듯한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밟아온 이력과 달리 황창배의 작품 세계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한국화 전통에서 벗어나 아크릴과 유화물감, 연탄재, 흑연 가루까지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고, 물감을 뿌리거나 나이프로 긁고 종이를 오려 붙이는 등 기법도 자유자재였다. “밀가루로는 빵만 만드는 게 아니라 국수나 수제비도 만든다”고 말하던 그의 자유분방한 작품은 정체되고 변방으로 밀리던 한국화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황창배는 전통에 대한 기초가 누구보다 탄탄한 작가였다. 대학 시절 월전 장우성에게 동양화를 배웠고, 졸업 후 철농 이기우에게 서예와 전각을 사사했다. 아내 이재온 관장이 철농 선생의 고명딸이다. “큰오빠가 황창배 선생과 경복고 동문이었어요. 미술반 생활도 함께 했지요. 그 인연으로 아버지 화실에서 배우게 되었어요. 둘째 오빠가 중학교 때 한강에 빠져 죽었는데, 황 선생과 경복중 동기 동창이었지요. 어머니는 황 선생만 보면 오빠 생각이 났나 봐요. 그래서 사윗감으로 점찍어두신 거죠. 저녁에 화실 문을 닫은 후에도 황 선생만 남아 계속 그림을 그리게 했어요. 결혼 후에 이야기하시더군요. 저와 만나게 하려는 작전이었다고요.” 그는 황창배 작가와의 결혼 생활이 조금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서예가였기 때문에 뒷바라지하던 어머니가 제겐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어요. 화가는 당연히 가난하리라 여겼는데 월급도 제법 괜찮게 받아왔고요.(웃음) 매사에 열심이었으니 잔소리할 일도 없었지요.” 1975년 결혼 후 황창배 작가는 승승장구한다. 그해 국전에서 처음 특선으로 입상했고, 연이어 특선에 오른 끝에 1978년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이재온 관장은 당시 국전 출품작 작업을 위해 마 소재의 두꺼운 천을 동대문시장에서 사서 양잿물에 푹 삶아주던 일을 기억한다. “살면서 이사를 네 번쯤 했는데, 그 날 아침 출근하는 남편에게 새 주소를 알려주면 거기로 퇴근할 정도였어요. 학교와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죠. 다 제가 챙겼어요. 그저 예술가 아내는 그런 걸로 알았지요. 우리 어머니가 그리 사셨으니까. 사람들이 저에게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내조학을 전공했나 봐요’ 하며 웃었죠.” 세상살이엔 어두웠지만 늘 사람 좋고 다감한 남편이었다.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충북 괴산 산속 작업실에서 작업하던 시절, 가끔 서울에 올라오면 그는 아내에게 스파게티를 대접하곤 했다. 작업실 마당에 텃밭을 가꾸어 배추, 토마토, 감자 등 별별 작물을 다 키웠다. 스스로 택한 고립의 막막한 외로움을 자연을 가꾸며 달랬으리라. “직접 키운 채소를 집에 가져오곤 했는데, 그땐 그게 참 싫었어요. 그림 그리라고 했지 누가 농사지으랬나? 벌레가 나오면 몰래 버리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지요.”

소마미술관 전시 공간에 작가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그림을 그린 충북 괴산 작업실을 재현했다.

자신의 발을 그린 일종의 자화상 드로잉. '무제', 종이에 연필, 25×18cm, 1986.

애주가로서 자신의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메모.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는지 알겠어요”
담도암이라는 뜻밖의 병을 발견한 건 이탈리아 밀라노 등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개최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50대 초반의 일이었다. 남에게는 늘 너그럽게 웃으며 “대충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자신의 작업엔 더없이 철저하고 엄격했으며, 오랜 작가 생활을 위해 운동과 건강관리에 누구보다 열심이던 그였다. “저는 당시에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남편 간호에 집중했어요. 그 1년 7개월 동안의 시간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그렇게 긴 시간 함께 보낸 적이 없거든요. 나중에는 체중이 심하게 빠져서 일어서는 것조차 못하던 때에도 그이가 죽는다는 걸 상상조차 못 했어요. 황 선생 역시 제 앞에선 힘든 티를 낸 적이 없고요.” 이대목동병원에서 치른 장례식은 몰려드는 문상객으로 병원 내 장례식장을 다 빌리고도 모자라 건물 밖에 천막까지 쳐야 했다. 출신 학교에 따른 파벌도, 동양화가와 서양화가 사이의 구분도 없었다. “아이들은 생전 늘 바쁘던 아빠를 서운해했어요. 장례식장에 모여 황선생을 추억하는 많은 사람의 모습에서 아빠가 우리와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한 동료 교수는 큰아이에게 ‘이제부터 여기있는 우리가 전부 네 아비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겠어요’라더군요.” 남편이 작고한 이후, 이재온 씨는 병상의 남편을 돌보며 익힌 대체 요법을 전파하고 봉사 활동을 하며 황창배 작가의 유작을 관리해왔다. 2003년 동덕여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이후로는 전시를 하지 않다가 주변의 권유로 금보성 아트센터에서 회고전 <‘우리다움’을 고집 하던 황창배를 기억하다>를 개최한 것이 2015년의 일. 이듬해 15주기를 맞아 동덕여대와 이화여대 미술관에서 각각 특별전이 열렸고, 2017년엔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재평가해야 할 한국화가 1위로 선정되었다. 소마미술관에서는 작가 개인의 성취를 재조명하는 전시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되었다. 2015년 회고전을 준비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황창배 기념사업회 를 발족했고, 이재온 씨를 관장으로 가족이 살던 마포 집터에 건물을 지어 고인을 기리는 공간 ‘스페이스 창배’를 마련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 돈 없거든요. 생전에 황 선생이 그랬어요. ‘화가로 산다는 건 도박이다.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다’라고요 어려운 작가들 전시 열어주고 싶어요. 작가 선정은 운영위원회에 맡기면 되지요. 스페이스 창배가 그림을 좋아하고 황창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진 속 여전히 젊은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재온 관장의 맑은 얼굴에 결혼 전 작가가 ‘간호학생’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초상화 속 둥글고 단아한 이목구비가 그대로 겹쳐 보였다.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