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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핸드메이드 작가 조인숙 머무는 여행으로 축적한 가족의 대화


일곱 살 딸아이와 런던에서 보낸 긴 여름은 11년 후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조인숙 작가는 그저 마음가는 대로, 어릴 때부터 상상한 대로, 대학 때 배낭여행으로 가본 대로 큰딸 민소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여름, 아이를 데리고 석 달간 런던에 머무는 여행을 떠났다. “사 남매 중 셋째예요. 부모님은 두 분 다 학교 선생님이라 바쁘셔서 방학이면 저희와 집에 있는 걸 좋아하셨지요.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여행 가는 아이들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를 낳으면 충분한 사랑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런던에서는 궁금해한 곳에 직접 가보는 것만으로도 석달이 흘렀다. 반년쯤은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당시 영국 물가가 너무 비싸 아쉽게 돌아와야 할 정도로 모녀의 런던 생활은 자유롭고 편안했다. “당시에는 정보가 부족해 며칠 묵을 유스호스텔만 달랑 예약한 채 민소와 런던에 갔지요. 아이나 저나 모두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미술관이나 공원에 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며칠 만에 괜찮은 집도 구할 수 있었죠. 일곱 살 민소는 런던 생활에 참 잘 적응했어요.” 훗날 늦둥이 동생 민유가 태어나자 소외감을 느끼던 큰딸을 위해 조인숙 작가는 민소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여름방학 때 동생 민유를 외할머니에게 맡기는 큰 결심을 하고 민소와 함께 다시 런던으로 갔다. 그런데 아이는 첫 여행보다 오히려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여행은 여행으로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어를 안 써도 된다고 하니 한결 편안해하던 아이. “그때 런던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 제 교육관이 바뀌었죠. 아이가 표현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제 나름대로 그곳의 풍경과 시간을 흡수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요.” 이후 동생 민유와 아빠까지 의기투합해 해마다 가족 여행을 계속했다. 민유가 일곱 살 되던 해 여름은 세 모녀가 파리에 가서 긴 여름을 보냈다.

여러 번의 여행으로 노하우가 생긴 엄마는 딸들의 취향에 맞추어 아예 뤽상부르 공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집을 얻었다.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딸들과 스케치북을 들고 공원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며 웃음도 대화도 햇살도 행복도 멈추지 않는 시간을 누렸다. 같은 풍경을 셋이 같이 그리는데도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이런 여행의 시간이 아이들 내면에 무엇으로 남고 자랄지 엄마는 미처 다 알지 못한다. 책을 쓰느라 아이의 허락을 받고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훌쩍 커버린 아이의 일기장에는 여행의 순간이 눈부시게 남아 있었다. 여행지에서 엄마 옷차림을 디스(?)하고, 맛본 음식이 형편없다고 불평하는 문장조차 가족이 함께한 시간의 추억임을 아이가 스스로 기록해놓은 일기장.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이 있었으니 아이들의 말수가 줄어드는 세월의 통과의례를 지나면서도 조인숙 작가의 가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일이나 가사에서 손을 떼니 제 자신도 힐링이 됩니다. 여행을 가면 근본적인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고, 평상시 걱정하던 것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죠. 예를 들면 아이들의 현재 성적 같은 것 말이에요.” 부모는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매달 여행 적금을 부으면서 한 걸음 뒤에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결정을 기다린다. 큰아이가 고3 수험생의 짐을 벗는 내년에는 오랜만에 긴 여행을 가리라. 조인숙 작가는 긴 유럽 여행으로 아이가 얼마나 더 영어를 잘하게 되었는가, 얼마나 더 많은 나라를 알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가 찾아와도 일평생 가족 대화의 총합이 줄어들지않게 해주는 여행, 저마다 독립된 자아를 지닌 개별 존재이지만 함께 있으면 더 즐거운 구성원이 가족이라는 느낌.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런던에서 보낸 여름방학, 파리에서 보낸 여름방학은 긴 인생에서 더없이 값질 것이기 때문이다.

파리 라탱 지구를 산책하는 민소와 민유. 매일 아침 아이들은 호텔 근처를 산책하고 뤽상부르 공원에서 그림 그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머무는 여행가 조인숙 작가가 알려주는 자녀와의 여행 준비
1 일기장과 그림 도구를 챙기자 아이는 여행의 순간을 쓰고 그리며 그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렷한 관점으로 여행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이 가족 간의 대화로 이어지고, 아이의 근본적 관심과 성향을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2 먼저 손으로 그리게 하자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첫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아이들이 최대한 손으로 많이 그리도록 헸다. 디자인을 전공하며 테크닉부터 익히면 상상력의 한계가 생기는 경험을 했다. 무엇이든 어떻게, 왜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하면 아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글 김민정 | 사진 이창화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