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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광수 나무를 바라보는 일
나무 한 그루를 사진에 담기 위해 한 해를 꼬박 기다리는 사진작가 김광수. 세심히 관찰하며 오랜 시간 인내하고 공들여 보살피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에 나무는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화답한다.

1957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사진작가 김광수는 신구대학교 사진과 재학 중인 1979년 첫 개인전 <벽>을 유네스코 화랑에서 개최한 이후 금호미술관, 박영덕화랑, 목인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마미술관, 영월사진박물관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4월 아트파크 갤러리에서 2007년부터 작업한 나무 사진을 망라한 개인전 <판타스틱 리얼리티>를 마친 후 밤하늘의 별을 찍으러 몽골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다.

지난 4월 삼청동 아트파크 갤러리에서 사진작가 김광수의 나무 작업을 망라한 개인전 <판타스틱 리얼리티>가 열렸다. 11년간 나무를 찍어왔지만, 전시한 작품은 열 점뿐. 1년 중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다려 촬영하는 작업 방식 때문이다. 

‘사과나무’, 피그먼트 프린트, 131×200cm, 2013
“야, 너 체력도 좋다!” 지난가을부터 점찍어두었다는 진달래나무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진작가 김광수의 가벼운 발걸음에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해 이제 백발이 성성한 동료 작가가 새삼 감탄한다. 성급히 만개한 진홍색 꽃이 봄비에 떨어졌을까 밤잠을 못 이루었다는 그는 진달래가 건재하다는 소식을 듣고 촬영 전날 부랴부랴 스태프를 구성했다. 그렇게 모인 일곱 명의 사진작가. 후배라지만 다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다. 사진 한 장 찍는 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한 이유는 작가의 독특한 작업 방식 때문이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40여 분,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인 진달래나무 앞에 당도했다. 잠시 땀을 식히는 스태프 사이에서 김광수 작가는 홀로 분주하다. 나무 상태를 확인한 후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 가방 가득 모래를 채워 온다. 촬영 각도를 확인하고, 장비를 설치하기에 앞서 빗자루로 나무가 자리한 바닥을 가지런히 고른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 나서는 후배의 도움도 마다하고 한참 비질을 하던 그는 준비해 온 고운 모래를 조심스럽게 깔기 시작한다. “땅을 고르고 모래를 깔 때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스태프가 여럿 있어도 이 일은 꼭 제가 직접 하지요. 촬영할 나무를 정성스럽게 돌본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제 배경에 흰 천을 칠 차례. 나무 아래로 경사가 가팔랐지만 초로의 사진가들은 주변의 나무 등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해 능숙하게 배경 천을 설치한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사전 작업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나무앞에 4×5 판형 필름 카메라를 세운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해가 구름을 벗어나 적절한 빛이 오기를, 꽃과 가지를 기분 좋게 흔들어줄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 때 작가는 셔터를 누른다.

‘감나무’, C-프린트, 229×160cm, 2015
태초의 선악과
김광수 작가는 이렇게 진달래와 홍매화, 사과나무, 감나무의 붉은 꽃과 열매를 사진에 담는다. 오래 지켜보면서 나무가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기다려 정성스럽게 준비한 후 담아낸 사진. 과정이 다르니 결과물도 다르다. 흰 천과 고운 모래를 배경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지극히 익숙한 모습이지만, 현실에서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전한다. 그래서 김광수 작가의 나무 작업을 모은 6년 만의 개인전 제목도 <판타스틱 리얼리티>다. “예전부터 사과를 좋아했습니다. 유리와 대리석으로 만든 사과 모양 오브제를 수집해 사진으로 담다가 실제 사과를 찍기 시작했죠. 좀 더 싱그러운 사과를 구하고 싶어 직접 열매를 따 오기도 하면서 점점 사과나무에 눈길이 가더군요. 사과나무 고목에 가지가 부러질 듯 달린 열매가 왠지 슬프게도, 또 아름답게도 보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브를 유혹한 선악과가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는 흑백으로 촬영한 구름 사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 잡지의 사진기자로, 광고 스튜디오 포토그래퍼로 일하던 20년 가까이 틈틈이 구름을 찍다가 몽골 사막에서 하늘과 평행한 지평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더 광활한 지평선을 찾아 동아프리카의 투르카나Turkana 사막 호수로 향했다. ‘태초의 선악과’라는 아이디어가 최초의 인류 화석이 발견된 투르카나 사막지대의 고운 모래를 떠올리게 했다. 김광수 작가가 나무 아래의 땅을 고르고, 모래를 까는 건 또 다른 지평선을 만드는 일이다. 깊이의 구분을 없애는 흰 배경을 통해 무한한 시공에 홀로 선 나무를 표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찍는 이유는 순간으로 흐르는 시간을 압축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그의 나무 사진은 40년 이상 카메라를 들고 살아온 작가의 삶을 총망라하는 작업이다. “겪어온 시간이 형태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무를 찾습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람 골에 자라는 나무는 가지 형태가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 것과 전혀 다릅니다. 구부러진 형태에서 느껴지는 세월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지요. 그런 나무를 찾으면 주인과 계약을 하고 1년을 지켜봅니다. 가장 아름다운 때를 찾기 위해 보고, 또 보지요.” 그런 나무를 그는 ‘내 나무’라고 부른다.

진달래나무가 자리한 바닥을 고르고 모래를 까는 김광수 작가.

검은 가지와 진홍색 꽃이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나뭇가지에 분무기로 물을 뿌린다.

촬영 준비를 마치고 후배 사진가들과 촬영 각도에 대해 상의하는 중.

5월호 표지 작품 ‘홍매화’를 촬영하기 전, 김광수 작가가 그린 스케치. 촬영 당일 외에는 카메라 대신 노트와 만년필을 들고 천천히 세심하게 나무를 바라보며 반복해 스케치한다.

카메라 없는 사진작가
김광수 작가에겐 카메라도, 스튜디오도 없다. 아코디온처럼 접혔다 펼치는 4×5 판형 필름 카메라는 후배에게 빌리고, ‘내 나무’가 있는 곳이 그의 작업장이다. 나무를 정하면 그곳에 카메라 대신 노트와 만년필을 가져가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무를 제대로 보기 위한 작업인 것.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의 마음속엔 다른 나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날은 1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 그렇게 공들여 촬영하고도 발표하지 않는 사진이 더 많아 2007년 처음으로 사과나무를 촬영한 이래 11년이 흘렀지만, 삼청동 아트파크 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작품은 열 점에 불과하다. 그중 한 점인 5월호 표지 작품 ‘홍매화’는 구례 화엄사 마당에 있던 매화나무를 찍은 것. 무작정 절을 찾아가 하루를 꼬박 기다려 주지 스님을 설득했고, 키 큰 나무에 배경을 치기 위해 비계를 설치하고 트럭 세 대 분량의 모래를 깐 후 그날 딱 세 번 불어준 바람 중 하나를 포착해 사진으로 담았다.

나무를 찾으러, 보살피러 매일 산을 오른다는 작가의 몸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탄탄해 보였다. 바람 골 진달래 촬영을 마친 그는 사과꽃이 필 무렵 사과나무를 보러 청주에 내려갈 계획이다. 내년 봄엔 연초록 잎이 아름다운 능수버들을 찍고 싶다고. 앞다투어 피어 짧게 만개한 후 한순간 꽃비로 내리는 풍경에도 봄이 허망하거나 쓸쓸하지 않은 건 내년에도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희망때문일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 김광수 작가의 나무 역시 그러하다. 그는 나무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지만, 사진은 탐미적 느낌보다는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내 나무’라 부르며 나무와 깊이 관계를 맺고 보살피며 거듭 새롭게 바라본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 덕분이리라. 어느 시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우니까.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