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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로터리 회장 선출된 이동건 씨의 경주 나들이 봉사하는 사람이 제일 귀한 사람
지난 12월 초 반가운 뉴스가 들려왔다. (주)부방테크론 이동건 회장이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대 민간 자원봉사 단체인 국제로타리의 차차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 전 세계 2백3개국에서 1백21만여 명이 활동하는 거대 조직의 수장이 된 것이다. 2008년 7월부터 2년 동안 국제로타리 회장으로 활동하게 될 이동건 회장이 고향을 찾았다. 경주시의 양반 마을인 양동마을. 이곳은 그가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준 정신의 젖줄기이다.


자연의 정신을 가르쳐준 양동마을
경주 시내에서 양동마을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양동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곧 세계무대를 누비게 될 ‘어른’의 목소리가 다소 상기된다. “저기가 기차역이 있던 자리인데, 저기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어요(그는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기차 타고 부산으로 갈 때마다 많이 울었어요. 저기 보이는 일본식 건물은 양동초등학교인데, 경주에서 제일 오래된 학교지요.” 그의 모교인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초등학생이었던 그가 물지게를 지고 오르던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니 막다른 곳에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그에게 양동마을은 할머니의 품 같은 곳. 호롱불과 함께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당시 공부 때문에 전깃불이 들어오던 안강면의 강서공민학교(현 안강제일초등학교)로 유학 갔던 3년간을 제외하면 그의 어린 시절이 오롯하게 담긴 곳이다. 한국로타리 366지구 총재를 역임했던 선친 이원갑 씨가 아들의 호를 ‘양촌良村’이라고 지어준 것은 아들에게 양동마을 출신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양동마을을 떠난 뒤에도 주말마다 이곳에 왔었지요. 일 년에 서너 달은 이곳에서 살았어요. 그것은 제 아버지께서 할머니께 하는 효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희 할머니가 젊으실 때 혼자 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늘 맏손자인 저를 할머니 곁에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저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사자 같은 역할을 했어요. 무엇보다 여기서 잔뼈가 굵었다고 할 수 있지요. 아마 저의 끈기는 양동마을에서 배운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는 정신과 시골 사람들의 검소함과 근면함을 배웠지요. 저는 이 마을을 사랑해요.”

경주 시내에서 포항 방면으로 30~40분 거리에 있는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흔적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가 집성촌을 이룬 마을로, 1984년 민속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한옥과 초가 1백50여 가구가 남아 있으며 두 성씨의 후손들이 이 가옥에서 생활하고 있다. 양동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전기. 세종 때 입과한 문신 손소가 처가妻家가 있던 양동마을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동건 회장의 시조는 이번. 그는 손소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와 역시 이곳에 정착했는데, 이번의 아들이 퇴계 이황의 스승인 회재 이언적이다. 이때부터 손씨와 이씨는 함께 부락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백 년 이상 서로 실력을 겨루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공존해오고 있다. 그의 시조인 이언적이 살았던 ㅁ자형 한옥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동건 회장의 집 바로 옆집이다.

자상한 할머니와 엄격한 아버지 이동건 회장이 한국로타리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선친 이원갑 총재의 영향 덕분이다. 이원갑 총재는 부산 춘애병원을 설립한 고 김영소 박사의 제안으로 로타리 활동을 시작해 1985년 366지구 총재를 역임했다. “아버지가 저에게 로타리 활동을 권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저 스스로 아버지가 활동을 하시니까 ‘로타리가 상당히 좋은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왜,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막상 제가 로타리 활동을 하려고 할 때에는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왕 들어왔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 날라리가 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요.”

이원갑 총재는 굉장히 엄하면서도 온화한 아버지였다. 거짓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싸우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던 분이었다. 어린 그가 밖에서 놀다가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오면 선친은 매를 들었다. “때리고 돌아오면 때렸다고 맞고, 맞고 돌아오면 맞고 돌아왔다고 맞았지요.” 고려대학교를 세운 인촌 김성수 선생의 제자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선친은 감투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주 성실하고 진실한 분이었던 선친은 결단력과 추진력이 강한 분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뭐랄까, 아버지께서 하는 일이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으니까요.”
그러나 할머니는 자상했다. 서른세 살에 혼자가 되어 4남매를 키운 그의 할머니는 맏손자인 그를 둘째 아들 같은 존재로 여겼단다. 할머니는 항상 그 ‘둘째 아들’에게 “네가 최고야!”라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선친께서 366지구 총재가 되었을 때 그의 할머니는 “애비가 총재가 되었으니 나중에 동건이도 하게 되겠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 그러자 옆에 있던 선친께서 “나는 지방의 총재지만 네가 있는 서울은 엘리트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거기서 네가 총재로 나갔다가 떨어지면 상처만 입으니까, 총재 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거라” 하셨다.

평소 선친의 말씀을 잘 따랐던 그는 그 말씀을 듣고는 총재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열심히 하다 보니 여러 기회가 찾아왔고, 결국 국제로타리 회장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가 회장으로 선출된 경사는 자신감을 북돋워준 할머니의 ‘칭찬’ 교육과 보리 밟듯이 한 번씩 밟아준 아버지의 ‘훈계’ 교육이 빚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에게 시골의 정서를 좀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시골에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자주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 이틀 머물다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친척 집에서 장기간 머물 수 있는 기회를 부모님들이 꼭 마련해주면 좋겠어요. 시골이 비위생적이라고 하지만 근면함을 알게 해줍니다. 제가 어릴 때는 말이죠, 손님이 오시면 밥을 정성스레 대접하고, 돌아가실 때에는 차비를 쥐여드렸거든요. 그 정겨움이 착한 인성의 원천이 되는 것이지요.”

한국인 최초의 국제로타리 회장, 이동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민간 봉사 단체인 국제로타리는 1905년 미국인 변호사 폴 해리스가 만들었다. 2월 23일, 시카고의 황폐한 상황을 염려한 폴 해리스가 세 친구와 함께 첫 회동을 시작한 것이 그 뿌리. 네 사람이 각각 돌아가면서 자신의 사무실에서 모임을 주최했다 해서 이름도 ‘로타리’로 붙여졌다. 전 세계 2백3개국, 3만2천6백4개 클럽에서 1백21만 명이 활동하고 있는 로타리인들은 생활 속에서 ‘초아의 봉사’ 정신을 실천해가고 있다. 더불어 언행을 하기 전에는 네 가지 표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실한가? 모두에게 공평한가?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는가? 모두에게 유익한가?’를 살펴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로타리 역사는 1927년 창립된 경성로타리클럽이 시초.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다가 종전 후 다시 시작되었다. 현재 17개 지구에 회원 5만9백여 명이 가입해 있다. 회원 수로는 전 세계 4위, 로타리 재단의 기여 정도로는 전 세계 3위에 이를 정도로 활동이 왕성하다. 주요 활동으로 사랑의 집 짓기, 심장병 어린이 수술, 에티오피아 의료 지원 사업, 몽골 어린이 심장병 수술 사업, 필리핀 우물 파주기, 캄보디아 학교 세우기, 북한 동포 돕기, 몽골 방풍림 사업 등 국내외 에서 다양한 봉사활동과 장학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동건 회장은 1971년 로타리에 입회한 이후 3650지구 총재, 국제로타리 이사, 국제로타리 재단관리위원 등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총재로 재임하던 당시 1년 동안 32개 클럽을 창립해 1천7백83명을 회원으로 영입함으로써 세계 1위 지구로 뽑히는 성과를 올렸던 유명인사. 그의 회장 임기는 2008년 7월 시작된다. 이때부터 2년 동안 시카고에 상주하며 본부 직원 6백20명과 세계 7곳의 국제 사무국 직원을 관장하는 한편, 세계 재난 구호와 평화를 위해 자원봉사 활동을 펼친다. 이와 함께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보건, 기아 문제, 문맹 퇴치, 식수 문제 등의 해결 방안을 모색할 예정.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지구 곳곳에서 열리는 모든 로타리 행사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제창된다.

양동마을을 찾은 전 외교통상부 차관 유명환 씨(왼쪽), 로타리 3650 총재인 전순표(세스코 회장, 오른쪽) 씨와 산책하는 이동건 회장. 뒤로 회재 이언적의 집이 보인다. 동건 회장은 1971년 로타리에 입회한 이후 3650지구 총재, 국제로타리 이사, 국제로타리 재단관리위원 등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총재로 재임하던 당시 1년 동안 32개 클럽을 창립해 1천7백83명을 회원으로 영입함으로써 세계 1위 지구로 뽑히는 성과를 올렸던 유명인사. 그의 회장 임기는 2008년 7월 시작된다. 이때부터 2년 동안 시카고에 상주하며 본부 직원 6백20명과 세계 7곳의 국제 사무국 직원을 관장하는 한편, 세계 재난 구호와 평화를 위해 자원봉사 활동을 펼친다. 이와 함께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보건, 기아 문제, 문맹 퇴치, 식수 문제 등의 해결 방안을 모색할 예정.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지구 곳곳에서 열리는 모든 로타리 행사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제창된다.

“회장님께서 국제로타리의 차차기 회장으로 당선된 것은 한국로타리 역사의 큰 획이자 자랑입니다.”
“로타리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훌륭한 분이 많이 계신데, 그분들을 제치고 제가 회장이 된 것이 퍽 송구스럽습니다. 한국로타리 회원 여러분이 저를 성원해주셔서 여기까지 왔으니 주어진 업무를 열심히 하는 것이 그 성원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차기 회장으로서 하시는 일은 주로 어떤 것인지요?”
“로타리가 다른 단체와 다른 점은 회장, 차기 회장, 차차기 회장 이 세 명의 트리오가 함께 로타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국제로타리 사업 중에는 중장기 프로젝트도 많기 때문에 세 사람이 힘을 합해 사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차차기 회장은 차기 회장에게, 차기 회장은 회장에게 일을 배우는 시스템을 통하기 때문에 지속성 형성에 좋습니다. 저의 경우 앞으로 1년 반 동안 일을 배우게 됩니다. 로타리의 이 시스템을 다른 조직에서 배워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차 회장직을 수행하실 때, 중점을 둘 점은 무엇인가요?”
“어떤 분은 굉장히 눈부신 활동을 하시기도 하고, 다른 어떤 분은 윤리 면에서 굉장한 역할을 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로타리의 세勢를 강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971년 로타리 활동을 시작하셨으니, 한 분야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하셨다는 게 참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로타리는 활동을 하는 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드는 곳은 아닙니다. 1년 회비 47달러 내고, 밥값 갖고 가면 되거든요. 그만두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만 ‘로타리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나를 잊고 남을 도우려 생각하면서 돈을 낼 수 있을까’ 를 생각하니 번번이 못 떠나게 되더라고요.”
“올해로 한국로타리의 역사가 80년이 되는데, 아직 로타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요?”
“홍보를 하지 않아 그런 듯합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 시작한 봉사 단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로타리를 부자들의 단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로타리는 부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 소외받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쳐서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거든요.”
“이 회장님의 집안은 한국로타리 최초로 아버지와 아들이 총재를 역임한 ‘2대 총재 집안’으로 꼽힙니다. 이 회장님의 자녀(2남2녀)들도 로타리 활동을 하고 있는지요?”
“아들들은 아직 공부할 나이라 기부금은 내고 있지만 활동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활동을 해야겠지요.”
“총재로 활동하실 때 1년 동안 32개 클럽을 창립해서 전 세계 1위를 하셨지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지요?”
“열심히 한 것이지요. 때로 다소간의 기술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테크닉은 아주 작은 요소에 불과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데에는 그 무엇도 당할 것이 없습니다.”
“37년 동안의 활동 기간 가운데 가장 뿌듯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늘 로타리를 통해 남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을 뿌듯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지금 형사재판관으로 활동하시는 송상현 교수님, 윤호일 변호사님 등과 같이 자발적으로 회원이 되어 굉장히 열심히 활동하시는 로타리 회원분들을 만날 때도 참 좋습니다.”

한류 열풍이 이제는 국제 민간 차원의 봉사 단체로까지 뻗어가고 있다. 배우 배용준 씨부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이동건 국제로타리 차차기 회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성공은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면 우리도 각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뜻 깊다. 더구나 이동건 회장의 차차기 회장 피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초아의 봉사service above self’ 정신에 입각한 것이라 더욱 값지다.

김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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